2021. 10. 31. 김혁수

 

[본문_출애굽기 12:29-36_새번역]

29한밤중에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것들을 모두 치셨다. 임금 자리에 앉은 바로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감옥에 있는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두 치시니, 30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한밤중에 모두 깨어 일어났다이집트에 통곡소리가 났는데, 초상을 당하지 않은 집이 집도 없었다. 31바로는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서 말하였다. “너희와 너희 이스라엘 자손은 어서 일어나서, 백성에게서 떠나가거라. 그리고 너희의 요구대로, 너희는 가서 너희의 주를 섬겨라. 32너희는 너희가 요구한 대로, 너희의 양과 소도 몰고 가거라. 그리고 내가 복을 받게 빌어라.” 33 이집트 사람은우리 모두 죽게 되었다하면서이스라엘 백성에게어서 땅에서 떠나라 재촉하였다. 34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반죽이 부풀지도 않았는데, 반죽을 그릇째 옷에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나섰다. 35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이집트 사람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요구하였고, 36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사람에게 환심을 사도록 하셨으므로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요구대로 내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서,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

 

0. 들어가며 

- 하나님의 통치

9월은 창조의 하나님을 묵상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실 ,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계셨죠. 사람들로 하여금 돌봄 통치를 대행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에덴은 하나님의 지성소였죠. 속에서 사람들은 제사장의 역할, 대리 통치자의 역할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스스로가 신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성소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계획이 폐기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에 대한 꿈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에덴에 대한 비전을 회복하는 이었죠. 회복을 위해 그분은 직접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통치하십니다. 통치의 하나님을 우리는 지난 10 동안 계속 살펴 보았습니다. 통치의 방향은 회복이고, 그를 위해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분만의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시는데, 사람들을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약속을 주시고 약속에 의거해서 행동하심으로 통치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교리적 진술로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통치의 하나님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교리든 이야기든 우리의 기도와 통합되지 않으면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려지는 진리가 되어 나의 것이 되려면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묵상되고 기억되고 되뇌여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통치의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그분의 심판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그분의 부르심과 약속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진짜 심판을 한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들곤 합니다. 어떤 신학자들 마냥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기 하되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두 구원하신다는 생각을 붙잡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의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반역한 사람들의 처참한 결말에 대해 결코 묵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불편하지만 이야기를 살펴봐야 것입니다. 

 

- 요셉을 통한 복은 어디에? 

이집트 총리 요셉을 통해 하나님은 전세계가 복을 누리도록 일하셨습니다. 세계적 기근을 준비했고, 이집트는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기근 속에서도 살아남은 안남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요셉의 가문을 업신여겼습니다. 극도의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자신들을 부국으로 만들어준 요셉의 가문을 핍박하고 박해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셉의 후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이집트를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심판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10가지 심판

1) 이집트의

여러분, 이집트의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은 이집트에 이런 무지막지한 심판, 재앙을 내리시는 걸까요? 이집트가 오랫동안 우상을 숭배해왔기 때문일까요? 맞는 말일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들 자신들의 신을 오랫동안 섬겨왔습니다. 어떤 죄가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요셉의 자손들을 정당한 이유없이 박해했습니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무지비한 노동에 내몰았습니다.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죽여 버렸습니다. 부모로서는 도저히 참을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멸종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괴롭힌 이집트의 죄일까요? 그것도 맞는 말일 겁니다. 분명 이것도 이집트의 죄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가 묵상했던 흐름을 이어가보면, 이집트의 죄는 하나님의 에덴 비전으로의 회복을 가로막는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이집트 땅의 복을 흘려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당연히 하나님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나일강을 믿었고, , , 별을 믿었고, 소나 개구리 여러 가지 동물들을 믿었습니다. 요셉을 통해 에덴의 비전이 회복되길 원하신 하나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거부로 인해 다시 차질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 이집트의 신들 

이에 하나님은 이집트의 신들을 하나 하나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10가지 재앙이죠. 피개이파 가독우메 어장, 나일 강을 피로 바꿔 버리십니다. 개구리와 이와 파리가 사람들을 괴로힙니다. 가축들이 죽고, 독종 악성 종기가 생기고, 우박이 내리고, 메뚜기가 사방에서 닥치는 대로 갉아 먹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의 신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으며, 개구리의 신이 자신들의 다산을 책임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신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여겼는데, 이나 파리, 메뚜기에 의해 극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번성하는 농경문화의 중심 요소인 가축들이 죽어나갑니다. 자신들의 몸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밤새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간지럽고 아픕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을 찾아 제사를 드리고 기도했겠지만 돌아오는 것은 말할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지역의 작은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했겠죠. 그들은 자신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 신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태양을 가리신 겁니다. 히브리 민족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빛이 비추는데, 나머지 이집트 지역은 칠흙같은 어둠이 삼일 동안 깔리는 겁니다. 이건 충격 그자체입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던 신들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환한 빛으로 가득한 고센 땅을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신이라는 생각을 그제서야 다시 하게 되었을 겁니다. 

 

3) 하나님과 맞서는 파라오

이런 재앙과 심판 속에서도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끝까지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어둠이 내린 3 동안 파라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수가 많아지자 남자아이들을 죽이는 정책을 펴서 민족을 말살시키려고 했던 그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들이 사라지는 것은 참을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적절한 인구수로 노예가 계속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했겠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의 통로에서 노예로 전락시킨 파라오와 당시 권력자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에덴 비전의 회복을 위해 특별히 부르고 선택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자손들이 비전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상황을 그냥 참고 보실 없었던 겁니다. 

 

2. 회복을 거부하는 자의 최후 

1) 맏아들의 죽음 

결국 오늘 본문의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파라오부터 모든 이집트인의 가족 첫째 남자, 가부장제의 권력 계승자들을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집트의 리더들이 죽은 겁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있는 시스템의 근간, 첫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비전의 회복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시스템의 뼈대를 부숴버리십니다. 바벨탑과 도시를 지어 자신들만의 문명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시어 뿔뿔히 흩어지게 하신 것처럼 이집트의 근간을 흩어버리셨습니다. 

 

2) 강제된 순복

이쯤 되니까 파라오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모세와 이스라엘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가축과 금은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가능하면 빨리 떠나라고 합니다. 10개의 재앙과 심판으로 끝날 같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앞으로 재앙과 심판이 찾아오면 어쩌지라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쫓듯 내보냅니다.  

 

33 이집트 사람은우리 모두 죽게 되었다하면서이스라엘 백성에게어서 땅에서 떠나라 재촉하였다.

 

3) 심판

이렇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습니다. 부르심을 받아 은혜로 세워진 사람들과 약속을 하시고 약속을 지키심으로 통치하시는 그분이 일들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심으로써 다시 계획이 실행되도록 만드십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통치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심판은 단순히 죄에 대한 보복이 아닙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통치의 최종 수단입니다. 심판을 통해 에덴의 비전에 반대하는 사람과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부르심과 은혜와 약속의 사람들을 복권시키십니다. 그렇게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통치가 가속화됩니다. 이것이 심판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주적 심판이 되는 겁니다. 사단과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키시고, 부르심, 은혜, 약속의 사람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리 통치자로 복권시키십니다. 그렇게 회복을 위한 돌봄 통치가 가속화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우주적 심판이 되는지 보이시죠! 

 

골로새서 2:13-15

13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과 육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때문에 죽었으나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14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15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3. 하나님의 통치의 완결 

1) 회복, 부르심, 은혜, 약속 그리고 심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의 흐름을 이제 보았습니다. 그분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세상은 정복하기 위해 사람들을 징집하고 경쟁 속에서 무한 확장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파국, 파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에덴의 평화와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이를 위해 사람 사람을 부르시고 은혜로 세워가십니다. 그에게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도 약속에 제한을 받으시죠. 그러다가 이런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고 반대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방향을 유지하십니다. 

 

2)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에덴의 회복의 모습을 가장 보여준 이스라엘의 왕이 누군줄 아세요? 맞습니다.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이스라엘은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과 강력한 통치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왕국을 짓고 세상의 모든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요, 소문이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견문, 견학을 하러 옵니다. 하나님의 회복의 기운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지헤롭다는 솔로몬이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방인 아내들의 설득에 빠져 온갖 우상을 들여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땅을 둘로 나누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뒤에도 하나님의 통치 방향에 어긋나게 나라를 이끌던 북이스라엘을 앗수르를 통해 멸망시키십니다.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4. 나가며 

- 회복의 주체인가? 방해꾼인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회복의 비전에 참여하고 있나요?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나요? 아님 비전을 방해하고 있나요? 세계 돌봄 통치의 대리 통치자로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님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작은 세상의 주인 행세,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나요? 이제 이런 질문들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리통치자로 참여하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부르시기만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선물과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주신 그분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약속을 지키길 원하십니다. 그래야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복의 방향에서 벗어나서 우리 맘대로 약속을 깨고 회복의 방향을 방해하고 훼방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심판의 본질이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회복의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부르심, 은혜, 약속의 사람들을 복권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합시다. 에덴의 비전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합시다. 여러분 자신만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에 참여합시다. 그분의 대리 통치자가 되어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공간을 에덴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함께 합시다. 이제 11월입니다. 2021년을 마무리하고 2022 계획하는 시기입니다. 그동안 청년부 운영위원들이 최선을 다해 섬겨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2022년에 운영위원으로, 소그룹 리더로, 찬양팀으로 섬기길 원하시는 분들은 저에게 혹은 운영위원들에게 말씀해 주세요. 청년 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각자의 가정, 학교, 직장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죠. 하지만, 청년 공동체 속에서 실감나게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회복을 위해 살아가자고, 그런 공동체를 만들자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통치의 하나님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인 에덴 비전의 회복, 통치 방식인 부르심, 은혜, 약속, 심판에 대해 떠올리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통치가 마음에 뿌리내리도록 기도합시다.  

 

2.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청년들이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꿈과 비전으로 마음과 생각이 채워지도록 기도합시다. 더불어 우리 청년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합시다. 운영위원회에 속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요?  

 

2. 나와 우리 공동체는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입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고, 어떤 면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2021. 10. 17. 김혁수

 

[본문_창세기 28:10-22_새번역]

10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하란으로 가다가, 11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12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13주님께서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것이다.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6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7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18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위에 기름을 붓고, 19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20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21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22제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집이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0. 들어가며 

- 통치의 방향과 방식 

10 들어 주간, 우리는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그저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에덴의 비전을 회복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대리 통치자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조화롭게 돌보길 원하셨습니다. 에덴의 비전으로의 회복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번째 방식은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부르심입니다. 데라를 부르시고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공간으로 부르십니다. 

 

- 번째?

오늘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의 번째입니다.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통치를 떠올리면 법률, 규정, 재판, 행정 조치 등이 먼저 생각나곤 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법과 규정이 없으면 세상을 돌아가지 않습니다. 헌법과 법률을 근거를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의 근간은 그분의 은혜입니다. 그런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베델의 은혜 

1)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둘째 아들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야곱은 도망가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고 있어요. 여러분, 지명 중에 조금 익숙한 지명이 보이시나요? 지난 주에 데라의 가족들은 바빌로니아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 처음에 어디에 정착했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란입니다. 하란에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죠. 그럼 브엘세바는 어딘가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습니다. 가나안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아래에는 네게브라는 사막 같은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지역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이 정착을 했구요.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장자의 권리를 빼앗습니다. 에서는 힘도 세고 사냥도 잘했습니다. 형의 미움을 받아 죽겠다 싶었던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외삼촌 라반을 찾아 하란으로 여행중입니다. 

 

2) 베델에서의 하룻밤 

북쪽으로 올라가던 브엘세바에서 80km 떨어진 루스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삼사일을 빠르게 걸어야 도착할 있는 거리입니다.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삼사일을 처음가는 길을 따라 북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란까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쉽게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피곤한 몸을 눕힙니다. 하루 종일 걸어본 사람은 알죠. 눕자 마자 잠에 빠져듭니다. 그리곤 꿈을 꿉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있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13주님께서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14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것이다.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십니다. 위의 모든 사람들이 야곱을 통해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것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말씀이었습니다. 

 

3) 은혜로 부르심 

하나님은 야곱에 대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도망자, 처량한 신세, 돌베게를 베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외로운 여행을 떠난 야곱입니다. 형과 달리 야곱은 집안에서 곱게 자랐습니다. 어머니를 도와 음식과 집안일에 소질이 있었지 이렇게 야외에서 생활하는 것은 그에게 두려움을 주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축복과 함께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부르심은 선물 혹은 은혜라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는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능력과 권세와 돈으로 기준을 세워 부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계획에 의해 당신의 선물을 베푸십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이죠.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은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처량한 도망자 신세, 야생 동물들의 밥이 되거나 사냥이라면 당대 최고의 사냥꾼이었던 에서의 추적으로 죽을 수도 있는 신세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돌베게가 눈물에 젖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비참한 신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번째 통치 방식입니다. 

 

2. 역사속 은혜의 순간들

1) 이집트의 히브리인

좀더 예를 들어 볼까요! 이집트에서 고통받던 히브리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으로 통치를 실현해갑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출애굽기 2:23-25)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의 고통에 못이겨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 조상의 하나님께 SOS 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에 반응하고 계십니다. 에덴 비전을 회복시키는 방향을 가지고 제사장 나라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을 구출하시죠.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2) 페르시아 시대 예루살렘

비슷한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여러분, 솔로몬 시대에 최전성기의 국력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자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맙니다.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지역에서 새롭게 일어난 나라가 페르시아였는데요, 페르시아 통치 시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벽이 없어서 크게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부르짖음과 기도에 응답하시는 장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있습니다.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가 말이다. 이십년 기슬르월, 내가 도성 수산에 있을 때에, 2나의 형제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기에, 이리로 사로잡혀 오지 않고, 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어떠한지예루살렘의 형편은 어떠한지를 물어 보았다. 3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였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에 탔습니다.” 4 말을 듣고서, 나는 주저앉아서 울었다. 나는 슬픔에 잠긴 채로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5아뢰었다.”(느헤미야 1: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고통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성벽을 다시 재건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계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3) 로마 시대 유대인

마지막 예가 있습니다. 로마 시대 유대인의 삶도 고단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황제의 명령에 어쩔 없이 따랐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들의 삶의 단면을 있습니다. 

 

“1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누가복음 2:1-3)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통치가 닿는 모든 곳의 사람들에게 호적을 하기 위해 자기 고향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제국의 인구를 파악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걷게 하기 위한 다목적의 명령이었습니다. 명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지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고향을 찾아야 합니다. 이게 고대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출해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25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누가복음 2:25)

 

예수님이 태어났을 , 그분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되시는 분임을 알아본 안되는 사람이 바로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는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그에게 엄청난 은혜였습니다. 

 

3. 은혜로 통치하심 

1) 약속 & 약자 

우리는 이런 예들을 살펴 보면서 하나님은 능력과 돈이 많은 사람들보다는 고통받는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사람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힘과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장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끝까지 신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히브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랬던 겁니다. 페르시아 시대의 예루살렘의 주민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으며 고통스런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로마시대의 유대인들도 비슷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경향성을 갖고 계십니다. 

 

2)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대리 통치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걸까요? 이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나타나셔서 도움을 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 하여금 대리 통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교만하고 자기 성취가 강한 사람은 대리 통치를 거부하곤 합니다. 그들은 대리 통치가 아니라 단독 통치를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밑에서 세상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탑이 되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맘대로 주무르기 원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자신의 성공, 명예, 부를 우선시 합니다. 그들은 고통의 자리에 머무르기보다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을 쉽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봤자, 선물을 자신을 위해 사용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들이 신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리 통치자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며, 고통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들이 비록 고통의 트라우마로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때로는 그로 인해 실수도 많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태도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4. 나가며 

- 눈물의 베개

하나님은 밤에 야곱의 눈물의 돌베게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에게도 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눈물의 베게는 무엇인가요? 때로 잠을 설치게 만드는 고통스런 상황은 무엇인가요?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제대로 이루는 밤은 없었나요? 하나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약점이 많아 고통받는 사람에게 은혜로 다가오십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일을 맡기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오늘 밤에 이렇게 기도하면서 잠이 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은 신뢰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주신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상황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듭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눈물의 베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오는 좋은 통로가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하나님은 당신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통 속에서 당신에게 부르짖는 사람에게 은혜 주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생각하나요?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계시나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2. 혹시 최근 여러분의 정서 상태는 어떠한가요? 슬픔, 아픔, 고통, 두려움, 외로움, 좌절, 실망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나요? 우리는 이런 아픔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아픔에 찾아와주셔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함께 드립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의 특징이 있나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하나요?       

 

2. 최근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던 사건이 있었나요? 무엇이었나요?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나요? 

2021. 10. 3. 김혁수

 

[본문_창세기 11:1-9_새번역]

1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시날  들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대신에 벽돌을 쓰고, 대신에 역청을 썼다. 4그들은 말하였다. “, 도시를 세우고, 안에 탑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주님께서 거기에서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땅에 흩으셨다.

 

[본문_창세기 11:1-9_현대인의 성경]

1처음에 세상은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2그런데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에 있는 평야 이르러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3그들은, 벽돌을 만들어 단단하게 굽자하고 서로 말하며 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였다.

4그들은 , 성을 건축하고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떨치고 우리가 사방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고 외쳤다.

5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쌓는 성과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셔서

6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들은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상에 흩어 버리시므로 그들은 쌓던 일을 중단하였다.

9여호와께서 거기서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에 곳을 ‘바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0. 들어가며 

- 시리즈 소개

지난 9 동안은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해보았습니다. 10월은 통치의 하나님으로 묵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해 놓고 멀리 하늘 높이 앉아계시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혹은 관찰도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휴양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대리자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려고 하셨는데, 대리자의 반역으로 실패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통치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통치는 어떤 성격인지, 정체를 함께 파악하고 묵상하는 10 달이 되길 바랍니다. 

 

- 몽골 룬솜

15년전부터 우리 나라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몽골 룬솜 지역에 나무를 심어 왔습니다. 몽골 고유 수종인 비술나무, 성장이 빠른 포플러 등을 심어왔습니다. 지금은 10미터가 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서 사막화를 막고, 황사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는 625전쟁으로 전국토가 벌거숭이 산으로 볼품없었습니다. 그러나 식목일 지정하고 매년 전국민이 나서서 나무심기를 실천해서 지금은 아름다운 산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런 자연 돌봄의 경험을 살려 몽골 룬솜의 사막화를 막았던 것이죠. 이런 것이 세상 돌봄 통치의 측면이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통치의 방향을 회복으로 삼으셨습니다. 창조 당시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그분은 타락한 세상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조치들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그분의 통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1. 시날 평야(2)

1) 메소포타미아 문화 

오늘 등장하는 지역에 대해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날 평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구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살펴보니 분명하게 바빌로니아에 있는 평야라고 적혀 있습니다. 강의 하구에 고대로부터 유명한 도시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고대 바빌론이었죠. 

 

2) 니므롯과 벨렉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의인이었던 노아,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대홍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부터 세상의 많은 민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 , 야벳의 자손들이 각자 세상으로 흩어져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10장까지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주목해 봐야 인물 둘이 있습니다. 명은 용맹무쌍한 당시의 장수 니므롯입니다. 그에 대한 성경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8구스는  니므롯을 낳았다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이다. 9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사냥꾼이었다. 그래서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다. 10그가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이다. 11그는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12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는데, 그것은 아주 성이다.(창세기 10:8-12)

 

힘이 사냥꾼은 당시의 가장 돈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렵, 채집, 농사가 공존하는  시스템에서 가장 고급스런 고기들을 잡아 있는 사람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힘도 세고 짐승을 죽이는 능력도 탁월한 그는 지극히 공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함의 자손인 니므롯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성을 지었는데요, 지역이 어디라구요?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날 평야, 바빌론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갔다고 적혀 있는데요. 아마도 바빌론 성과 탑을 쌓다가 하나님이 언어를 혼란케 하시니 지역으로 떠날 , 바로 앗시리아나 니느웨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니므롯은 고대 세계의 엄청난 영향을 여러 민족들의 시조였습니다. 

 

, 우리가 살펴보아야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벨렉입니다. 다음을 읽어볼까요? 

 

25 에벨은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벨렉이라고 하였다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이다.(창세기 10:25)

 

그렇습니다. 이제는 노아의 맏아들 셈의 자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셈은 에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다.” 이렇게 창세기 10 21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에벨의 자손들이 크게 번성했던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에벨의 자녀가 명이 등장하는데, 명의 이름이 벨렉입니다. 뜻은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입니다. 아마도 벨렉이 활동하던 시기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니므롯과 벨렉은 깊이 연관되어 있어 보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족인 니므롯과 족인 벨렉은 시날 평지에서 서로의 세력을 규합하여 바빌로니아 성과 탑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가능성을 전제로 오늘 설교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2. 성과 탑을 쌓는 이유(4) 

원래 이들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니므롯과 벨렉은 바빌로니아 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서로 대화가 통했던 같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비전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지역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 구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견고한 성과 신비롭고 성스러운 탑을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구조물들을 만들려고 했을까요?

 

1) 이름을 떨치자

첫째로,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고 싶었습니다.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그들은 말하였다. “, 도시를 세우고, 안에 탑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니므롯과 벨렉의 태도는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했던 아담과 하와를 닮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영광스런 이름을 듣고 칭송하기를 바랬습니다. 대신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흙대신 역청을 만들었습니다. 견고한 건축물을 빠르게 효율적으로 만드는 필요한 재료들이었습니다. 건축을 위한 돌을 떠오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듭니다. 그러나 규격이 같은 벽돌을 만들 있다면 작업 속도도 올라가고 건물의 내구성도 높아집니다. 이러한 건축기술의 발견은 이들로 하여금 상상도 못한 일을 꾸미게 만들었던 겁니다. 바로 스스로가 신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특히 니므롯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사냥을 하면 못잡는 동물이 없습니다. 사냥의 , 니므롯입니다. 대한민국에 3 신이 있다고 하죠. 장사의 백종원, 강아지의 강형욱, 육아의 오은영. 이런 것처럼 고대 세계의 사냥의 신은 니므롯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더욱 널리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죠. 유툽 구독자 100만명을 넘어 1억명, 10억명을 달성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2) 흩어지지 말자

둘째, 그들은 흩어지지 않기 원했습니다. 다시 4절을 읽어보죠. 

 

4그들은 말하였다. “, 도시를 세우고, 안에 탑을 쌓고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우리는 바벨탑 사건 하면, 무턱대고 높고 높은 탑을 건설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안에 탑을 쌓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의 도시란 성을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니까 견고한 성을 짓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중심에 2 롯데월드같은 타워, 당시엔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여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특히 견고한 성을 쌓고 시날 평지의 아주 멀리까지 내다볼 있는 탑을 쌓으면 어떤 위협도 미리 알아차리고 방어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도 대비할 있습니다. 아무리 홍수가 와도 버틸 수가 있습니다. 하늘까지 닿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있다면, 그들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생명을 보전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성과 신전 탑을 세운 것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니므롯과 벨렉을 칭송하고 그들이 높은 신전 꼭대기에 앉아 세상을 호령한다면 그들은 결국 신이 되어가는 겁니다.  

 

3. 하나님의 원래 계획 

1) 사람을 통한 세계 돌봄 통치 

여러분, 이런 계획과 행동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계 돌봄 통치를 실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지 그들이 원탑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니므롯과 벨렉은 거대한 성과 탑을 지어 자신들이 신이되어 자신들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계획이었습니다. 

 

2) 사람을 통한 만물과의 평화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만물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원래 계획이었죠. 아담과 하와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이 바로 이런 역할이었죠. 하지만 니므롯과 벨렉은 세상으로 퍼져나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드러내기는 커녕 사람들을 모아서 고립시키고 자연 만물은 자신들의 생존과 쾌락을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립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해서 에덴 성전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노아와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은 세상 돌봄의 대리 통치를 기대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동물들을 데리고 오시는 장면은 흡사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기 위해 데리고 오시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노아와 가족 그리고 후손들은 세계 돌봄 통치를 다시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걸 기대한 것이죠. 

 

그런데 다시 허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니므롯과 벨렉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그들 스스로 안전을 도모하고 다른 민족과 경쟁하기 위해 성과 탑을 짓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건축 공사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아상이 변해버립니다. 

 

4. 하나님의 조치/통치(5-8)

오늘 주제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고장난 세상을 하나님은 다시 고치고 회복시키기 위해 세상에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고치고 회복하는 .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이었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독재가 아닙니다. 기존 질서 유지에 집착하는 기득권자들의 보수주의도 아닙니다.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주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원래 계획과 의도로 회복시키기 위해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시는 회복주의자이십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회복하고 계시나요? 

 

1) 강림

먼저,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5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삼위 하나님은 세상으로 내려오십니다. 하늘에서 없어서가 아닙니다. 직접 강림하여 개입하시기 위함입니다. 

 

2) 회의

둘째, 회의를 하십니다. 원인을 분석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판단하십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이야 인간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습니다만 그런 생각이 가능하게 만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쓰니 그들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하시죠. 말을 뒤섞기로 말입니다. 

 

3) 흩어버리기

그렇게 되니 결국 그들은 성곽 공사와 성전탑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서로 말이 안통해 공사를 중단하고 맙니다. 그리고 서로 어색했는지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원래 계획이 다시 가동되도록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세상에 퍼져서 세상을 위한 돌봄 통치로 나아가도록 재배치하셨습니다. 니므롯이라는 최고의 권력자요 유명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대체하는 현실의 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5. 나가며 

- 하나님의 통치_회복시키기 

하나님의 통치는 결코 독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존 질서를 지키는데 올인하시는 극우보수주의자도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사회질서 전복 자체에 목숨건 극단적 진보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분은 원래의 계획과 의도가 다시 구현되도록, 아름다웠던 에덴의 꿈과 비전이 다시 회복되도록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것이 그분 통치의 방향입니다. 회복시키기가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역사를 통해 회복의 방향을 결코 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노아를 부를 때도, 아브람을 부를 때도, 모세와 이스라엘을 부를 때도, 다윗과 솔로몬을 부를 때도,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부를 때도 하나님은 원래의 계획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결국 당신 스스로 세상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회복을 위해 당신 스스로 희생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의 통치와 지향성이 다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신이 되길 원하고 신놀이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하기 위해 권력을 강화하고 강압하고 억누릅니다. 통제합니다. 보호해준다는 미명으로 백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합니다. 강력한 상징을 사용해 사람들의 정신과 혼을 홀딱 빼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세계 돌봄 통치의 회복을 바라십니다. 대리통치자인 사람들을 통해 세상 만물과의 평화를 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방향에 더욱 공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통치와 조치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창조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의 역할을 다시 회복시기 위해 세상에 개입하시고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려봅시다. 그분은 여전히 통치하십니다. 통치의 방향은 회복입니다. 그분의 통치에 대해 오해했다면 우리의 생각을 바꿔달라는 기도를 드립시다. 

 

2. 하나님은 사람들과 세상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죠. 온전한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원래의 사람에게 주셨던 정체성과 역할을 다시 부여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돌봄 통치의 대리 통치자이며,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사실을 우리 존재에 각인하여 우리의 일차적 소명으로 삼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 우리 마음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하나님의 통치의 방향은멋대로, 현상유지, 사회 전복 아니라 회복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 회복되어야 부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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