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25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1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16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NIV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18절).

 

주석

13절 독자들은 재림 전에 ‘자는’ 사람들(즉, 자기 교우들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죽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여전히 무덤에 남아 있어서 그 행사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거나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IVP 성경주석).

 

동료 그리스도인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13절).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피시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4절).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는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16절), 우리도 주님을 만나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17절).

 

바울은 슬퍼하는 이들에게 미래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과 함께 새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기쁨을 나눕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1. 잠든 사람 

바울은 죽은 사람을 잠든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16절에는 죽은 사람이라고도 쓰는 걸 보니, 의도적으로 두 가지 표현을 함께 쓴다고 읽힌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어서라기보다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예수님 안에서 잠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끊어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순간이다. 

오랜시간 예수님께 순종으로 살다가, 때로는 모진 고난과 슬픔을 당하다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품에서 평화와 평안을 경험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 자신이 다른 편지에서도 밝힌 바,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온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와 안녕을 경험한 바 있다. 

일상에서도 누릴 수 있지만, 특별한 경험과 계시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바울은 그동안 죽었던 사람들이 예수님 품안에서 쉬고 안식하고 잠들어 있음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단순히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망이 있다. 

다시 부활할 소망이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그들은 육체로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실 때, 육체로 부활하셔서 부활체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인 것처럼 말이다. 

이 소망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와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무기력이 지배하고, 공허함이 넘치는 공간에서 소망과 기쁨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2. 재림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 언제 성취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의 끝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있어왔는가!

세계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히로시마의 핵폭탄을 맞은 사람들은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세상의 종말과 같은 것이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이 오시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이 바뀌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지구 위에 펼쳐질 것이다. 

주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서로를 그리고 온 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돌보고 다스릴 것이다. 

그 날이 온다. 

 

바울은 그 날에 대해 좀더 자세히 기록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모두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실 것이다. 

지금처럼 개인 방송이 실시간으로 퍼지는 세상이 더욱 고도화되면, 예수님의 오심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품에서 잠들었던 사람들의 육체가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부활체로 바뀌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대 환영식을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이 현대적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17절 마지막이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순간이 온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이젠 실제 눈으로 몸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이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한다. 

 

난 바울의 이 말들과 설명을 믿는다. 

그러기에 소망을 품고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기도]

다시 오실 예수님,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능하면 빨리 오세요.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벗겨주세요. 

이 세상의 모든 신비를 알게 해 주세요. 

진실을 알게 해 주세요.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해 주세요.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주세요. 

미중러의 패권 경쟁으로 죄없는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자기가 예수님이라고 속이는 자들을 벌하여 주세요. 

속아 넘어간 자들을 구출해 주세요. 

 

주님, 이 세상을 고쳐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1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친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여러분에게로 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2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NIV

May he strengthen your hearts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holy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with all his holy ones(13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다시 볼 수 있길 간구합니다(11절), 또 그들의 사랑이 풍성하여 넘치기를, 그들이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도록 기도합니다(12-13절).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교회 너머로 넘치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런 사랑을 실천할 때 교회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로 세워질 것입니다. 나와 공동체에 사랑이 풍성하게 넘치길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1. 바울의 열망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꼭 가고 싶었다. 

그 교회 성도들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싶었다.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더욱 견고히 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탄이 그 길을 막고 있다. 

주님께서 그 길을 친히 열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열망이다. 

그리고 그 열망을 기도로 표현한다.

 

나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오랜 친구이자 믿음의 동역자인 김선교사다. 

현재는 미국에 있는데, 한 번 간다 간다 했는데, 아직도 못가고 있다. 

만나서 그간의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이겨내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그에게 격려를 하고 또 받고 싶다. 

귀한 믿음의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오늘은 보고 싶은 친구들과 동역자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면 좋겠다. 

그들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린다. 

 

2. 흠 잡을 데가 없게

바울의 열망 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과 온 성도들 앞에서 거룩함에 있어서 흠 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어렵다”는 생각이 갑자기 찾아온다. 

거룩함에 흠 잡을 데가 없다는 말은 너무 완벽주의자의 말처럼 들린다. 

과연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본문을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본문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야겠다. 

12-13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먼저는 사랑이 풍성해지길 기도하고 있다. 

바울 선교단도 그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다. 

주님도 그들을 사랑하신다. 

그들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더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이 넘치길 바울은 기도한다.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보인다. 

그것도 한 사람, 한 개인의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둘째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전 문맥에서 주로 믿음에 대해 사용한 어구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공동체 속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 

마음을 굳게 함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포함한다. 

주님 오실 때, 모든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게 하실 것에 대한 소망이다. 

이 소망이 믿음을 견인한다. 

 

사랑과 소망을 품은 믿음, 이 두 가지가 거룩함에 이르는 길로 보인다. 

거룩함에 있어 흠잡을 데가 없게 하려면,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고, 소망은 더욱 희망차고, 그에 따르는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주님 오실 날을 소망하고 있는가? 

나는 그 소망에 따라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 있는가? 

나는 공동체에서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고 나누고 있는가?

 

이것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 

거룩함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을 살펴서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오늘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온다. 

소망, 믿음, 사랑, 공동체 안에서, 주님 안에서… 

 

 

[오늘의 기도]

다시 오실 예수님, 

주님을 소망합니다. 

오셔서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주소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모든 비판과 판단을 중지하게 하시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소서. 

그때까지 믿음을 굳게 하고,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소서. 

 

주님,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는 간사들을 격려해주시고, 힘을 북돋게 하소서. 

저도 다시 일상으로 잘 돌아가게 하시고, 몸과 마음과 영혼에 은혜를 부어 주소서. 

재정 정리와 결산도 잘 마무리 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14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죄를 낳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3-15).

 

사탄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반면, 좋은 것을 주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6-18).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달콤함 이면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분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있길 기도합시다.

 

——

욕심에서 소망으로

 

1. 입증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강력한 권면은 바로 시험을 견디어 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울의 변심 혹은 회심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적 해방의 기치를 내건 그리스도인들의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 경계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중심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 로마의 황제는 아니었다.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같았지만, 속마음은 로마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안팎에서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인지, 얼마나 핍절한 삶인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면 더욱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험을 인내하라. 시험을 견디어내라. 

그것이 그의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방법은 시험에 인내하는 것이다. 

 

시험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14)

시험은 집착이 만들어낸 구렁텅이가 아니다. 

시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통이다. 

시험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12절의 시험과 14절의 시험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요사이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같다. 

점점 확신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회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회의는 나은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믿는 신앙은 맹신을 낳아 모두를 괴롭힌다. 하나님조차도 괴롭다. 

그러나 항상 회의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년 내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한다면, 달리 말하면 때로 이것은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다. 

나태함은 회의를 방치한다. 참된 회의자는 진리 추구의 길에 근면하다. 

하지만 나태한 사람들은 회의라는 방패로 근면을 방해한다. 

 

신앙에 대한 시험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는 시대다. 

내부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비난과 비판 때문에 점점 신앙의 시험에 노출된다. 

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의 통과 여부는 인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다. 

당장 혼자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욕을 안듣는 것은 아니다. 

욕을 그냥 받고 있어야 때가 있다. 욕받이가 됨을 거부하지 말자. 

 

 

2. 욕심, 참혹한 결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조직의 욕심은 참혹하다. 

개인의 욕심은 개인의 생이 끝나는 순간 멈춰진다. 

그러나 조직의 욕심은 대를 이어 비참한 결과를 만든다. 

 

미얀마 군부의 욕심은 군사, 정치, 경제를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쓰겠다고 안달이다. 

국민들의 죽음에는 무관심이다. 

욕심이 무덤을 만든다. 무덤에 결국 자신들이 들어가게 것이다. 

 

민주화는 어쩔 없이 피를 부른다. 

기득권의 철옹성을 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피다. 

 

야고보는 욕심에 빠져서 참된 시험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결국 내외부의 고통과 핍박을 이겨내기 못했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욕심은 인내를 갉아 먹는다. 

현실적합성의 욕심은 때때로 인내하며 소망해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조급함을 노출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욕심으로 당길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나라다. 

우리가 일은 어쩌면 인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때로 욕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나의 욕심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럼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욕심은 자생적이나 소망은 투사적이다. 다시 말해, 욕심은 자기 자신의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되지만, 소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며 자기 삶과 동기와 생각과 감정을 비춘다. 욕심을 방치하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과열된다. 뇌와 심장에 걸쳐있는 컨베이벨트의 속도가 빨라져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서질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소망은 뇌와 심장에 걸쳐놓은 내생적 컨베이벨트를 끊고 나와 주변과 외부를 보게 한다. 

소망이 들어온 문을 쳐다본다. 나에게 없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고 바라본다. 

응시한다. 소망 때문에 나의 삶의 지향이 새롭게 설정된다. 

이게 욕심과 소망의 차이다. 

얼핏보면 비슷하다. 욕심도 욕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차이가 난다. 

차이를 분별하고,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자생(스스로 만든)시킨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만큼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나라(욕심) 거스르고, 때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노예가 되고 어쩔 없이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조명받지 않으면, 영상이 뇌와 심장에 투사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점점 미쳐버린다. 광인 

 

 

——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 

욕심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시험에 당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의 힘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당신과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게 하소서. 

나의 뇌와 심장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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