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3. 

 

0. 들어가며_마지막 설교와 기도

1) 가룻유다의 배반 이후 남은 11제자(13장)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이제 바로 내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대명절인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월절 식사를 나눕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룻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만, 가룻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반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식사 자리를 떠납니다. 이제 11명의 제자들만 남습니다. 

 

2) 마지막 설교(13-16장)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를 하십니다. 이 내용들은 정말 중요한데요.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필적할 만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셨다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는 힘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원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실행방법 혹은 실행할 수 있는 에너지아닙니까? 머리로 아는 원리만으로는 구체적인 실행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그에 도달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실천동력. 내적파워. 추진력이 바로 요한복음의 설교에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꼼꼼히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마지막 기도 

오늘은 마지막 설교 이후에 예수님이 자신의 설교에 도취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기도회를 혹시 인도해보신 적이 있나요? 

대부분의 기도회는 설교의 메시지를 기도제목으로 삼아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하는 첫번째 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먼저 13-16장에서 좀 길다 싶이 설교를 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게 17장의 내용입니다. 

 

저는 17장을 정말 사랑합니다. 오늘 송죽교회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본문으로 설교하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가장 사랑합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의 기도가 여러번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주기도문(마6)을 가르쳐주셨죠. 그런데 이건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문이고요. 직접하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도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기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을 보면서 화를 내시면서 저주하시다가 드리신 기도입니다. 

게세마네 기도는 유명하죠. ‘이 잔을 옮겨주세요. 하지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해주세요.’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도 유명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체로 짧은 기도문들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은 그 길이 부터가 남다릅니다. 26절에 걸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기도문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절한 감정이 철철 흘러 넘칩니다. 

17장을 함께 읽던 한 자매가 그러더군요. 기도가 슬퍼요~~ 맞습니다. 슬픈 감정도 녹아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사별 이후 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저는 이 기도문을 너무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개가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한가지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확장성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확장됩니다. 삼위하나님의 하나됨이 확장됩니다. 복음이 확장됩니다. 이 세 가지 확장성에 대해서 오늘 나누고 싶습니다. 

 

1. 기도의 확장성(20절) 

1) 11제자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로(20절)

첫째, 기도의 확장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 제가 상황을 설명해드렸습니다. 11명의 제자들과 식사를 마치시고 3장에 걸쳐 설교를 하신 뒤에 제자들 앞에서 대표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제자들을 어리둥절 했을 겁니다.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주로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9절을 읽어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17절에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맞습니다. 이 기도는 11명의 제자 공동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20절에 오면,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히 11명의 제자들에게 제한되지 않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이 11명의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수많은 2세대 제자, 3세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이후에 3천명 5천명이 회심하던 예루살렘 교회도 포함됩니다. 1세기 가장 뜨거웠던 선교적 공동체였던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도 포합됩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로마교회.... 그리고 지금 우리까지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기도의 스케일입니다. 

 

2) 나에게서 우리로, 우리에서 너희로, 그리고 세상으로

우리의 기도는 주로 나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의 평안, 내일 있을 시험, 자격증 시험, 고시, 직장 면접,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 친구랑 잘되게 해주세요. 아이폰 8을 사게 돈 좀 주세요. 등등... 대체로 이런 기도일 겁니다.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고 자유함을 얻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기본중의 기본일 겁니다. 

 

그러나 나를 너머 이제 우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11명의 제자만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나를 너머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를 알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당연한 행동입니다. 

 

우리를 너머 이제는 너희까지 나아갸 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제의 너희였습니다.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겠다는 말은 더이상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우리가 될 수 있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범위가, 기도의 대상이 그렇게 확장됩니다. 세상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소리질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가장 순수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기도, 이것이 가장 기도다운 기도인 겁니다. 

 

2. 하나됨의 확장성(21-23절)

둘째, 하나됨의 확장성이 도드라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17장 전체 기도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1) 삼위일체의 신비 

21절에 보니 삼위일체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건 쉽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trinity의 신비는 이렇게 성경에 녹아져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서로 깊이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온전히 순종함으로, 서로의 말을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서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서로 포함시키기

그런데 이 하나됨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의 사랑의 연합 가운데 있게 헤 달라는 충격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온갖 형용사, 감탄사를 써 가며 입을 턱하고 벌릴 겁니다. 

헐, 헉, 오마이 갓, 대박, 미쳤어, 깜놀.... 우리 라면 이런 단어를 썼겠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개념은 구약에 흔하게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쉽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로 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의 소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가장 진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 소원을 안다면 우리는 이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놀랍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떤 상태가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는 그런 말인가요? 뫼비우스 띠처럼, 내가 너안에 있고 너가 내안에 있고 막 엮여 있다는 말인가요? 서로 안에 있으려면 형식 논리적으로는 동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하나님과 예수님의 육체가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이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 입니다. 

 

다음 주까지 고민해서 서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하나됨과 삼위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인지, 어떻게 실현가능하지는 기도하면서 차차 알게 될 일입니다. 지레 겁먹고 회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의 소원입니다. 

 

3. 복음의 확장성(21절, 23절)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의 확장성이 분출되어 있습니다. 기도 대상의 확장, 하나됨의 확장은 결국 복음의 확장을 낳습니다. 

 

1)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파송하심을 믿도록(21절) 

하나되어 하나님과 연합된 제자 공동체는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세상에 드러내고 세상이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 놀라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예 맞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파송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들 사이에 사신 겁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신인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사단도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올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실을 믿는 것은 오직 한가지를 통해 가능합니다. 이 기쁜 소식, 믿기 힘든 복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입니다. 단순히 서로 하나되는 동호회나 해병전우회 같은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이걸통해 복음이 확장됩니다. 


2)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심 같이 세상을 사랑하셨음을 알도록(23절) 

23절에 보면 더욱 놀라운 복음의 사실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하나님이 제자들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의 연합이 확장되어 제자 공동체까지 이어진 이 사실을 결국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거부하거나 아님 그 공동체로 들어오고자 안달이 날 겁니다.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탐욕에 의한 교회 분열입니다. 

캠퍼스에서 18년간 캠퍼스 선교사로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대학 캠퍼스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습니다. 기성교회들이 보여온 탐욕과 무절제와 비상식과 분열이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고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할 교회와 기독공동체들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고 있는 겁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가 그래서 더욱 슬픕니다. 

그분의 소원이 이 곳 한국 땅에서는 이상하리 만치 잘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4. 나가며_나를 넘어서자(확장성)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확장성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 우리와 너희와 세상으로 이어지는 기도 대상의 확장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제자 공동체의 하나됨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셨으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복음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를 드릴 차례입니다. 

나를 넘어 우리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께 연합될 때, 세상이 놀라게 될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바뀌어야 하니다. 

그분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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