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19일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5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55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NRSV

When the days drew near for him to be taken up, he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51절).

 

주석

문학적 전환부는 공동체의 포용성에 관한 질문,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공동체의 전달자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거절에 대해 하나님은 즉각 종말론적 심판으로 대응하지는 않으실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야고보와 요한 

야고보와 요한은 역시 예상대로 제자들 중에 핵심 리더십이었다. 

그들은 과거 소돔과 고모라를 찾아갔던 천사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이 내려 태워버리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자신들이 뭔가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 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에서는 나오면서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적이 있다. 

 

누가복음 9:5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삼아라.”

 

그저 그렇게 소명을 이루며 나아가되, 그 사이에 영접하지 않는 것을 저주와 심판으로 대응하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증거를 삼으라는 것이다. 

영적 책임을 다했다는 표시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한참 더 나갔다. 

한 마을을 불로 태워버리라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예수님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다. 

물론 영접하지 않는 마을들에 대해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더 견디기 쉬울 만큼 그 고을들의 사람들이 당할 고통의 크기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1:20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21“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것은 나중 심판날을 예상하면서, 구약의 선지자 전통을 따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 즉각적 심판을 명령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마치 그들이 심판자인 것처럼, 예수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아마도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예수님이 영광받으시러 가는 길이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생각이 달랐다. 

예수님은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지만, 제자들 생각엔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공식화하러 가시는 줄 알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왕위 대관식을 하러 가시는 분의 앞길을 방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분했다. 

원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했지만, 이렇게까지 분노를 폭발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은 심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러 가는 것이다. 

죽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가신다. 

제자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린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마고의 귀를 떨어뜨렸던 베드로에게 그 칼을 집어 넣으라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폭력의 길이 아니라 순종의 길을 가신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왜 없으신가! 

예수님도 욕도 하시고 화도 내셨다. 

그러나 즉각적 심판을 미루시고 최후 심판까지 견디신다. 

가라지 비유가 그걸 말해준다. 

가라지가 보인다고 즉각 뽑지 않는다.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사마리아 지역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다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심판한다는 것은 과하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결국 제자들을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핵심 제자 3명은 예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받는다. 

베드로도 “사탄아”라며 꾸짖으신 적이 있다. 

야고보와 요한도 지금 이 현장에서 꾸짖으신다. 

아마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사탄의 음성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즉각적 심판은 예수님의 옵션이 아니었다. 

그건 사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아끼고 곁에 두시는 제자들은 영적 교만의 위험에 항상 놓여 있다. 

교회에 지도자들은 항상 영적 교만의 위험에 놓여 있다. 

쉽게 분노하고 판단하고 정죄한다. 

거기로부터 나는 자유한가! 

 

[오늘의 기도]

오래참으시는 주님, 

저는 기분따라 말하고 기분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영적 교만에 젖어 사탄의 음성과 생각에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항상 주님께 묻고 주님의 뜻에 깊이 천착하도록 도와주세요. 

제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 

한 템포 줄여서 감정을 다스리고 사탄의 음성에 노출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2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 것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알았다.

2 요압이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슬기로운 여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였다. "그대는 초상당한 여인처럼 행동하시오.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이미 오랫동안, 죽은 사람을 애도한 여인처럼 꾸민 다음에,

3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호소하시오." 요압은 여인에게, 말을 일러주었다.

4 드고아에서 여인은 왕에게로 나아가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절을 뒤에 "임금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5 왕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니, 여인이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이 죽어서, 가련한 과부가 되었습니다.

6 여종에게 아들이 있는데, 들에서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들 하나가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7 그런데 이제는 집안이 들고 일어나서, 종에게, 형제를 때려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죽은 형제의 원수를 갚고, 살인자를 죽여서, 상속자마저 없애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남아 있는 불씨마저도 버려서, 남편이 땅에 이름도 자손도 남기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8 듣고 왕은 여인에게 말하였다. " 문제를 두고서는,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겠으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9 그러나 드고아 여인은 왕에게 아뢰었다. "우리의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일에 있어서 허물은 저와 아버지의 집안에 있습니다. 임금님과 왕실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10 왕이 대답하였다. "누구든지 너를 위협하거든, 그를 나에게로 데리고 오너라.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다."

11 여인은 간청하였다. "그러면 임금님, 임금님께서 섬기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셔서, 저의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집안 사람들이 살아 있는 저의 아들까지 죽이는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12 여인이 간청하였다. "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말씀만 드리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13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처럼 그릇된 일을 하셨습니까?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친아들인 왕자님이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지금까지 종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렇게 말씀만 하시고, 왕자님을 부르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4 우리는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셔서 비록 내어쫓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15 높으신 임금님, 제가 지금 임금님을 찾아 뵙고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까닭은, 제가 친척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문제를 임금님께 아뢰면, 임금님께서 제가 간구하는 바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16 저의 집안 사람들이 저와 저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끊어 버리려고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저의 사정을 들어서 아시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7 종은 ,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임금님은 바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까, 저의 호소를 들으시고 선악을 가려내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이 섬기시는 하나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18 마침내 왕이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을,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말고 대답하여라."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19 왕이 물었다. "너에게 모든 일을 시킨 사람은 바로 요압이렷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임금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은 임금님의 신하 요압입니다. 그가 모든 말을 종의 입에 담아 주었습니다.

20 왕자님의 일을 되게 하여 보려고,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이런 일을 꾸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슬기로우시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실 압니다."

 

 

압살롬이 떠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을 향하고 있으나 다시 불러오지 못합니다. 요압은 한 여인을 보내 다윗의 상황과 비슷한 사례를 실제 자신의 이야기처럼 말하도록 지시합니다(1-11절). 자신을 돕겠다는 다윗의 맹세를 들은 여인은 왕의 모순을 지적하며 압살롬을 데려 오라고 권합니다(12-17절). 다윗은 이 모든 말들이 연출에 의한 것임을 직감하고 배후에 요압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18-20절).

 

다윗에게 압살롬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요?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있었다면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 실행에 옮겼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자신의 입으로 말해버렸으니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매한 마음은 미지근한 화해로 이어지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킵니다.

 

——

 

역사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각자의 입장에 서면 판단이 바뀌기 마련이다. 

아버지로서 압살롬과 빨리 화해를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님 왕으로서 죄인에 대해 영구히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다윗 왕에게는 여전히 많은 아들들이 있다. 

압살롬이 외모나 기개가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삼하 14:25)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교활하고 폭력적이다. 

암논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다.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왕은 아들에 대한 정당한 벌을 내렸어야 했지만,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물쩡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압살롬은 큰형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으로 도망했다. 

평생 거기서 사는 것이 압살롬에게나 다윗 왕에게나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심각한 딜레마가 여기도 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둘의 역할을 함께 있냐는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왕이 없다. 

왕이 되는 순간, 왕국의 통치를 위해 사적 관계를 공적 원리로 재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되는 순간, 가정과 나라를 동시에 관리하고 보살피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차라리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도덕적 명분도 분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진심으로 따랐다. 

왕이 되어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을 , 그것을 해결할 의지와 지혜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왕은 오롯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분만이 진정한 왕이 되실 있다. 

사무엘상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백성이 왕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싶지 않아서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 왕은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도 지혜도 없다. 

그러니 어쩔 없이 분열의 씨앗이 자라게 되고, 전쟁의 빌미가 제공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젊고 능력있는 정치인의 등장은 반갑다. 

청년 세대를 대변하면서 청년의 지지를 받아 정치권에 청년의 문제를 해결해 있는 대표주자가 된다면 그것도 좋을 일이다. 

물론, 개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난관을 계속 만나게 것이기에, 그래서 온갖 딜레마 속에서 고통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인간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든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다. 

부르심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자리다. 

공동체 지도자의 자리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그분들이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공동체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배제할 없기에, 항상 부딪히는 날까로운 이슈들을 다뤄가며 이루는 밤들이 늘어가게 된다.

공동체에는 항상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 앞에 선봉장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직장에서도 책임있는 자리, 관리자의 자리에 승진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한다. 

사토리 세대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도 보이는 지점이다. 

책임지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래서 바울은 권세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P4G 국제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개회식 장면을 보았는데, 사슴이 거닐고 나비가 나부끼는 소나무 숲에서 대통령 연설이 진행되었다. 

증강현실이 보여주는 회복된 자연이 모습이 성경이 꿈꾸는 자연과 닮았다. 

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Global Goals 2030 줄임말이 P4G이다. 

자연의 회복을 위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모아지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도자들이 어디에 힘을 모으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문제는 오랫동안 세계는 세계 평화를 위해 수많은 선언을 했지만, 아직도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자연을 회복시키겠다는 지도자들의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목에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지구의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역에서도 분명히 필요하다. 

 

다윗의 딜레마를 이해한다. 

그의 어정쩡한 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태도도 이해한다.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국 분열과 전쟁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찌보면 다윗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찾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도할 밖에 없는 날이다. 

 

——

인간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은 한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원과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수많은 이슈와 문제는 옴짝달싹 없이 만듭니다. 

하나를 결정하면, 결정에 고통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결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고통받습니다. 

고통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지만 고통을 줄이는 결정이 과연 공동체의 미래에 좋은지도 헷갈립니다.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주님, 우리의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구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최종결정해 주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