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 20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1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신 일을 누가 다 알릴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누가 다 찬양할 수 있으랴?

3 공의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4 주님, 주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5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번영을 보게 해주시며, 주님 나라에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주시며, 주님의 기업을 자랑하게 해주십시오.

6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었으며,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8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의 명성을 위하여, 주님의 권능을 알리시려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9 주님께서 홍해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시고 그들로 깊은 바다를 광야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10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11 물이 대적을 덮으므로, 그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습니다.

12 그제서야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석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음(6절)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그들과 동일한 죄가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죄성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까지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시인은 주님의 이름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1-2절). 그 찬양은 은혜와 구원을 바라고 번영과 기쁨을 구하는 간구로 바뀝니다(4-5절). 시인의 세대 역시 조상처럼 죄를 짓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6절). 조상의 불신앙과 거역에도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셨고(7-11절), 그들은 다시 믿음과 찬양을 회복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조상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시고 건지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시인의 역사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7절이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홍해 앞에서 주님을 거역하게 되었다. 

원망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절망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0개의 재앙으로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충분히 되돌리지 못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 시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기적으로도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사람들을 기적을 원한다. 

신비로운 것들을 원한다.

영적인 것들을 보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10가지의 위대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 10가지 기적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몇 가지 기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여정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린 속도로 배운다.

빠르게 배우는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기적과 이적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충격 요법 같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근육을 키워야 한다. 신경세포만 키워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근육을 키워서 실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어야 한다. 

기적을 넘어 일상을 버티고 유지하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화려한 기적 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이래서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예수님은 줄곧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기존의 기적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기적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신비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일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님도 알았다. 

사람들의 요구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지 말이다. 

 

내가 내세울 기적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놀라운 기적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도 더 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이다. 

그저 다시 한 번 성육신을 떠올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한다. 

그 사건들 속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불순종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의 삶을 추구한다. 

그분 뜻에 따르고자하는 열망이 나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맏음을 더욱 자라게 해 주세요. 

눈 앞에 이적이 아니라 온 주에 영향을 주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그려 내는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도 여러 회의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12. 26.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1:1-18_새번역]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5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6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요한이었다. 7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빛이 있었다.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0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14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5(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6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17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18일찍이, 하나님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0. 들어가며 

- 가장 수확

저는 이번 12 시리즈를 준비하고 설교하면서 나름 수확을 얻었습니다. 4 복음서가 각기 특징이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간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 있는데, 때도 공부했었구요. 신학교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당연히 여러 책들을 통해 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의 성경 저자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를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지식이 어떤 적용점을 낳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당장 답하기가 궁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의 저자가 자신만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주목하고 집중했다는 사실은 저에게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감을 심어 줍니다. 안전한 바운더리를 넘지 않는 선에서 저는 맘껏 예수님을 묵상하고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크심에 놀라며, 그분의 양파같은 신비로움에 설렙니다. 

 

1. 사도 요한

- 요한의 저작들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의 저작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 그리고 요한 계시록입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저자가 썼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오랫동안 다섯 권의 책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 사랑과 계시

요한 1, 2, 3서의 핵심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 요한에게 컴플레인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매번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의 사도가 요한 계시록이라는 책도 씁니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 에베소교회를 섬기던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요, 거기서 환상을 보고 기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이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한 계시록은 우주적 스케일의 대변혁을 그리고 있습니다. 언뜻보면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그런 계시록을 썼다는 것이 쉽게 조화되지가 않습니다. 사랑과 계시, 둘이 왠지 매칭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지극히 따뜻한 정서적인 표현같고, 계시는 그림언어로 경고하는 보입니다. 사랑은 품고 안아주고, 계시는 경고하고 배척합니다. 둘이 상극처럼 느껴지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요한에게 사랑과 계시는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는 본질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것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나라가 로마의 세계 통치를 뒤엎고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올 것을 강력한 그림 언어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통찰능력을 하나님이 끝까지 사용하신 것이라고 있습니다. 

 

- 철학적 신학자 & 비전가

그런 면에서 요한은 철학적 신학자요 또한 비전가였습니다. 예수님의 본질, 그분의 메시지의 본질을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미래 비전에 한껏 고취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런 점들이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여전히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같은 수많은 사역자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줍니다. 현실의 디테일이 부족할 있습니다. 계산적이지 못합니다. 현실 감각이 떨어질 있습니다. 구름을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 절망의 시대, 두려움의 시대에는 사안의 본질과 미래 비전을 통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요. 

 

AD 90년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지도 오래되었으며, 예수님을 직접 사람들도 거의 사망하고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제 요한만 남았습니다. 그도 박해를 받아 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상황입니다. 바울,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단들이 득실댑니다. 예수님은 사실 참된 인간이 아니었다는 가현설이 등장합니다. 내외부에서 찾아오는 공격에 초대교회는 위태위태했습니다. 요한은 현실을 뚫어내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며, 그분의 메시지는 사랑이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승리한다는 비현실적 비전과 근본적인 메시지를 설파한 겁니다. 

 

2. 하나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권의 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책입니다. 신학적 난제에 빠져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누구인가?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신학적 문제 의식에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럼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보고 있나요? 

 

1) 로고스(1-4, 14)

 

첫째로 요한은 예수님은 로고스 말씀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이건 묘한 단어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되는 로고스는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창조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권세를 가진 분의 출현을 표현합니다. 

 

1태초에말씀 계셨다.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 하나님이셨다. 2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창조된 것은 4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로고스는 요한에 의해 새롭게 정의됩니다. 그는 헬라 철학도 알고 있었고 유대교 전통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철학과 전통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분이 계신데, 바로 100% 하나님, 100%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을 표현할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접근할 있는 단어를 하나 골랐는데, 그것이 로고스인 겁니다. 오해를 낳을 있었으나 친근한 단어에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여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겁니다. 로고스라는 단어에 인격성을 불어넣었습니다. 로고스라는 단어에 하나님의 지위와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로고스가 실제 인간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헬라인들도 유대인들도 요한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독특한 실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요한을 철학적 신학자라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일들이 이런 거잖아요. 이미 알고 있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와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쓰임을 창조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전혀 감을 못잡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육신 되셔서 세상의 역사 속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거죠. 

 

2) 요한의 예언(6-8, 15)

둘째로 요한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은 구별하실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고요, 사도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에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요한복음 1:37-40). 사도 요한의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그도 비범했지만, 사실 세례 요한은 빛을 증언하러 미리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6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요한이었다. 7 사람은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진정한 메시야, 진정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요한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 설교와 요단강의 세례 운동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전 준비 작업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빛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3) 성전 정화 사건(2:13-22)
번째로 요한은 예수님의 핵심 사역을 성전 정화 사건에 둡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번째 분노가 무엇이었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로 더럽혀진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한복음 2:13-15) 

 

예수님의 분노가 느껴지십니까? 요한은 사건을 이렇게 앞에다 배치했을까요? 여러분, 성전 정화 사건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21장에 배치했습니다. 마가는 11장에 두었고, 누가는 19장에 두었습니다. 자신들의 후반부에 배치했던 겁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라서 기록은 했지만, 요한은 특히나 사건을 예수님의 성육신의 본질과 연결시키는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에 사건을 끌어 왔던 것이죠. 

 

예수님이 성전이십니다. 예수님이 지성소가 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더럽혀져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18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아예 허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시죠. 여기에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화해와 용서의 공간인 성전을 예수님 당신이 대체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의미를 성육신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고 봤던 것이죠. 예수님의 성육신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세상살이입니다. 참성전은 이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전이 세상에 찾아온 겁니다. 건물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시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을 시공간에 제한시키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면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언제나 성전이 되는 놀라운 변화의 시작을 예수님이 시작하신 겁니다. 

 

3. 사도 요한의 성육신 

-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4)

그래서 사도 요한이 성육신을 구절로 표현한다면, 바로 14절입니다. 

 

14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은혜와 진리로 가득한 로고스가 바로 우리 곁에 계셨고 사셨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요한은 분명 과거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로 보면 그분은 우리와 여전히 함께 계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성령님의 등장도 그렇거니와 마지막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함께 삼위일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게 달라고 기도하십니다(요한복음 17:21). 그건 여전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니 14절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고, 앞으로도 계속 보게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며, 여전히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현재진행형으로 말이죠. 노년의 사도 요한은 불안한 초대교회 내외부를 바라보며 단호히 주장합니다. 

은혜와 진리로 똘똘 뭉쳐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자 하나님이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4. 나가며 

-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

요한이 성육신은우리 가운데 사시는 하나님으로 요약할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물리적 성전에 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따라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우주의 왕이자 하나님이 우리 옆에,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것이 요한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사회적인 비판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공격도 날이 갈수록 매섭습니다. 윤리적으로도 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신앙 교육은 지지부진합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상황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사도 요한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함께 사시는 예수님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집중해야 일도 그러합니다. 상황은 우리를 억눌러도 우리의 정신만은 우리의 영혼만은 독수리처럼 높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갑시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께 고도로 집중하여 그분의 날개 위에 올라타고 현실을 뛰어넘는 비전에 몰입합시다. 위에서 그분과 함께 세계를 조망합시다. 요한의 정신을 배웁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번 주에 주시는 그분의 메시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한 주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우주의 ,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을 다시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을 높이는 기도를 드립시다. 그분이 누군신지 다시 고백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여전히 함께 사시는 분이십니다. 2천년 전의 역사 인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으로 우리와 사십니다.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중에 여러분은 누구에게 매력을 느끼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사실을 어떻게 경험하셨나요?  

2021. 12. 19.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1:1-5; 76-80_새번역]

1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대로 엮어냈습니다. 3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드리는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5 유대왕 헤롯 때에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76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것이다. 78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80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0. 들어가며 

- 전쟁의 소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접경에 러시아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기사가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고하자 나토의 세력 확장을 반대하는 러시아가 군사적 충돌을 계획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는 것이죠. 내년 1-2월에 전쟁 발발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국가 내전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국가간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세계는 언제든지 전쟁 발발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소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보면, 물론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가능성도 높다고 볼지도 모릅니다. 착착합니다. 두렵습니다. 생명이 사그라드는 현실이 슬픕니다. 문명이 고도화된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감, 절망감이 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세계평화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사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잖아요. 인류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잖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평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의문이고 고통입니다. 이런 안따까운 마음을 잠깐 옆에 두고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이 이런 안따까운 상황과 마음에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하며 말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1. 의사 누가 

1) 역사적 배경(3, 5)

오늘 본문을 살짝만 보아도 누가가 상당히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관련된 일들을 차례대로 순서대로 서술하겠다고 합니다. 전에도 그런 일을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누가는 더욱 정밀하게 예수님 사건을 차례대로 기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때를 다른 성경 저자보다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1 5절을 시작할 때도, “유대왕 헤롯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죠. 2장의 시작도 이렇습니다. “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뿐만이 아닙니다. 3장을 시작할 때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1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열다섯째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3:1-2)

 

역사적 배경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기록해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더불어 예수 사건을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 제국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 사건은 신화나 설화나 동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국의 역사와 같이 가고 있었고,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환타지 소설이 아니라는 겁니다. 과거의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리메이크해서 체제전복을 시도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누가는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서신의 목표(4)

게다가 누가는 편지의 목표를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수신자인 데오빌로 각하가 그전에 배웠던 내용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지의 목적은 믿는 성도들이 더욱 확신을 얻도록 돕기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편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처음 시작은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죄용서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 집니다. 여러 의심들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은 실존인물인가? 그분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가? 그것이 실제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등등의 질문들이 생기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해야 비로소 걸음 나아갈 있습니다. 누가의 복음서는 이런 질문을 가진 분들에게 아주 좋은 자료가 겁니다. 

 

2. 누가의 포석

이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 볼까요? 누가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어떤 특징에 주목하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재밌는 것은 누가는 포석을 많이 깔아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곧바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천천히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1장부터 핵심 메시지를 던지지 않습니다. 마가는 초장에 승부를 걸었죠. 마태는 유대인들을 위해 족보부터 시작했죠. 그러나 누가는 이방인들도 쉽게 따라올 있도록 전맥락을 충분히 작성합니다. 당시 지중해, 로마세계는 예언자, 점성가, 술사들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도 많았고, 예언자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익숙한 예언자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요. 바로 세례 요한을 등장시킵니다.

 

1) 요한의 가족들(5-56)

-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그리고 요한의 출생

누가는 1 전제를 요한의 가족들에게 할애합니다. 여러분들이 읽으면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아들을 얻게 것이라 예언합니다. 예언을 믿지 못한 사가랴는 10달간 말을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임신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촌 마리아도 임신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 엄마 배속에 있던 아기 요한이 격하게 뛰어 놀았습니다. 걱정하던 마리아는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노래를 지어 불렀죠. 그리고 얼마 후에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그제서야 사가랴의 입이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요한의 이야기를 아주 장황하게 적어놨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흡입력 있습니다. 아마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아주 흥미롭게 이야기를 읽고 들었을 겁니다. 

 

2) 사가랴의 예언(67-80)

특히 입이 풀리고 10개월만에 말을 하게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는 장면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1 67-79절에 이어서 상당히 길게 적고 있는데, 이렇게 누가만 유일하게 사가랴의 예언을 적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가랴의 예언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누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죠. 

 

3. 누가에게 예수님의 성육신 

1) , 어둠, 그리고 평화(78-79)

78-79절을 읽어볼까요. 

 

78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는 사가랴의 예언의 내용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죠. 하나님은 천하가 있는 해를 높이 뜨게 하실 것입니다. 해는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빛입니다. 누가의 강조점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해가 뜨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 시점에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메시야의 성육신을 예언하고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2) 천사들의 찬양(2:13-14)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만인을 위한 평화의 왕으로 그리고 있다고 했는데요, 2장에 가서도 근거가 등장합니다. 

 

"갑자기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2:13-14) 

 

예수님의 탄생 시점에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들의 노래도 누가만 기록했습니다. 신기하죠. 엄청나게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누가만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3) 시므온의 예언(2:31-32) 

이런 예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지 40일만에 유대인의 법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드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성령에 충만하던 시므온이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기도하며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2:31-32) 

 

내용도 누가만 기록해놨습니다. 누가가 보기에 이방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4) 나사렛 선언(4:18-21) 

마지막으로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회당에서 있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어떤 식으로 가르치셨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선언했는데요, 누가는 친절하게 예수님이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4:18-2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포로를 해방하고, 눈먼 사람들을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 희년을 선포하는 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1 1-2절을 읽으시더니 말씀이 오늘 예수님에게서부터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유명한 나사렛 선언입니다. 선언도 누가만 기록했습니다. 선언은 유대인들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가난하고 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 만인을 위한 평화의

누가는 이런 만민을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확인한 아십니까? 그것은 바울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사도행전도 집필한 것이죠. 바울의 선교 여행에 대해 누구보다 알았기에,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에서부터 만민을 위한 평화의 왕이라는 컨셉을 계속 유지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 구원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을 위한 평화의 왕이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하늘의 천군 천사도, 예루살렘의 경건한 의인이었던 시므온도,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모든 내용을 누가복음 1-4장에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4. 나겨며

- 평화의 , JESUS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누가가 이토록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지 몰랐었습니다. 그저 성탄절 성극을 만들 , 대본으로 삼기 위해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던 누가복음의 1-3장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평화의 왕인 것이죠. 

 

세상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저는 혼자 호수 주변을 도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일산 호수, 마장 호수, 산정 호수를 혼자 걷다 보면 그리 평화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혼자 걸을 때가 그렇죠. 관계가 꼬이고 작은 마디에 상처를 받고 그게 하루를 망치고 생활의 흐름을 깨뜨리면 일상이 전쟁이 되곤 합니다. 

 

일상의 전쟁은 어찌보면 혼자만의 문제이니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야망과 집단의 욕망이 시너지를 내서 결국 집단간 국가간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말 세상은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분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독인들이 더욱 처절하게 느끼고 깨우쳐야 같습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곳에 기쁨을 가져오는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여전히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누가의 강조점에 집중하면서 누가복음을 정독할 있는 주가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단순히 유대인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에 평화를 전하고 화해를 도모하고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각인시켜 달라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전쟁의 소문이 다시 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하게 되면 유럽 전역으로 파장이 미칠 것입니다. 미국도 남의 불구경 하듯이 있을 수는 없게 됩니다. 무력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해결할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어떤 측면을 강조했나요? 오늘 예로 들었던 말씀들(사가랴의 예언, 천사들의 노래, 시므온의 기도,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 가운데 어떤 말씀이 가장 뒷받침한다고 생각하나요? 

 

2. 세상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있는 일은 매우 작을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있는 작은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2021. 12. 12. 김혁수

 

[본문_마가복음 1:1-15_새번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길을 닦을 것이다.”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것과 같이, 4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그래서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능력이 있는 이가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8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9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예수께서 속에서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2그리고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13예수께서 사십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14 요한이 잡힌 뒤에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0. 들어가며 

- MBN, 모빌리티 혁명 신문명을 열다.

그제 금요일 밤에 인생의 가장 거리를 달렸습니다. 18km 달렸는데요. 중간에 다리 근육에 힘이 빠져서 속도가 엄청 느려지더라구요. 심장이나 허파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근육에 힘이 빠지니 결국 목표한 21.1km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죠. 그러다보니 새벽에 잠이 깨버리고 말았습니다. 달아난 잠을 달래느라, TV 켜고 이곳저곳을 훑어보다가 평소에는 보지 않는 MBN 채널을 보게 되었습니다. 개국 10주년을 맞아 흥미로운 주제의 발표를 재방송으로 틀어주고 있었는데요. 주제는모빌리티 혁명 신문명을 열다였습니다. 드론을 이용한 도심형 항공 교통, UAM(Urban Air Mobility) 2025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고합니다. UAM뿐만 아니라 자율주행이나, 도심 지하를 관통하는 스마트 물류 서비스가 만들어질 것이고, 따라서 국가규제를 풀고, 법제화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등의 제안을 하더라구요. 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프리젠팅하시는 분들이 너무 하는 거예요. 아주 짧은 시간에 핵심 내용을 전달하고 그곳에 참석한 여야 대선 후보들에게 정책 제안까지 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발표자로 나온 MBN 민경영 기자의 깔끔한 발표가 눈과 귀에 들어오더라구요. 그런데 성경에도 그렇게 아주 깔끔한 발표를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가입니다. 마가의 발표문을 읽어볼까요? 

 

- 명의 저자, 가지 특징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것처럼, 복음서의 저자는 각자의 상황과 특성에 맞게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유대인의 왕과 구원자의 출현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전해오던 예언의 성취였던 겁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만인을 위한 평화의 왕의 도래 보았습니다. 요한은 우주의 왕이자 하나님의 현현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해했습니다. 오늘의 저자인 마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하나님 나라의 시작으로 봤던 거죠. 이렇게 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기에 명의 저자의 설명과 강조점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1. 마가의 강조점 

그럼 오늘 마가의 강조점은 무엇일까요? 

- 예수님(1:1)

가장 먼저 마가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아주 간결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번째 문장을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렇다.” 책을 처음 읽는 사람마다 들어오는 마가의 화법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에 대해 말하겠다는 저자의 목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물론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교회의 교인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독자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알고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를 처음 찾는 사람들도 많았겠죠. 예수님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예수님에 대해 빠르게 소개할 소책자 혹은 오늘날로 말하면 웹페이지 혹은 웹툰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마가복음이었죠. 처음은 책의 전체 내용을 가장 짧은 문장으로 압축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가는 광고 카피라이터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당연히 문장을 처음 접하는 비그리스도인이라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게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문장입니다. 

 

- 복음(1:1, 14)

마가의 번째 강조점은 역시나 복음 있습니다. 1절과 14절을 다시 읽어 볼까요? 그렇습니다. 마가는 1절에서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주제어를 꺼내들었습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살짝 다르지만, 같은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죠. 복음이라는 헬라어유앙겔리온" 유독 마가가 많이 사용했습니다. 마가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복음, 유앙겔리온이 거라고 믿었습니다. 유앙겔리온을 가능하면 빨리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되기를 바랬던 거지요. 

 

- 하나님 나라(1:15)

마가의 번째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15절입니다. 예수님의 번째 설교의 번째 외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왔다. 회개하고 메시지를 믿어라.”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ime’s up! God’s kingdom is here. Change your life and believe the Message.” “드디어 때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인생을 변화시키고 메시지를 믿어라.”

이것이 예수님의 일성이었습니다. 언제나 처음 꺼내는 말이 중요합니다. 마가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너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의 본격적인 다스림이 예수님을 통해 2천년 갈릴리에서 시작된 겁니다. 

 

마가의 이런 가지 강조점은 계속 공부해야 주제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복음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는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2. 마가의 전달 방식

그런데 저는 주제도 주제지만, 마가의 전달 방식 눈길이 갑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시대는 내용 아니라 전달방식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가 메시지다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미디어의 변화가 메세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매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메시지의 내용, 전달력, 확장력이 달라집니다. 종이신문을 보던 때와 스마트폰의 포털 뉴스를 보는 때와는 형식적인 차이 아니라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합니다. 

 

마가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 복음, 하나님 나라를 전달하고 있을까요? 

 

- 핵심 사건 중심

첫째, 그는 핵심 사건을 빠르게 지적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장황한 설교나 생각의 흐름보다 사건의 전개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그걸 확실히 있죠. 

 

1_복음의 시작

2-3_이사야의 예언

4-8_예언의 성취로서의 세례 요한 

9-11_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다. 

12-13_광야에 시험을 받으시다. 

14-15_예수님의 설교

 

어떻습니까? 속도가 느껴지나요. 마가복음은 뒤로도 계속 이런 식입니다. 아주 빠르게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누가는 아주 자세히 예수님의 탄생 전후를 설명하죠. 마태는 심지어 족보를 넣음으로써 흐름을 늦춥니다. 요한은 세상의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복음을 선포하는데, 14절만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실제 어떻게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는지 짧은 사건들을 계속 나열하면서 그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 간결하게 

둘째, 사건을 아주 간결하게 적는 방식 사용하고 있습니다. 길게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사건들이 발생하고, 사건에서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드러나며, 그것이 주는 효과에 집중합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바리새인들, 제사장들과 싸우십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간결하게 사건 중심으로 적었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선교단체는 마가 캠프라는 것을 만들어서 2 3 동안 마가복음으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단체는 마가 드라마 만들어서 연극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마크 프로젝트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함께 읽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가는 우리 시대에 복음을 소개하는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의 방식이 현재의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죠. 

 

3. 복음의 전달자

- 시대의 변화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변화의 가속 패달을 누리고 있습니다. 온라인 세상이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상 현실 세상에서 사용하는 , 코인, NFT들이 현실 세계에서도 사용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VR 기기를 착용하고 게임 같은 가상 현실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서 돈을 버는 날도 올지 모릅니다. 필리핀에서는 이미 그런 게임이 등장했다고 하네요. 게임 해서 돈을 벌었는데, 공무원이나 교사 보다 높은 수입을 얻을 있다고 자랑하는 기사가 떴더라구요. 얼마나 신빙성있는 기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 How to communicate? 

과연 우리는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 복음, 하나님 나라를 전할 있을까요? 저는 이것에 항상 관심이 있어왔습니다. 생각은 많이 하는데, 저도 벌써 나이가 많이 든지라 쉽게 새로운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같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사진에다가 복음의 메시지를 담아볼까, 복음적 웹툰을 그려볼까, 복음 소설을 써볼까 등등이것저것 생각은 많은데, 실력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있는 것은 이렇게 설교문을 쓰고 설교를 하는 거지요. 과연 이런 설교가 복음을 젊은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는지 의심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다. 다만 저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지 의문이 든다는 말입니다. 

 

- The Bible Project, AR 전도지, Testimony

찾아보니, 최근 The Bible Project 라는 유툽 채널이 아주 매력적으로 복음과 성경을 소개하고 있더라구요. 여러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링크를 보내드릴게요. 합동교단에서는 증강현실을 이용한 전도지를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제가 보기에는 시도는 좋은데, 매력은 부족합니다. 결국 개인의 간증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더라구요. 유명한 사람들의 회심 경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선생님의 회심이야기라든가 유명 연예인의 회심 이야기는 자체로 감동을 주는 같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회자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나가며 

- 마가처럼 던지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마가처럼 예수님의 사건들을 마구마구 던질 있으면 어떨까요? 그렇다고 마가가 아무렇게나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었던 사건, 베드로에게 들었던 사건들을 가감없이 내려간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우리도 조금 과감하게 그분의 이야기를 편하게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내려간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간단하게 편지처럼 써서 자기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는 것은 어떨까요? 12 크리스마스가 있는 , 한번쯤 여러분들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런 일을 해보는 것을 권합니다. 

 

- 장려하는 문화

이렇게 서로 권하는 문화, 장려하는 문화가 우리에게 필요한 같아요. 코로나로 우울합니다. 너도 나도 외롭게 쓸쓸할 때가 많습니다. 혼밥, 혼공, 혼놀, 혼술이렇게 혼족이 늘어갑니다. 이럴 예수님을 만난 우리가 먼저 우리의 이야기를 다양한 매체에 담아서 우리들의 친구에게 전달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누구는 그림을 그려서 전달할 수도 있겠습니다.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그릴 있다면 그걸 활용할 수도 있겠죠. 음악을 작곡할 있다면 작은 음악을 작곡해서 친구에게 선물하는 것도 방법이 겁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친구를 위해 작은 판타지 소설을 만들어 선물하는 것도 멋진 일이겠죠. 친구를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예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방법도 있죠. 자신만의 기도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시대에 예수님, 복음, 하나님 나라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것입니다. 마가가 그렇게 했듯 말입니다. 이번 ,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창의력과 창조성을 자극하시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 복음,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한 마음의 열정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열정 위에 하나님의 창조의 정신을 부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진실하고 창의적인 나눔을 통해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보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2. 다가올 대선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나갈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마가는 예수님의 설교를 어떻게 표현했나요? 마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설교의 표현을 참고해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2. 마가는 매우 간결하고 속도감있게 예수님의 사건 중심으로 복음 이야기를 펼쳐 갑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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