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28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4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였다. “더 많이 빚을 없애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44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45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4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리기를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하였다.

 

ESV

Therefore I tell you,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47절).

 

주석

용서(47절) 예수님의 비유와 이 상황이 원래 함께 묶여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 이 둘이 함께 엮어있다면, 그 여자의 행동은 그녀가 틀림없이 이미 용서받았음(동사는 완료 수동태다)을 실증한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그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초대한 바리새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중얼거렸는지 아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그”에게 말씀하시면서 “시몬”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문자적으로보면, 예수님의 눈은 초대한 주인장 바리새인에게 향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는 시몬과 하고 있다. 

실제로는 바리새인에게 하는 말이다. 

 

빚을 많이 면제 받은 사람, 적게 면제 받은 사람을 소개하면서, 누가 더 많이 사랑하겠냐고 물으신다. 

빚과 사랑을 연결시키셨다. 

빚을 면제받았다고 해서 면제해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어떤 면에서는 연결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생뚱맞다. 

빚을 면제 받으면, 사랑이 아니라 감사가 커질 것이다. 

사랑은 특별한 사람에게 발동된다. 

단순히 빌린 돈의 탕감만으로는 사랑이 커지지 않는다. 

돈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도 그렇지 않을까? 

크게 용서 받으면 정말 감사하다. 

그렇다고 용서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빚이나 용서나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는 맥락을 형성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빚을 탕감 받거나 용서를 받았을 때, 충분한 감사를 드리고 난 뒤에는 그 관계의 맥락을 벗어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돈을 빌리고 갚지 못했다는 무능함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자신이 용서를 구할 정도의 잘못을 했다는 죄책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것이다. 

사람 심리가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하나 더 관여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탕감이나 용서가 아니라,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의 압도적인 탕감, 압도적인 용서인 경우가 아닐까! 

특혜를 받는 사람에겐 생존과 존재가 걸린 탕감과 용서… 

특혜를 베푸는 사람에겐 자신의 삶과 존재가 걸린 탕감과 용서… 

이 둘이 만나야 특별한 사랑으로 연결되고, 끊어질 수 없는 연으로 연결된다. 

시몬 베드로도 그런 사랑까지 나아가야 하며, 무엇보다 바리새인은 그런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 바리새인은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싶다. 

 

있다. 

그런 사랑이 여기에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존재를 흔들던,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경험했다. 

그 용서의 무게와 깊이가 너무 커서 자존심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저 사랑의 표현을 하고 싶을 뿐.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재산과 존재를 드려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 

아무도 이해 못할 행동을 통해… 

 

 

2. 여자에게 돌아서서

 

이제 예수님은 여자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시몬에게 말한다. 

이 표현도 흥미롭다. 

시몬에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여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시몬을 비롯한 그 식사 초대 자리에서 예수님에게 제대로된 손님 대접을 한 사람이 없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는 것이 예절이며, 이 일은 접대하는 주인이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발을 씻는 물을 가져와야했고, 하인을 통해서 발을 씻겨 주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였을까?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발랐다. 

주인도 제자들도 놓치고 있었던 것을 이 여인은 찾아냈다. 

시몬에게 말하지만, 결국 이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여인의 사랑 표현을 그대로 인정해 주신다. 

 

여인은 이미 죄 용서를 받았고, 그 확신 속에서 이런 행위를 했다. 

용서 받기 위해 향유를 뿌린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았으니 그 감사와 사랑을 담아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네 죄가 용서받았다” 

이 말씀은 여인의 내적 확신을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공표한 말씀으로 읽힌다. 

동네의 유명한 죄인이었던 그 여인을 많은 사람 앞에서, 무엇보다 죄인의 죄인됨을 선언하고 확정짓는 바리새인 앞에서, 그 여인의 죄가 사함 받았음을 공표한 것이다. 

이제 그 여인은 사회적으로도 용서 받은 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더이상 죄인으로 여길 수 없다. 

그녀는 예수님께 용서받은 여인이며, 따라서 공동체에 회복된 여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향유를 뿌린 여인의 모습에 머물게 된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겐 어떤 의미인가? 

때로 그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뿌릴 수 있는가? 

그분과 얼마나 시간을 오래 보낼 수 있을까? 

 

마음 속에 여러 긴장과 불만이 차오른다. 

그 감정을 보내버리고 다시 주님께 집중한다. 

그분께 사랑을 표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사랑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돈이 너무 많아 탕감해 준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용서의 난이도가 너무 쉬워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저를 사랑하기에 탕감해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남아 돌아서, 별게 아니어서 하신 행동이 아님을 압니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한 것을 저를 위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단순히 감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랑까지 나아갑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에 머물며 저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런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4. 25.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21:15-25]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어린 떼를 먹여라.” 16예수께서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쳐라.” 17예수께서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먹여라. 18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것이다.” 19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베드로에게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베드로가 제자를 보고서예수께 물었다.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모든 일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들을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제 제자들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마음의 죄책감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죄책감을 다뤄주십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 호숫가 산책

지난 주에 우리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주시고 빵을 주시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아침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찢어질 잡힌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퍼득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심장도 물고기들처럼 퍼득댑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차오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제자들을 음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분이 이제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섬겨주십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다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쪽에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100여미터 되는 호수를 헤엄쳐 왔습니다(21:7). 하지만 음식이 주어지는 내내 베드로는 불편했습니다. 자기가 섬겨야 하는데,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데, 그는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예수님, 음식 제가 만들겠습니다. 서빙도 제가 하겠습니다.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몸을 이끌고 직접 일하시다뇨?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이렇게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쪽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습니다. 더이상 선생님으로 주님으로 부를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말로 배신하고 저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으며, 심지어는 욕을 했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 다시 수제자 노릇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은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산책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니가 나를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하느냐?” 비록 조용히 묻긴 했지만, 베드로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 들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살짝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상 고민을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떼를 먹여라. 방금 내가 먹였던 떼를 이제는 니가 먹이면 좋겠구나 

 

2. 기억의 치유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후계자로 베드로를 다시 지목하십니다. 그에게 떼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격지심도 있습니다. 말만 많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예수님의 후계자가 있을까요? 번도 아니라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과오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질문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대답하고 나니까 현타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받자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자신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셨던 예수님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과 말을 아는 주님이 다시 이렇게 물으니, 갑자기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물어 보실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등등. 고민 끝에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올라옵니다. 2 , 새벽 동터오는 시간에 어쩔 없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참혹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질문에 답하면 답할수록 답답합니다. 그런데 번째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번의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안들려서 크게 듣고 싶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대답에 신중에 신중을 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지,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가 모든 일과 모든 말을 알고 계십니다. 숨길 없습니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까지도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진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랑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에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번이나 말이죠. 대화는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었습니다. 

 

3. 나를 따라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감정과 마음만 치유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입니다.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번이나 그의 떼를 먹이고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무너진 마음의 회복은 기억의 망각이나 무시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고백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실수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의 회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시 수제자로서, 후계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베드로에게 용서는그래 괜찮아. 이해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용서는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였습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그동안도 계속 따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4. 나가며_따르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정말 그런가요? 교회에 나온다고, 일주일에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과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있을까요? 다르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아님 교회의 교인인가요? 예수님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 고난도 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비록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원래의 소명을 부여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따라 오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십니다. 허기진 우리의 몸과 영혼에 음식을 주실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죄책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책감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고백을 못하시는 분이 있나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음식을 주시며 호숫가에 산책을 청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신의 임무를 부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그분을 따를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 돌아봅시다. 그리고 혹시 실패했다면 다시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번이나 물어보십니다. 번째 물어보실 베드로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2.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과거 실패에 대한 자책감, 미래 소명에 대한 두려움 등등 여러분의 마음 정서를 나눠주세요. 

 

3. 예수님은 우리에게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그분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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