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27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35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주석

 

33절. 사마리아인은 다른 민족들과 섞여 살며 다른 민족들과 결혼하여 여러 뒤섞인 관습들을 가진 이들의 후손이다.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의 기원을 대재사장과 많은 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 여자들과 결혼했던 때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율법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들이 이방인 여자를 취했고, 이것이 이방인들과의 혼합 공동체의 시작이라고 믿었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율법학자는 자신이 바른 대답을 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예수님의 칭찬이 더욱 우쭐하게 만들었다. 

이제 더욱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해야 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중에 예수님께 시험이 될 만한 질문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였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런 질문이 아닐까 싶다. 

안식일이나 절기나 정결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예수님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부분은 예수님이 여러 차례 이야기해 왔던 부분이기도 하다. 

안식일의 주인은 나다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부분은 어찌보면 확인된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웃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해야 할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 

이방인까지 확장해야 하는가? 

로마인은 어떤가? 

누구까지 사랑해야 하는가? 

율법학자의 질문은 그런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질문을 완전히 뒤집는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맞은 유대인을 구해주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은 필시 유대인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루살렘에 갈 일이 만무하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유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다. 

같은 유대인들은 죽어가는 동족을 모른 척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즉 너도 너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의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그 어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누군가는 무차별적이다. 

함부로 내 이웃이 누군지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야 하며, 그게 이웃 사랑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요즘처럼 고독사가 많이 발생하는 시대에 우리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다. 

재지 말고, 너무 계산하지 말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일을 거리끼지 말아야 한다. 

 

율법학자의 시험은 실패했다. 

누가 이웃인지 규정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누가 이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누군가의 이웃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율법학자는 사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사마리아인은 결코 이웃이 될 수 없었다. 

로마인도 결코 이웃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이 이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율법학자의 이웃이 될 수 없었다. 

이게 경계짓는 사람들의 마음의 매커니즘이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내 내적 기준이 너무 높다. 

아무나에게 잘 해 줄 자신이 없다. 

하나님도 나의 기준을 잘 아신다. 

생각보다 까다롭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것 같지만, 속으로는 높은 기준으로 손절하고 있다. 

나를 부인하는 것, 자기를 희생하는 것… 

이것이 없이 이웃이 되기 어렵다. 

사랑이 어렵다. 

그래 사랑은 어렵다. 

 

[오늘의 기도]

저의 이웃이 되어 주신 예수님,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저도 예수님의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특별히 이웃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저에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힘,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세요. 

제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주께서 도와주세요. 

주어진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도 벅찹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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