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29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내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

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내가 가서 여러분을 대할 때에 강경하게 대해야 할 일이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대하려고 생각합니다.

3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육정을 따라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4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6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NIV

For though we live in the world, we do not wage war as the world does(3절).

 

주석

온유하심과 관대하심(1절) 그리스도의 ‘유순함(온유)’과 ‘관대함’은 마태복음 11:29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헬라 문화는 온유함을 덕목으로 여기지 않았다(IVP 성경배경주석).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유순함과 관대함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입니다(1절). 바울은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좋은 무기의 조건은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고 교만한 생각을 쳐부숴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권위가 없고, 사도로서 비범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강조했습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우월해 보이는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정을 따라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육체의 무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 편지에서 주제가 갑자기 바뀐다. 

이제까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에 대해 열심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다.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을 돕자고 요청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누군가가 바울을 평가하고 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할 때는 온유하고 부드러운데, 편지로 이야기 할 때는 날카롭고 강경하니, 도대체 바울의 진짜 성격은 무엇인가 등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바울이 기본적으로 강경한 사람에 속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스데반이 죽을 때에도 바울은 강경했다. 

자신의 신념에 있어서 흐뜨러짐이 별로 없다. 

그 신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바나바와 싸울 때도 그렇다.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때, 중도 포기 한 것에 대해 크게 실망한 바울은 다음 선교 여행 때는 마가를 배제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했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바울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철두철미하고, 완벽주의에 가깝고, 신념이 투철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베드로와도 싸웠다.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베드로를 강하게 비판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러니 편지가 강경하다는 인상이 남을 만 하다. 

내 생각엔, 편지만 강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의 성격은 올곧고 분명하고 신념에 투철해서, 만나서 대화를 해도 그의 단호한 모습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부턴지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함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마음 속이야 강경하고 담대하고 두려움이 별로 없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율법을 연구하면서 학자로서의 강경한 양심의 소유자였을 것이지만,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조금씩 조금씩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무엇인지,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의 모난 부분을 다뤄가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경험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들을 만날 때, 무조건 강경하게, 단호하게,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는 모습에서도 보면, 바울은 점점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그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많은 묵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 깊이를 오랫동안 묵상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온유함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 일부는 그 온유함을 비판하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다른 교사들과 비교하면서 바울을 비난하고 있다. 

사람들과 있을 때는 제대로 말도 못하면서, 편지에는 강경하게 쓴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바램은 성도들이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쌓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의 지식의 교만함을 버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우상들이 만들어 내는 지식이 있다. 

우상숭배자들이 만들어 내는 정보와 생각의 틀이 있다. 

JMS, 아가동산, 만민성결교회와 이단, 사이비를 보라.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한다. 

선악의 판단을 자기 스스로 내린다. 

교주를 세우고, 그 위계를 만들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든다. 

교주도 악하지만, 그 바로 밑에서 이용하는 제 2-3위의 권력자들도 악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체계, 시스템을 강화시킨다.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그 교만함을 버리지를 못한다. 

자신이 최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의 틀 모두가 그리스도께 반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언젠가는 칼을 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온유함으로 권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글은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또한 지면의 한계 때문에 딱딱하고 정리되어 제시된다. 

그러기에 강경해보이고 단호해 보인다. 

말과 대화는 사랑하는 상대가 있고, 상황이 각자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그 뉘앙스와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비판한다면, 그것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만약 그 비판이 선을 넘고 도에 지나쳐,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그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언젠가는 아주 단호하고 담대하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가짐이다.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신이 되어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다 알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거나 교회를 이용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한다. 

담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훼손되고, 왜곡되고, 성도들이 피해를 입는다. 

물질적 피해만이 아니라 영적 피해다.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정신적 세뇌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싸움을 싸워야 할 때도,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최우선적으로 의지한다. 

육체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무기를 사용한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힘이다. 

바울은 숱하게 경험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는 알고 있다. 

육체의 무기는 분노와 복수를 낳지만, 성령님의 무기는 양심을 건드리고,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한다. 

 

온유함, 단호함, 성령님께 대한 의존… 

바울의 삶과 사역의 태도에서 이런 요소들이 춤을 춘다. 

예술적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예술적 조합이 이뤄져, 예수님의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태도가 점점 드러난다. 

그렇게 한 개인이, 한 인간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온유함, 단호함, 성령님께 대한 의존… 

 

오늘 내가 배워야 할 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아침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납니다. 

짜증과 무기력으로부터 저를 건져주소서.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참고 인내하고 온유함으로 대하려는 바울을 봅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불타는 열정으로 분명하게 기준을 제시하는 바울을 봅니다. 

주님, 저런 사람으로 자라가고 싶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온유함과 담대함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 의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5 누가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면, 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어느 정도는 여러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6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7 그러니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8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기를 권합니다.

9 내가 그 편지를 쓴 것은, 여러분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여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해 주면, 나도 용서해 줍니다. 내가 용서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11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셈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NASB

Therefore I urge you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8절).

 

주석

5-7절 학자들은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다시 한 통의 서신을 써서 그 사람을 징계하라고 명했다(IVP 성경배경주석).

 

그 사람은 바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를 아프게 했습니다(5절). 바울은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7절).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기 때문입니다(6절). 용서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입니다(8, 10절).

 

악은 용서와 사랑이 없는 틈을 타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악이 속삭이는 곳에는 지나친 분노와 짓눌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으로 분열을 잠재우고 악을 몰아냅니다. 한 사람을 돌이키기 위한 징계도 필요하지만, 목표는 화해입니다. 악이 나와 공동체에 틈타지 못하도록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합시다.

 

[오늘의 묵상]

세계를 다니며 숱한 어려움을 극복했던 대사도 바울,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신구약을 넘나들며,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신학자 바울, 

왠지 그는 마음이 아프다, 슬프다 등의 정서적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바울은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다룰 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마음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교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바울 한 사람의 마음만 힘들고 어렵게 한 게 아니다. 

모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공동체는 마음으로 이어져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죄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다. 

바울은 이런 마음의 연결됨을 인지하고 있다. 

 

용서는 이 시대의 단어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용서보다 정의가 앞선다. 

일면 온당한 측면이 있다. 

바른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잘못이 무엇인지 바르게 규정되고, 잘못한 사람이 분명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의 단어의 풍부한 의미와 용서 주변의 다양한 과정과 절차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용서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용서하면 지는 것이고, 용서하면 도리어 약해 보이고, 용서하면 경쟁에서 밀리고, 용서하면 결국 패자로 남게 된다는 인식이 점점 늘고 있다. 

용서보다는 비판이 매력적이다. 

날까로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칭찬받는다. 

용서하겠다는 사람은 대치 국면에서 뒤로 빠진다.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용서하겠다는 사람까지도 비판받는다. 

용서하는 사람도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는 피해자인데, 그 사람이 어느새 준가해자가 된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용서가 이 시대의 단어가 되기 힘든 이유다. 

 

점점 용서 주위에 창의적인 생각이 모여들지 않는다. 

비판 주위에는 온갖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모여든다. 

비판의 정도가 점점 다양해 진다. 

비판하는 방식도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그러나 용서 주위에는 온화한 기운, 종교적 기운 외에는 남지 않는다. 

치열한 생각과 열정적 아이디어가 비판과 정죄 주변에 가득하다. 

비판과 정죄의 색깔은 샛빨강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옅은 푸른색이다. 

뉴스와 댓글은 비판적인 단어와 생각으로 가득하다. 

용서는 과연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법정으로 사건이 가는 한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기 불가능해 보인다. 

법원 판결에 기꺼운 마음으로 승복하는 경우도 별로 없거니와, 

가해자와 피해자가 끝까지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기 마련이다. 

점점 용서가 설 자리가 줄어든다. 

 

교회와 가정은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용서의 색깔을 더욱 진하게 칠할 수 있는 공간, 

용서 주변의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가 모일 수 있는 공간, 

용서의 진정성을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죽을만큼 힘들지만, 용서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용서의 전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 있다. 

부흥은 죄의 고백이 빠지지 않는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진심을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그럴 때 형제 자매의 용서가 일어난다. 

죄의 고백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죄의 고백은 그 죄값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한다. 

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하는지를 진정한 회개자는 깨닫는다. 

성령님의 역사다. 

그 깨달음은 죄 값을 계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안함과 송구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참회하고 보상하고 죄값을 치르려고 한다. 

그러니 사실 진정한 용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죄인의 죄를 드러내고, 진정한 참회로 이끌어야, 피해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전제가 완성된다. 

그래야 성령님이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이런 자연스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님은 자연스런 과정을 뛰어넘어 역사할 수도 있다. 

순서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피해자의 용서가 가해자의 참회로 이끈다. 

이런 순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부자연스런 과정을 인간이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안된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성령님은 때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그것을 막을 법은 없다. 

성령님만이 용서의 색깔을 더욱 밝고 굵고 화려하고 다양하게 채색하신다. 

인간은 지극히 제한된 색맹 수준일 뿐이다. 

 

사탄은 비판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만 하라고 요구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심지어는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용서의 풍부한 의미와 방법들을 놓지 않는다. 

성령님은 가정과 교회에서 용서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사단에게 속지않고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비판과 함께 용서를 배워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끝까지 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아무말 없이 그 수치의 끝에 올라가셨다. 

그러니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다. 

 

아… 예수님, 

거기계시는군요. 

 

[오늘의 기도]

용서는 어렵습니다. 

분노는 자연스럽습니다.

용서는 본성을 거스릅니다. 

분노는 속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용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조금씩 생겨납니다. 

성령님, 저에게 분별의 능력을 더하소서. 

사탄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게 하소서. 

가정과 교회에서는 용서의 색깔이 더욱 풍부하고 더욱 진해지게 하소서.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생겨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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