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9월 26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2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 어디 우리에게 말해 보십시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5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하늘에서 났다’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6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다.”

7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났는지를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석]

4절. ‘하늘’ 이란 유대인이 하나님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IVP 성경배경주석).

7절. 이 대답은 질문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보았으면서도 그 권위를 인정하기를 꺼렸으며 그 상황에서 옳은 행동을 결정할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어리석기도 하고 비겁하기까지 하다.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들 이야기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쓴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 이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신다.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레파토리는 정해져 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가 바로 자신이며, 안식일의 주인도 자신임을 밝히셨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을 주문하셨다. 

이것은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사실이 기쁨이다. 

남성과 여성이 더 이상 상하질서 속에 있지 않다. 

종과 주인도 더 이상 상하질서 속에 있지 않다.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세상의 상하질서는 타락의 산물이다. 

사람 모두는 하나님의 동등한 형상이다. 

당시의 모든 종, 여성, 죄인들에게 이런 메시지가 복음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기쁜 소식들의 집합체다. 

 

그러니 높은 위치에 계신 분들은 화가 난다. 

위계질서의 상층부는 부글부글 끓는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도대체 누구의 권위로 이런 발언을 하는가? 

사회 파괴 세력이며, 무정부주의자이고, 민중선동가일 뿐이다. 

그들은 질문을 던진다. 

혹여나 로마의 뒷배가 있을 지도 모른다. 

권력관계로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뒷배를 궁금해한다. 

돈이 있든지 권력이 있든지.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도움이나 배경이 있을 거라 예측한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당황한다. 

예수님은 탁월한 역질문 전문가이다. 

자신이 답하기 전에 의중을 묻는 촌철살인의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는 짜증이 나겠지만. 

요한의 권위는 누구에게로부터인가? 

하늘이라고 하면, 왜 그를 인정하지 않았는지 말문이 막힌다. 

사람이라고 하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격이 무섭다. 

지도자들은 모른다고 답한다. 

비겁하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의 권위가 하늘이라고 왜 말할 수 없는가! 

 

예수님은 정직하다. 

당신들이 모른다고 한다면, 난 말할 수 없다고 말하겠다. 

난 모르지 않지만, 너희들의 태도를 보니 말하지 않겠다. 

역시 대단한 포부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부어지지 않는 한, 이런 담대함이 나올 수 있었을까? 

유대교 중심의 사회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 수행 능력이라고 갖추었다면 모를까, 촌구석 목수장이가 이렇게 대담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 

 

난 비겁하다. 

부딪히기 싫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인식이 강하다. 

생각보다 겁이 많다.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

부족하다. 

나의 부족을 인정한다. 

그래서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분명히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적 확신에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직하자. 

 

 

[오늘의 기도]

삼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비겁한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분노하지만 회피하는 저를 봅니다.

부족한 저를 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정직하게 말하는 법, 

정직하게 대처하는 법을 유지하게 하소서.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원칙이 바뀌지 않게 하소서. 

핵심을 유지하고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내적 확신이 더욱 강해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5월 23일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15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17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18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19 그러나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 때문에,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고, 20 거기에다가 또 다른 악행을 보태었으니,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이다.

 

주석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16절) 요한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 끈을 푸는 종이 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성령과 불 세례(16절) 성령과 불 세례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요한의 종말론적 기대를 나타낸다(IVP 성경비평주석).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19) 헤롯 안티파스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 관계였다. 그 뒤에 헤로디아는 빌립과 이혼하고 안티파스와 재혼했다. 유대교 율법은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요한은 헤롯에 맞서 거침없이 말했고, 그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15절).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16절). 예수님은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분으로서 불과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첨예하게 가르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16-17절). 요한은 자신의 권면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18절). 그리고 그는 그 기쁜 소식을 따라 왕의 행실을 책망했고, 결국 옥에 갇히게 됩니다(19-20절).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된 기대를 예수님께 돌리며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동시에 그에 따른 대가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는 요한과 같은 겸손함과 충직함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예수님이 더 주목받으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립시다. 또한 옳은 길이라면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타협 없이 충직하게 걸어갑시다. 기쁜 소식을 따라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기도로 시작하고 싶다. 

 

몸과 마음을 주님께 솔직히 보여드립니다. 

꾸미거나 위장하지 않겠습니다. 

좋게 보이려고, 그렇다고 부러 나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주님, 말씀으로 저를 비춰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요한의 겸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므온도, 안나도 그런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분들이었고, 게다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분들이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고 싶었다. 

이집트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탈출 시켰던 모세처럼, 가나안의 여러 폭력적인 민족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사사들처럼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탈출 시켜주는 새로운 지도자를 원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단순히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요단강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실 메시야는 물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새로운 백성으로 다시 만들어 주는 일, 그 일이 메시야의 역할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요한은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다.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었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러 온 대사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 일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3년간의 공생애를 무사히 시작하고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분위기를 만들었고, 사람들을 길러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응할 수 있는 환경과 사람들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탁월하게 잘 감당했다. 

그의 겸손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 

 

나는 탁월해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특별한 존재로 살고 싶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특별한 기여, 역사에 남는 공로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욕구가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나에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많은 것을 꿈꾸는 교만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겸손하게 내 역할에 집중하지 못하고, 항상 더 위대한 것을 갈망한다. 

그러니 참 피곤하다. 

나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피곤하다. 

탁월함은 유지하면서 겸손할 수 있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 요한의 용기 

요한은 겸손할 뿐 아니라 용기와 결기의 사람이다. 

당시 권력자의 추한 행동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광야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부정을 폭로했다.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일반 백성들의 죄만 아니라 권력자의 죄를 언급한다. 

위험한 일이다. 

권력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인기를 가진 사람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허약한 권력 정당성을 가지면 더욱 그렇다. 

자신이 부족하고 그래서 열등감을 가진 권력자들은 언제든지 권좌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위협을 받는다. 

지금 이스라엘 전역에 가장 핫한 인물이 요한이다. 

그를 내편으로 삼든지, 죽이든지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요한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죄를 지은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다. 

자신들의 권력으로 율법을 어기고도 버젓이 왕 노릇을 하고 있다. 

구약의 숱한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세례 요한도 용기있게 비판하는 설교를 한다. 

주저함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요사이 윤석렬 정부가 하는 일은 이해하기가 참 힘들다.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일을 감행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도리어 전쟁 위기를 부추긴다. 

경제 정책이 실패할 수도 있고, 지난 과거 정부의 정책 여파로 현재 상황이 어려울 수도 있다. 

100번 양보해서 그렇다하더라고, 최소한 무기 밀집도가 최상위인 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최대한으로 낮추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최근에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비상용 배낭을 하나 구입해야 할까봐”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찾아온다.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등의 생각이 든다. 

나라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이끌고 있는 윤석렬 정부를 비판한다. 

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에 적을 두고,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스리기 위해 권력, 권한을 활용해야 한다. 

어떤 정부건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어떤 대통령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아서는 안된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과거 시대의 왕과 신하들이 아니다. 

지금은 국민을 위해 섬기는 공무원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을 위해 국익을 위해 일하도록 역할과 돈을 맡긴 것뿐이다. 

그렇다면, 기독인들은 하나님 나라 가치를 심사숙고해서 자신의 양심에 맞게 지지와 반대를 보내면 되는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렇기에 기독인들은 회색지대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면서도 혼전성관계를 반대할 수 있다. 

독신주의를 옹호하면서도 비혼주의를 반대할 수 있다. 

민주당의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민주당의 당론을 반대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우리는 정치 단체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에 반한다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동일시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비교적 잘 드러내는 정치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 집단과 단체를 일시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나 단체나 할 것 없이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우리는 자신이 옹호하는 집단의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나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너무 숨고 지냈나 싶다.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내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도 그렇다. 

겸손과 용기, 세례 요한만 가진 자질이 아니라, 예수님도 가졌던 자질이다. 

그러기에 나도 그 자질들을 갖고 싶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신 주님, 

주님을 닮아 때로는 한없이 겸손하게, 때로는 한없이 날까롭게 해주세요. 

겸손과 용기를 허락하소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린이처럼 마음이 여립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새로운 용기를 허락하소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0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5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17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8 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19 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21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22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주석

여목자(16-19절) 보통 여자들은 가족 가운데 아들이 없을 때만 목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이 받는 불이익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목자들이 그들을 쫓은 데서 살펴볼 수 있다(IVP 배경주석).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15절). 그곳에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줍니다(16-17절). 그 딸들은 우물에 먼저 왔음에도 힘이 센 다른 목자들에 의해 그 기회를 매번 빼앗겼습니다(17-18절). 모세는 그 딸들을 도운 것으로 인해 환대와 정착의 기회를 얻습니다. 이후 모세는 그곳에 정착하여 아내와 자녀도 얻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나그네’ 신세입니다(20-22절).

 

모세는 이집트에서처럼 여전히 연약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려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가, 이번에는 누군가를 돕다가 낯선 땅에서 살길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늘 우리가 기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섬기는 삶을 멈추지 맙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우물가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물은 생명이며, 번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이 물가로 모이지만, 시내가 없는 곳에는 땅을 깊이 파서 물을 긷는 우물이 최선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우물을 파는 일에 진심이었다. 

그 일에 하나님의 도움심을 구했다.

우물이 없이 정착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우물가는 외로움을 확인하는 공간이었다. 

제 시간에 물을 긷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마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딸들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매번 남자 목자들의 힘에 밀려 맨 마지막에 물을 길을 수 밖에 없었다. 

일곱명의 딸들이 함께 대동했지만, 남자 목자들의 힘과 억셈을 이길 수 없었던 듯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도전하던 여인들이었다. 

먼저 먹이기 위해 노력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미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모세가 돕는다. 

모세가 남자이기 때문에, 그가 이집트 고위층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몸이 건장했기 때문에, 지략을 잘 썼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남자 목자들이 양보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딸들도 용감했고, 모세도 용감했다. 

딸들의 용감함이 모세의 용기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도울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생존과 번영의 길에는 항상 사건, 사고, 스토리가 넘쳐난다. 

물길이 있는 곳, 원유가 터져 나오는 곳, 돈과 금이 몰리고 풀리는 곳, 사람들이 몰리는 곳… 

너도 나도 생존과 번영을 위해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힘있는 사람들이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힘없는 사람들, 약자에겐 모세나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 

자의든 타의든 항상 뒤로 밀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닮은 모세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난 지레 포기하는 스타일이다. 

우물가의 여인이 내 성정과 닮았다. 

싸우고 싶지 않아한다. 그저 ‘내가 손해보면 그만일 것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오늘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물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생명의 근원되신 예수님, 

오늘돋 주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더 현명하고 재빠르고 탁월하고 싶은 마음, 그래야 우물을 지킬 수 있고, 우물에서 가장 빠르게 물을 길을 수 있고, 빨리 밥먹고 더욱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이 마음… 

이 마음을 내려농고 그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항상 1등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데까지만 달려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풍성함으로 이끄소서. 

 

많은 회의와 미팅이 오늘도 저를 기다립니다. 

부담스럽지만, 하나 하나 잘 감당하게 하소서. 

주께서 지혜의 우물로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03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푸소서.

 

38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39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근쯤 가지고 왔다.

40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41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42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유대 사람이 두려워 남몰래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기를 내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려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38).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값비싼 몰향에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유대의 풍속을 따라 요셉과 함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십니다(39-42).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길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을 꺼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례를 위해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고 자신들의 소중한 것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섬깁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주님을 섬겨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살펴봅시다.

 

——

 

죽음의 폭로

 

1. 오늘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신 날을 기념한다. 동시에 제주 4.3 민중항쟁을 추념한다. 우주적인 죽음이 가져다 슬픔과 국가폭력의 희생이 가져다온 슬픔이 겹치는 날이다. 수많은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인간사에 넘친다. 지도자의 욕망은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것도 대량 학살로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보편적인 죄를 폭로했다. 4.3 억울한 죽음들은 국가로 응집된 인간들의 죄를 폭로했다. 죽음은 진실을 폭로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 

 

명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 사람들이 두려웠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서 살아갈 용기는 없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12제자들의 삶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흠모했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깊이 탄복했다. 자신의 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때문이었을까? 가족 때문이었을까? 명예였을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명은 요한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니고데모였다. 바리새인 유대인의 지도였던( 3:1) 니고데모는 영적인 궁금함으로 늦게 예수님을 찾아왔던 인물이었다.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는 말에엄마의 자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느냐 상상력 넘치는 발언을 장본인이기도 하다. 번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 십자가 죽음을 막지 못했음에 좌절을 느끼고 있었지도 모른다. 유대 지도자로서 전체 흐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주류 기득권의 주장과 과격함을 이길 없었다. 어쩔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볼 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의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니고데모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몰약과 침향 ? 분명 아무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니고데모는 부가 있었다. 그는 명예/지위가 있었다. 예수님에게도 밤에 몰래 찾아오지 않았었나! 그의 지위는 그렇게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도자였지만, 대제사장은 아니었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면 그의 지위와 명예가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고, 그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 

 

3. 죽음의

 

아무리 두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들 마음에 뜨거운 뭔가를 남겼다. 자신들의 용기 없음이 결국 무고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죄책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당당함과 자신들의 비겁함이 대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순간 보인 하늘의 싸인이 그들의 마음속 동굴에 빛을 비추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빛이 되어 그들을 비춘다. 누구도 벗어날 없다. 빛이 들어왔다. 

 

 

4. 죽음의 폭로

 

빛은 인간의 심연을 폭로한다. 두려움, 비겁함, 합리화, 이중성 등등. 죽음의 빛이 빠르게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 이상 숨길 수가 없다. 뜨거운 눈물이 심장을 적신다. 십자가의 잔상은 깊은 애도를 남기고 애도가 피를 끓게 한다. 숨겨 놨던 용기의 주위에 애도의 피가 둘린다. 결국 문이 열린다. 

 

빌라도를 찾아간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다. 자신의 무덤을 그것도 무덤을 제공한다. 

비싼 향유를 드린다. 제자들에게 향유를 전달한다. 그리고 장례에 참여한다.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더이상 숨어지낼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온 급격한 변화였다. 

 

 

5. 자기 폭로의 시간

 

때로 강렬한 폭로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랫동안 숨겨놨던 마음의 이중성, 충돌 되는 욕망, 손해 같은 두려움, 누리지 못할 즐거움,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예수님의 죽음 앞에 다시 돌아본다. 

 

4.3 사건의 무고한 희생도, 세월호 사건 꽃들의 죽음도 우리 인간들의 한계없는 욕망을 폭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년 되새기는 것은 나의 욕망이 폭주하지 않도록 미리 폭로하는 과정이다.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대의 흑암을 미리 정기적으로 폭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어떤 심연을 주님께 드러낼 것인가?

 

 

——

예수님, 

 

당신의 죽음에 잠잠해 집니다. 

나도 모르게 폭주하던 온갖 부정적 감정들을 죽음이라는 영광의 앞에 노출시킵니다. 

열망/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저를 십자가 앞에 펼칩니다. 

주님의 피로 용기의 문을 열어 주소서. 

두려움을 이기고 더욱 정직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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