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9월 19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35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어떤 눈먼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다가,

36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어 보았다.

37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그에게 일러주었다.

38 그러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39 앞에 서서 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크게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0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니,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4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3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를 따라갔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ESV]

And those who were in front rebuked him, telling him to be silent. But he cried out all the more,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39절)

 

[주석]

39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아이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듯이(18:15) 그가 큰 소리로 간청하는 것을 방해로 생각한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어떤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인가? 

여리고의 눈먼 사람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징조다. 

그날 돈이 꽤나 쏠쏠찮게 들어올 조짐이다. 

평소에 하던 일이다. 

습관이다. 

매번 구걸하던 자리, 아마도 평균적으로 제일 돈이 잘 들어오는 자리였을 것이다. 

무리들이 지나가면서 수군대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궁금함이 치솟는다. 

돈이나 많이 벌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궁금함은 못 참는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말한다. 

예수가 누군지는 대충 알았지만, 실제 그분이 여리고를 지나갈 줄은 잘 몰랐다. 

곧바로 소리를 지른다. 

돈도 돈이지만, 앞을 보는 것이 우선이다. 

태어나면서 소경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살면서 눈이 멀었을 수도 있다. 

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열망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니 예수라는 소리에 단박에 외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렁차게,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앞에 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뒤를 쳐다본다. 

소경에게 소리친다. 

쫌 조용히 하세요. 

외치는 소리가 서로 부딪힌다.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아마도 소경의 목소리가 더 컸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이 다시는 돈을 주지 않더라도, 일단 간절한 마음으로 외친다. 

몇몇 사람들이 오더니만,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자신을 이끌어 예수님에게로 데려간다.

손을 잡을 때는 깜짝 놀랐다. 

아마도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제자들에 이끌리어 예수님께로 간다. 

그 걸음 걸음이 마음의 염원이 담긴 슬로우 비디오다. 

예수님이 묻는다. 

무엇을 바라시나요? 

답이 뻔한 질문… 

그러나 예수님은 물으신다.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 직접 입으로 꺼내기를 원하신다. 

보기를 원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작은 소리였을지, 큰 소리였을지… 아마도 제법 큰 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그동안 외친 외침도 그렇고, 그의 열망도 그렇고, 꾸짖는 사람들을 뚫고 끝까지 외쳤던 그의 마음도 그렇고.

눈을 뜨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눈을 떴다. 

그가 다시 본 것은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 

하나님을 보았다. 

구원을 보았다. 

문자 그대로 어둠에서 벗어났다. 

육체의 어둠은 인생의 어둠으로 이어졌었고, 오랫동안 무시당하여 구걸하던 삶이었다.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인생. 

자유의 인생이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같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요, 주님으로 인정한 것에 있다. 

그리고 소리친 것이다. 

그리고 꾸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뚫어 낸 것이다. 

이 믿음이 그를 살렸다. 

그는 이제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시 인생을 살아간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분이 곧 죽게될 예루살렘으로 따라 올라간다. 

그분과의 만남과 교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따라간다. 

 

그분께 외칠 수 있는가? 

우리의 상황을 고쳐달라고.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해달라고. 

숱한 자살의 위기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위기의 청소년, 위기의 중년, 위기의 가정, 위기의 학교, 위기의 국가… 

위태롭다. 

사회도 위태롭고, 개인도 위태롭다. 

 

[오늘의 기도]

삼위 하나님,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위태롭습니다. 

자살률은 전 세계 1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끊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큼 생의 의지를 발휘하기가 어렵습니다. 

스트레스는 많고, 어찌할 바를 모를 딜레마도 많습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자신이 당한 고통이 두려워 다른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합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삼위 하나님,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주눅 들거나 옴짝달싹 못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소서. 

대범함을 주소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주님으로 인해 담대한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의 외침을 들어 주소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16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31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34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SV

But love your enemies, and do good, and lend, expecting nothing in return, and your reward will be great, and you will be sons of the Most High, for he is kind to the ungrateful and the evil(35절).

 

주석

원수를 사랑하라(27절) 예수님의 명령은 그리스-로마의 상호주의와 자선의 윤리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나 보답을 위한 정치적·경제적 거래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에 훨씬 가깝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원수 사랑 

이 대목에 이를 줄 알았다. 

현대인들이 가장 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 

예수님의 평지 설교가 ‘가난한 사람에게 축복이 있고, 부요한 사람에게 화가 있다’로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오직 의존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에 복이다. 

부요한 사람은 하나님 외에 의존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난받을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 다음에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신다. 

이 대목에 이르면, 예수님이 이길도 저길도 막아버리신 느낌이다. 

하나님만 의존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 당연히 핍박이 찾아온다. 

그때, 자신을 핍박하는 그 원수를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도리어 그 원수를 사랑하라신다. 

막다른 골목이다. 

그 길 밖에 없어 보인다. 

차라리 시편은 저주시라도 있다. 

그러나 평지 설교는 축복의 말, 기도의 말 밖에 대안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원수에 대한 축복과 기도이다. 

과연 처음부터 이것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모함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축복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신다. 

예수님은 어떠셨는지 생각해본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날까로운 비판과 함께 욕을 하시기도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원수를 행해 축복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셨다고 봐야 하는데, 이런 모순이 없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동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위선자들을 향해서는 화를 내신다.(눅6:42) 

2)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로마 군인들, 유대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23:33-35)

 

원수를 향해 복을 빌고,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기대하셨고, 그것이 가장 큰 복이다. 

원수도, 모욕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으며, 예수님은 그렇게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도하신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는 잘못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무시할 만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도리어 원수들의 잘못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을 막는 것이며, 이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때로는 그렇게 비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그들에게 복이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원수를 향한 축복과 기도의 기본적인 태도가 있으나, 그것의 표현은 다양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지도자들을 용서하기 어렵다.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던 히틀러, 캄보디아의 식자들을 학살했던 폴 포트… 이런 사람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고 말고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지금도 전쟁을 일으키는 전세계 지도자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까지의 생각의 끝엔, 결국 그들을 향한 축복과 기도가 자리잡고 있다.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면 참 좋을 한 명의 사람들이다. 

그런면에서 그들을 축복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동시에 그들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기에 비판도 하고 욕도 한다. 

이 둘이 동시에 일어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독사의 자식”이라며 비판하고 욕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기계적인 순종의 문제로 단순화 할 수 없다. 

원수를 위해 축복과 기도를 멈추지 말라. 

그렇다고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과감히 비판하라. 

비판이 축복이 되는 경우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도 고통을 주는 가족이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고통을 안긴다. 

이런 원수가 따로 없다. 

이 경우에는 어떤가? 

과연 용서하고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 영성의 시험대다. 

 

주님이 어려운 과제를 주셨다. 

 

 

2. 하나님의 인자

악인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버겁다. 

그들에 대해 화를 내시고, 분노를 쏟아 내시고, 심판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크다. 

인자하신 하나님보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더 좋다. 

사적 복수, 심판의 콘텐츠가 뜨는 이유가 이런 인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당한대로 갚아 주고 싶은 심리. 

고통당한 것 이상으로 복수하고 싶은 심리.

인간의 자연스런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단다. 

고구마처럼 답답해진다. 

사람들은 사이다 하나님을 기대한다. 

신이라면 사이다지…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는 분이신 것은 확실하다. 

한 두 번 참으로시는 것이 아니다. 

한 달 두 달이 아니다. 

몇십년 몇백년을 참으시는 분이시다. 

즉결심판보다는 기본적으로 참고 인내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즉결심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웃사,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오래참으신다. 

 

구약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해왔다. 

예수님도 숱한 모욕과 고통을 오래 참으셨다. 

성령님도 지금 우리를 오랫동안 참고 계신다. 

 

조금 더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기제는 나의 성격과 경험에 따른다. 

내 기준의 가해자, 내 기준의 원수지, 완전 객관적인 가해자, 원수는 사실 드물다. 

내게 찾아오는 분노는 객관적 기준에 의한 분노가 아니다. 

심리적, 주관적, 감정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니 무턱대고 분노하는 것, 무턱대고 저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게다가 나도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실수 할 수도 있고, 잘못 판단하여 의도적인 죄를 지을 수도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나도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가 될 수 있다. 

나도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때,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다. 

그분의 인자다. 

 

그러니 바로 지금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 인자와 자비로 대하신다고 할 때, 너무 분노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자와 자비의 기다림을 연습한다. 

심판의 때를 하나님께 맡긴다. 

잘못한 사람에게도 기회를 준다. 

돈을 못갚고 있는 사람 혹은 안갚고 있는 사람에게도 인자와 자비를 보여주고, 기회를 준다. 

쉽지 않지만, 그분의 인자와 자비를 닮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그분은 오랫동안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며 참으시고 인자와 자비로 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시는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자와 자비로 오래참으시는 그분을 찬양한다. 

 

[오늘의 기도]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의 회개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나와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박수칠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살던 저를 자비의 마음으로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하고 간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0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바로에게로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나의 백성을 보내어라. 그들이 나에게 예배드리게 하여라.

2 네가 그들을 보내기를 거절하고, 계속 그들을 붙잡아 둔다면,

3 주의 손이, 들에 있는 너의 집짐승들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 떼를 쳐서, 심히 무서운 병이 들게 할 것이다.

4 그러나 주는 이스라엘 사람의 집짐승과 이집트 사람의 집짐승을 구별할 것이니, 이스라엘 자손의 것은 하나도 죽지 않게 할 것이다' 하여라."

5 주님께서 때를 정하시고서 "나 주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6 이튿날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니, 이집트 사람의 집짐승은 모두 죽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집짐승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7 바로는 사람을 보내서, 이스라엘 사람의 집짐승이 한 마리도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그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

 

8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화덕에 있는 그을음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쥐어라.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바로 앞에서 공중에 뿌려라.

9 그것이 이집트 온 땅 위에서 먼지가 되어, 사람과 집짐승에게 악성 종기를 일으킬 것이다."

10 그래서 그들은 화덕의 그을음을 모아 가지고 가서, 바로 앞에 섰다. 모세가 그것을 공중에 뿌리니, 그것이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를 일으켰다.

11 마술사들도 종기 때문에 모세 앞에 나서지 못하였다. 모든 이집트 사람과 마술사들에게 종기가 생긴 것이다.

12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게 하셨으므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석

가축에게 내린 재앙은, 통상 나일 강으로 내려와 물고기와 개구리와 파리를 감염시킨 박테리아를 통해 걸린 탄저병으로 간주된다. 이집트에서 사랑의 여신인 하토르(Hathor)는 암소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신성한 아피스(Apis) 황소는 너무나 공경을 받아서 죽을 때는 방부 처리가 된 채 공동 묘지에 석관과 함께 묻혔다(IVP 배경주석).

 

이번에도 주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나의 백성을 보내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거절하면, 들에 있는 집짐승에게 무서운 병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1-3절). 전염병으로 이집트의 집짐승은 죽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집짐승은 죽지 않았습니다(4-6절). 바로는 이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고집을 부립니다(7절). 이어서 주님은 들에 있지 않았던 집짐승에게도 악성 종기를 일으키십니다(10절). 또한 모든 이집트 사람들과 마술사들에게도 종기가 생겼습니다(11절).

 

신격화된 이집트의 가축들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고 난 후에도 바로는 고집을 부립니다. 그로 인해 이번에는 예고도 없이 이집트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악성 종기라는 재앙이 이어집니다. 이집트 신들의 힘을 보여주었던 마술사들도 이제 퇴장합니다(11절). 악성 종기는 바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바로의 고집스러운 반응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습니다(12절). 내가 영향을 받고 있는 권력자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고집조차도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묵상]

그동안 경제적 손실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의 재앙은 아니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것, 개구리가 날 뛰는 것, 이들이 돌아다니는 것,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 

괴롭고 무섭고 힘든 일인 거 맞지만, 죽음 그 자체의 재앙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가축의 죽음은 다르다. 

농업 경제의 중심에는 가축이 있다. 

관개시설(물)과 가축이 있어야 농업 생산성이 올라간다. 

나귀, 소, 낙타, 양… 이런 가축들은 교통편, 노동력, 음식을 제공하는 소중한 재산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친구요 가족 같은 존재일 것이다. 

가축이 죽어 나가면, 대단위 농경지를 경작할 수 없다. 

가축이 거의 없었던 소작농 혹은 노예들은 큰 피해를 받지 않았겠지만, 부농들, 권력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는 것도 많다. 

파라오의 고집이 생명을 잃게 만든다. 

영향력 있는 사람, 권력자의 불순종과 고집은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긴다. 

고집스러움은 일관성과 뚝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백성이 고통받고 있고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자신의 권력과 세계관을 꺾지 않는다. 

 

경제가 망가지고, 근래 최악의 적자가 났음에도,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여전히 천공이라는 작자의 이름이 뉴스에 등장하는 걸 보면, 과연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집단인지 의문이다.

경제, 정치, 외교, 군사는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독특성을 유지한다. 

그 독특한 각 영역의 논리를 정치 논리로 종속시키려다보니 경제도 외교도 엉망이 된다.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든지, 탈 중국을 하겠다고 선포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경제 논리와 외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망언에 가깝다. 

도대체 이토록 고집스럽게 비합리적인 말들을 내뱉는지 모르겠다.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장 노동력이 집중되어 있는 왕궁, 모든 노예들과 신하들이 가장 깨끗하게 유지 관리라는 공간, 개구리도 가장 멀리 버렸을 것이며, 죽은 가축들도 가장 멀리 가져다가 묻었을 것이다. 

청소도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해 진행했을 것. 

하지만 왕궁의 술사들에게도 피부병이 돌았다.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도 피부병이 돌았다. 

짜증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밤 새 운다. 

이 때문에 머리가 간지러운 것도 참기 어렵겠지만, 피부병에 걸려 밤새 피부를 긁어 피딱지가 가득한 것은 인내심을 넘어선다. 

긁어도 긁어도 시원하지가 않다. 

그 옛날 욥이 이런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나! 

죽음의 그늘이 이집트 온 땅을 뒤 흔든다. 

오직 고센 땅의 이스라엘 사람들만 이런 죽음의 재앙에서 자유롭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본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항해할 마음의 준비를 해 나간다. 

위대하시고 또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지평이 넓혀진다. 

정의롭고 자비하신 그분의 성품을 배워나간다. 

아직 그 길은 멀고 긴 여정이지만,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해 나간다. 

 

그리스도인의 길이 이렇다. 

그분의 정의와 사랑을 인식하는 순간부터다. 

정의만 인식한다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자들이 그분에 대한 존경을 넘어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무서운 분을 넘어서 사랑스런 분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재앙 속, 심판 속에서도 그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한 주가 참 버거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었다. 

피곤하지만, 새로운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감사로 한 주를 마감하고 예배를 준비한다. 

 

[오늘의 기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동시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당신의 성품은 신묘하며, 당신의 존재는 신비롭습니다. 

그러기에 존경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당신을 닮고 싶고 당신의 판단을 배우고 싶습니다. 

 

지난 한 주를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로운 주일 예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감동주심을, 사랑 베푸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16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사람을 대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1).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외모나 옷차림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은, 사람을 차별하며 판단하는 것입니다(2-4).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십니다(5-7).


율법은 우리에게이웃 사랑 가르치며, 일부를 어긴다 해도 율법을 범한 것이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합니다(8-11).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랑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따릅니다(12-13). 요즘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외모나 경제적 형편, 정치적 성향 등으로 차별하거나 판단하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

차별 금지

 

1. 난해함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하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다. 

 

2. 차별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온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하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번째 이유도 적고 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빈자를 택해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한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수호에 적극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이다. 

어쩔 없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된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된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번째 이유도 있다. 

생각보다 치밀하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율법이 필요하고, 율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한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한다.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는다. 

그러니 율법은 포괄적(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는가? 율법도 그렇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다. 

 

 

3. 의미심장한 13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사실 13절의 의미는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율법의 종속 개념엔 심판이 있다. 율법이 있다면 심판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도 심판이 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도 율법이니 심판이 규정되어 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따르는 자유하게 하는 심판은 혹시자비 방점이 찍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13절이 의미심장하다. 

솔직히 야고보가 13절을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까? 

뭔가 깊은 의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오늘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니, 조금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다. 

 

 

——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치료하셨던 예수님, 

당신을 닮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4.16 이상하게 슬픕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확한 사고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의문이 많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신원, 원한을 풀어주세요. 

 

복음이 가져다 주는 자유의 율법이 곳곳에 적용되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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