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4:1-10]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야고보 의식의 흐름

시련의 하나님의 지혜로 인내하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특히 빈자들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무엇보다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하라. 

 

이런 일련의 메시지가 어떻게 도출 되었을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던졌을까요? 당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 사실 공동체들은 그렇게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메가처치들이 즐비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가정교회들이 도시마다 형성되어 있었죠. 그런 교회들에게 야고보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는 기본적으로 회람되든지 아니면 필사본을 가지고 도시마다 전달되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저는 힌트가 오늘 본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싸움과 분쟁(1-3)

- 초대 교회 현실 

야고보는 기독 공동체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죠. 예수님을 본받아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사람들을 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렇게 예수의 제자들로 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 공동체에는 싸움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성령님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던 때의 교회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의 저술 연대가 대략 40-50년대고 ,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지 10-20 지난 시점의 교회 공동체는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가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 싸웠을까? 

어떤 종류의 싸움과 분쟁이었을까요? 아까 전에 우리는 야고보의 의식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 사회 계층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빈자와 부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고 이것인 때로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을 겁니다. 또한 신학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도 구원에 있어서 충분하다는 입장과 믿음보다는 선한 행위에 방점이 있다는 구원의 방법론의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혀를 제어할 것을 야고보가 주문했던 것이죠. 이런 종류의 싸움과 분쟁과 갈등이 초대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 싸움의 본질 

야고보는 이런 싸움과 분쟁의 본질을 꿰뚫는 아주 인싸이트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읽어볼까요?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욕심입니다. 욕심이란 쾌락을 누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욕심은 십계명의 탐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소유와 권리를 탐하는 마음입니다. 십계명 유일하게 마음의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번째 계명, 탐심입니다. 육심의 욕심이 기독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이런 탐심,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현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단순한 말싸움 정도로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라고 말씀해주셨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간구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간구가 이뤄지지 않을 , 자신의 쾌락과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 그들은 때로 살인도 서슴지 않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까지 들어 주실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육신의 욕심, 자기 쾌락을 위한 기도와 같은 기도조차 무조건 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2. 하나님께로(4-8) 

-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럼 그런 욕신의 욕심을 제어하고 자신의 쾌락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간구하고 열망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욕심, 자기의 쾌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분께 집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쓰던 단어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간음, 외도, 바람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 아세라, 바알 같은 신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없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오래된 하나님의 성품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의 인용구는 정확히 어떤 성경인지는 길이 없습니다. NIV에서는그가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이 강하게 시기한다이렇게 번역했는데,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불어 넣으신 각각의 영과 교제하기 위해 그리워하신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는 좀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 가까이

그러니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야고보가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도 더욱 가까이 오실 겁니다. 죄인들이라도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사람을 하나님을 보듬어 주십니다. 다만, 주인을 섬기겠다는, 명의 아내, 명의 남편, 명의 애인을 두겠다는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는 마음을 품는 , 바람을 피고, 외도를 하는 것을 악마에 비유하는 같습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겠지만, 곧바로 전략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전략을 쓰나요? 마음 전략을 쓰는 겁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네전략입니다. 여러분, 물론 현대 사회는 다원성의 사회며, 취존의 사회입니다. 좋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없느니라”(마태복음 6:24). 세상의 가장 강력한 신이 바로 돈의 , 풍요의 신인데, 돈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두고 섬길 없다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 전략은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무언가를 동시에 섬길 있다고 꼬득입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시고, 설득합니다. 

 

- 난점_분리주의? 

사실 지점에서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삶의 많은 부분에서 제약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갖지 않고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모두 속세를 벗어나서 산사람, 자연인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님 수도원을 짓고 우리 만의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나요? 마치 아미쉬 공동체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그런 수도원적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보편적 공동체 상으로 두지도 않습니다. 왜냐구요? 초대 교회 공동체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여전히 남아 활동했습니다. 에베소, 고린도, 로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이런 지역들은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도시였습니다. 바울도 도시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단순히 분리주의자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마음을 품게 가능성이 높고, 그러니 마음 전략으로 다가오는 악마, 사단, 귀신을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교묘한 꾀임과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단으로서 돈을 벌고, 수단으로서 다른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 결코 수단이 목적이 되어 섬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돈과 재능과 에너지는 오로지 하나님께 드릴 예배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겁니다. 

 

- 세상 속에서 마음 갖기

여러분은 마음을 가져다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마음이 아니라 오롯이 여러분의 재물과 은사와 에너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돈이요, 재능이 돈이요, 외모가 돈이요, 건강이 돈이고, 에너지가 돈이요, 웃음이 돈입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자칫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곤 합니다. 그러니 돈을 섬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존재를 교환가치를 높게 쳐주는 시장에 진열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재능, 에너지를 아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돈에게 예배합니까? 하나님께 예배합니까? 

 

 

3. 순결을 향해(9-10)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버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있을까요? 야고보는 이외의 제안을 합니다. 보실까요?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는 데에, 가지를 제안합니다. 

 

- 울라

첫째는 우십시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고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지 못해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야고보는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구약에서 자신의 죄를 인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털썩 주저 앉아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왕이 그러기고 했고, 선지자들이 그러기도 했죠. 예수님은 옷을 찢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죄로 신음하는 모습에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죠. 야고보는 이런 감정적 반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야고보 자신도 당시 기독 공동체가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 마음을 품으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행동했을지 예상이 됩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고보도 울었을 겁니다.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아니 싫었습니다. 야고보서를 설교하는 것이 점점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등장하잖아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묵상하고 상상하고 이야기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그래서 좋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줄기차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진술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무슨 법률 같고 회사의 규정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왠지 그러다 보니 마음이 딱딱해지고, 연구하고 싶지 않고, 말씀을 준비하고 싶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야고보가 지금 울고 있구나. 야고보가 몇날 며칠 애통해하며 고통 속에 있구나. 피상적인 웃음과 현실 도피의 즐거움, 기쁨을 버리고 근심과 슬픔으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저를 깊이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의 불성실함,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 말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꿈에서 저의 죄가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으로 기쁨을 찾으려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슬펐습니다. 설교자로서 목사로서 깊이 말씀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애통하는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찬양하다가 혹은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의 죄와 부족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우리 공동체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소망 때문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것도보다는 저와 공동체의 현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로 눈물이 말랐습니다. 온라인 예배는 이상하게 사람의 정서를 터치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정서를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쁨이든 애통이든간에 우리는 찬양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존재입니다. 감정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의 갈망과 바램을 드러나게 줍니다. 이게 원활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예배가 이런 감정이 풍부하게 표현되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낮추라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기 위한 야고보의 번째 제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겁니다. 스스로 높아졌던 마음을 낮추어 그분께 나아오는 겁니다. 이것은 번째 제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높였던 마음, 높아진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가면들, 위선들, 연기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거짓된 웃음, 경직된 눈빛, 반응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 깊은 내면의 감정을 들키지 않겠다는 딱딱한 몸짓,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투와 손사래이런 자신 만의 속에서 살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겁니다. 그분께 자신의 과오와 실수와 부족함과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분께 우리의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리고 때로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마음이 아닌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왜냐구요, 그분은 우리가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거든요. 

 

4. 순결한 공동체

- 산상수훈의 초대 교회 적용 버전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초대교회 적용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정말 이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상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현실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분쟁, 약자에 대한 차별, 욕심과 욕망에 치우친 기도들야고보는 이를 치료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야고보가 21세기 한국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분은 여전히 비슷한 아니 그때보다 심한 기독 공동체를 보며 아연실색하며 눈물로 몇날 며칠을 지냈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순결한 공동체가 되기를 요청하셨을 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롯이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공동체가 되길 요구하셨을 겁니다. 자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돈과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야고보는 오직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애통하기를 그리고 더욱 겸손해 지기를 우리에게 요청했을 겁니다. 

 

- 송청 예배 적용 버전

저는 부작용이 염려되지만 그래도 좀더 구체적으로 특히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예배 시간을 지킵시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마음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은 시간 사용으로 드러납니다. 

2) 찬양 시간에 우리의 감정을 충분히 드러냅시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찬양과 기도에 드러나야 합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때로는 애통함도 표현합시다. 찬양인도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도록 노래로 혹은 멘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합시다. 최대한 집중해서 나의 마음을 표현합시다. 

3) 설교를 들을 , 적극적으로 리액션합시다. 하나님께 리액션하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안된다고, 납득이 되면 납득이 되었다고,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있다고, 감동이 있으면 감동이 있다고, 마음이 무감각하다면 무감각하다고그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리액션하는 겁니다. 설교 중간에 해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설교를 듣고 나서 함께 기도 , 그때 더욱 집중해서 우리의 리액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순결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 이런 몇가지 실천 사항은 아주 작은 요소일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까봐 부작용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책감이 아니라 소망으로 전환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그리고 야고보가 전한 순결한 공동체에 대한 비전과 이상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과 비전을 향해 함께 가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5. 나가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싸우고 분열되는 초대 교회 현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나뉘어져서 육신의 욕망과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로 밤잠을 설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세요. 마음을 품지 마세요. 마음을 품게 만드는 악마를 대적하세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세요. 그게 안된다면 나처럼 울면서 애통해 하면서 슬퍼하세요.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야고보의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송청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메시지를 다시 우리 마음에 새기고 음미해서 정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순결한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혹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충분히 타협하면서 살아갈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2.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드려지길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기도, 말씀 속에서 더욱 우리의 정서와 마음이 표현되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길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나요? 때의 심정을 나눠주세요.   

 

2. 예배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마음의 중심을 드리기 위해 나의 예배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인가요?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나요?  

 

 

 

 

2021년 04월 23일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툼과 분쟁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 폭력과 살인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1-3절).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들을 간음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이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로 인해 마음아파 하십니다(5절).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킬 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때 친밀히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시며(6-8절), 우리가 욕심에 따라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겸손히 주님을 찾을 때 온전히 회복시켜주십니다(9-10절). 내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깨어진 모습이나 관계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내 마음을 돌이키며 회복의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시다.

 

——

순결을 향한 싸움

1. 단어의 연결, 생각의 연결 

야고보의 사고를 따라가는 것, 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 그 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 분쟁, 갈등을 보았다(1절). 

그리고 그러한 싸움은 욕심 때문이라고 밝힌다. 욕심은 쾌락과 연결되어 있다. 

쾌락은 기준을 무너뜨리고 선을 넘나든다. 결국 간음하는 사람들(4절)을 양산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쾌락을 찾고, 하나님에게서도 즐거움을 찾는다. 

결국 두 마음(7절)을 품게 되고, 마음의 순결을 잃게 된다. 

두 마음, 두 세계에서 동시에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분명히 권면한다. 

 

“우십시오”(9절)

울라. 

울어라.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이 유지되지 못함에 대해 슬퍼하며 울어라. 

그렇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라. 

 

야고보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이런 길을 발견하게 된다. 

 

2. 마음의 순결 

오늘 본문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권면의 편지는 그래서 무겁고 부담이 된다. 

마치 법조문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가장 눈의 띄는 어구는 “마음의 순결”이다. 

야고보의 사고와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순결에 가 닿는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만다(4절). 

처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사랑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기쁨에 만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욕심이 생겼다. 세상이 주는 쾌락도 만만치 않게 기쁘다는 사실을 아니 때로 그 이상임을 깨닫는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마음의 순결을 잃어간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걸 원치 않으신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상당히 질투하시는 분이시다(5절).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으시다. 

세상의 쾌락에 넘어가 결국 그 마음의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때, 분열과 싸움과 갈등과 긴장이 고조될 수 밖에 없다(1-3절). 

결국 이런 마음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표방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깨지고 싸우고 죽인다. 

그걸 야고보가 봤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1장부터 야고보는 분노, 말 조심, 차별 금지 등의 덕목을 끌고 들어왔던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라고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결코 이런 그림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도 질투하시지만, 결국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으면 공동체는 분열되어 산산히 조각나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현실의 하나님 나라가 심각하게 오염되고 훼손되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질투의 마음을 발동하신다. 

 

그분은 마음의 순결을 원하신다. 

 

3. 갑분싸

여기까지 묵상하며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싸늘해진다. 

내가 누리는 여러 즐거움들이 혹시 두 마음의 결과는 아닌가 싶다. 

수 많은 즐거운 요소들이 혹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들, 좋은 음식, 화려한 액션 영화, 스포츠, TV… 

 

즐거움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잘 지키고 있어야겠다. 

그 경계선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렇다고 어느 율법주의자처럼 아예 경계선까지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경계선을 설혹 넘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분은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6절). 

조심해야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고도의 응시를 낳고 응시는 마음의 흐름을 낳고, 마음의 흐름은 의도치 않은 경계 침범을 낳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길은 경계를 잘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8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가는 길이다. 

 

그럼에도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하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하다. 

 

——

참 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예수님, 

주님 주시는 기쁨에 더 노출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세요. 

세상이 주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완전히 거부하는 율법주의적 완벽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예수님을 더 가까이, 성령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겁니다.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주는 유익과 즐거움을 어느 정도 누리면서, 

그럼에도 가장 큰 열망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이 경계를 지키는 일.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1 04 14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죄를 낳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3-15).

 

사탄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반면, 좋은 것을 주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6-18).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달콤함 이면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분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있길 기도합시다.

 

——

욕심에서 소망으로

 

1. 입증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강력한 권면은 바로 시험을 견디어 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울의 변심 혹은 회심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적 해방의 기치를 내건 그리스도인들의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 경계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중심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 로마의 황제는 아니었다.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같았지만, 속마음은 로마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안팎에서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인지, 얼마나 핍절한 삶인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면 더욱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험을 인내하라. 시험을 견디어내라. 

그것이 그의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방법은 시험에 인내하는 것이다. 

 

시험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14)

시험은 집착이 만들어낸 구렁텅이가 아니다. 

시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통이다. 

시험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12절의 시험과 14절의 시험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요사이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같다. 

점점 확신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회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회의는 나은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믿는 신앙은 맹신을 낳아 모두를 괴롭힌다. 하나님조차도 괴롭다. 

그러나 항상 회의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년 내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한다면, 달리 말하면 때로 이것은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다. 

나태함은 회의를 방치한다. 참된 회의자는 진리 추구의 길에 근면하다. 

하지만 나태한 사람들은 회의라는 방패로 근면을 방해한다. 

 

신앙에 대한 시험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는 시대다. 

내부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비난과 비판 때문에 점점 신앙의 시험에 노출된다. 

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의 통과 여부는 인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다. 

당장 혼자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욕을 안듣는 것은 아니다. 

욕을 그냥 받고 있어야 때가 있다. 욕받이가 됨을 거부하지 말자. 

 

 

2. 욕심, 참혹한 결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조직의 욕심은 참혹하다. 

개인의 욕심은 개인의 생이 끝나는 순간 멈춰진다. 

그러나 조직의 욕심은 대를 이어 비참한 결과를 만든다. 

 

미얀마 군부의 욕심은 군사, 정치, 경제를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쓰겠다고 안달이다. 

국민들의 죽음에는 무관심이다. 

욕심이 무덤을 만든다. 무덤에 결국 자신들이 들어가게 것이다. 

 

민주화는 어쩔 없이 피를 부른다. 

기득권의 철옹성을 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피다. 

 

야고보는 욕심에 빠져서 참된 시험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결국 내외부의 고통과 핍박을 이겨내기 못했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욕심은 인내를 갉아 먹는다. 

현실적합성의 욕심은 때때로 인내하며 소망해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조급함을 노출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욕심으로 당길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나라다. 

우리가 일은 어쩌면 인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때로 욕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나의 욕심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럼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욕심은 자생적이나 소망은 투사적이다. 다시 말해, 욕심은 자기 자신의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되지만, 소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며 자기 삶과 동기와 생각과 감정을 비춘다. 욕심을 방치하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과열된다. 뇌와 심장에 걸쳐있는 컨베이벨트의 속도가 빨라져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서질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소망은 뇌와 심장에 걸쳐놓은 내생적 컨베이벨트를 끊고 나와 주변과 외부를 보게 한다. 

소망이 들어온 문을 쳐다본다. 나에게 없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고 바라본다. 

응시한다. 소망 때문에 나의 삶의 지향이 새롭게 설정된다. 

이게 욕심과 소망의 차이다. 

얼핏보면 비슷하다. 욕심도 욕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차이가 난다. 

차이를 분별하고,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자생(스스로 만든)시킨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만큼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나라(욕심) 거스르고, 때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노예가 되고 어쩔 없이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조명받지 않으면, 영상이 뇌와 심장에 투사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점점 미쳐버린다. 광인 

 

 

——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 

욕심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시험에 당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의 힘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당신과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게 하소서. 

나의 뇌와 심장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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