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27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8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이다.

29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주다. 너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이집트의 임금 바로에게 전하여라" 하셨다.

30 그러나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바로가 어찌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는, 네가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되게 하고, 너의 형 아론이 너의 대언자가 되게 하겠다.

2 너는,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을 너의 형 아론에게 말하여 주고, 아론은 그것을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여라.

3 그러나 나는, 바로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놓고서,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이적을 많이 행하겠다.

4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5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낼 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6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7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의 나이는 여든 살이고, 아론의 나이는 여든세 살이었다.

 

NIV

Then the Lord said to Moses, “See, I have made you like God to Pharaoh, and your brother Aaron will be your prophet(1절).

And the Egyptians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stretch out my hand against Egypt and bring the Israelites out of it(5절).

 

주님은 바로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를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곤혹스럽습니다(28-30절, 참고 6:10-13절). 이번에 주님은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릴 것이며, 그로 인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칠 것을 예고하십니다(1-4절). 그 후 이집트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5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현실이라는 주제가 반복됩니다(28-30절).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현실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3-5절). 예상되는 결과에 부담을 갖기보다 묵묵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6절), 주님이 ‘주님’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한번 규정된 자기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모세는 자신이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자기 인식이자 자신의 약점이었다. 

파라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을 전하라고 할 때마다 등장하는 레퍼토리다. 

만약 짧은 시간에 이 말이 반복되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도 짜증날만 할 변명이다. 

성경을 스르륵 읽게 되면, 모세의 저 말이 계속 반복되기에 독자들도 모세의 말에 약간은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성경의 시간은 읽기의 시간과 다르다. 행과 행 사이에 많은 시간이 녹아 있다. 

호렙산에서의 대화와 이집트에서의 대화는 시간차가 난다. 

모세의 말은 충분히 드릴 수 있는 말이다. 

 

나도 종종 그런다. 나의 약점에 대해, 나의 자기 규정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말이 어눌하고, 생각의 정리가 어려우며, 고유명사를 잘 외우지 못하고, 과거 사건에 대해 명확한 기억이 없다. 

좋은 점이 왜 없겠냐마는, 부족한 것이 유독 잘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이런 나의 자기 인식이 가로막는다. 

내가 모세였어도, 같은 말을 반복했을 것이다. 

‘하나님 저는 말이 어눌하고, 긴장을 많이 하며, 생각이 중간에 꼬이기도 하고, 과거 사건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래 하나님도 답답하실 것 같다. 

그래도 이게 나의 실제인 걸 어쩌겠나. 

 

하나님도 급하셨다. 조금 무리한 발언을 하신다. 살짝 부담스런 말씀이시다. 

모세를 파라오에게 하나님처럼 보이게 하시겠단다. 

아론을 하나님의 대언자, 예언자처럼 보이게 하시겠단다. 

그전에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가서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아론이 도울 것이다’ 등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아예 모세를 신처럼 보이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 모세를 통해 이적과 기적을 보이시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 말에 모세는 용기를 갖는다.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전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통해 그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시켜주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신 하나님이 이제는 모세를 신적 위치까지 끌어 올려 주시겠다고 하신다. 

파라오와 동족의 거부와 증오 앞에서 위축되고 포기하고 싶었던 모세가 다시 용기를 낸다. 

뭔가 다른 흐름이 형성될 거라 믿는다. 

 

그 믿음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의 확인이 있다. 

 

3 그러나 나는, 바로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놓고서, 이집트 땅에서 표징과 이적을 많이 행하겠다.

4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나는 손을 들어 큰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의 군대요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겠다.

 

파라오가 이렇게 고집스러운 것도 어찌보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다. 

이 대목이 항상 걸려왔다. 왜 하나님은 파라오의 고집을 유도하시는 것 같은가 하는 점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400년만에 조상의 신이 자신들을 광야로 부른다고 한다. 

그 신이 조상들과 약속한 것은 알고 있다. 

그 신이 요셉을 통해 자신들을 이집트에 정착하도록 도운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그 인식자체는 흐릿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신이 정말 얼마나 대단한 신이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신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현실이 너무 고될 뿐이다. 

잘 모르는 신의 소명을 받아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제안하는데, 그 모든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단번에 허락을 받아, 광야로 이동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인식은 어떠했을까? 과연 우주를 창조하신 신, 우주 만물을 유지하시는 신, 역사의 주관자라는 인식이 그들 가운데 생겼을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에게 제대로 작동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합의에 의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아님, 모세와 아론의 설득력을 높이 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칫 그들 사이에서도 지파별로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광야로 가면 그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다 등의 의견이 등장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의 구심점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거란 말이다. 

몇십만명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모세와 아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그럼 방법은 하나!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셔야 한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도록,

누구도 이집트의 다른 신들과 비교할 수 없도록,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탈출과 독립이 마치 자신들의 힘이나, 인간적인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님을 확신하도록,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자리를 대체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보여주셔야 한다. 

그것이 10가지 재앙이다.

모두가 그 재앙을 경험하거나 보게 된다. 

열외가 없다. 

그러려면, 바로가 9번이나 모세의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집요하신 하나님! 

 

예수님도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누차 드러내셨다.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을만큼 강력한 이적들을 행하셨다. 

물 위를 걷거나, 오병이어로 5천명을 넘게 먹이거나, 죽은 자를 살리거나… 

그래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스스로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만천하에 알리셨다. 

온 우주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변형되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성전의 회막은 위에서 아래로 갈라졌다. 

우주의 영적 현실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자기 구원이 자기에서 이뤄지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직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그래야 겸손해진다. 그래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 

여전히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지만 말이다. 슬프게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신다. 

가서 전하라는 명령에 추가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미래 계획을 듣는다.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 낼 때, 당시 패권 왕국 이집트,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파라오가 알게 될 것이다. 

오직 참된 신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사실을 인식한 이집트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광야로 나올지 모른다.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했기에 모세는 용기를 내본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다. 

 

분명히 하나의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 자리라고 느껴지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산을 넘어 저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고 싶은데, 

산을 넘어 저 푸른 바다를 항해하고 싶은데,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나님의 계획이 궁금해진다.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나를 뛰어 넘는다. 

그분을 신뢰함으로 오늘을 다시 시작한다. 

그분의 계획을 조금은 더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기도]

하나님, 

주님의 계획은 저의 생각을 뛰어 넘으십니다. 

지금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실망은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의 일부일 거라 믿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하나님,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 

저에게 당신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세요. 

제 욕심이라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혹여 당신의 계획을 조금 더 알게 되는 것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 주세요. 

 

난방비가 너무 올랐습니다. 

급작스런 난방비 폭등에, 역대급 추위에, 혹여 보일러를 틀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늘어날까 걱정입니다. 

보호해주세요. 생명을 지켜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4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0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이 나가서,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다. "바로께서 명령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더 이상 짚을 주지 않겠다.

11 너희는 가서, 너희가 쓸 짚을 직접 구해 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의 벽돌 생산량이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셨다."

12 그래서 백성들은 온 이집트 땅에 흩어져서, 짚 대신으로 쓸 곡초 그루터기를 모아 들였다.

13 "너희는, 짚을 공급받을 때만큼 벽돌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감독관들은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몰아쳤다.

14 바로의 강제노동 감독관들은 자기들이 뽑아서 세운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을 때리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어제도 오늘도, 벽돌 만드는 작업에서 너희가 맡은 일을 전처럼 다 하지 못하느냐?" 하고 다그쳤다.

15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였다. "어찌하여 저희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16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17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18 썩 물러가서 일이나 하여라. 너희에게 짚을 대주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는 벽돌을, 맡은 수량대로 어김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19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은 매일 만들어야 하는 벽돌의 수를 줄일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이 곤경에 빠졌음을 알았다.

20 그들은 바로 앞에서 나오다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과 마주쳤다.

21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22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주님께 돌아와서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 곳에 보내셨습니까?

23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주석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21절) 바로는 벽돌을 만드는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힘들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벽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짚도 제공받지 못했다. 히브리인 십장들에게 이것은, 마치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이스라엘 민족 말살 운동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모세와 아론을 바라보았다(IVP 성경주석).

 

바로의 명령을 받은 강제노동 감독관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료를 직접 구해서 벽돌을 만들되, 재료를 공급받을 때처럼 벽돌을 생산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립니다(10-13절). 감독관들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이스라엘 작업반장들은 매를 맞았고, 이런 자신들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호소합니다(14-16절).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절망뿐입니다(17-19절). 작업반장들은 이런 상황의 원인 제공자인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고, 모세는 주님께 호소합니다(20-23절).

 

바로의 분노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구체적인 폭력과 책임 전가를 낳습니다. 불합리한 지시와 강압, 권위자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작업반장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신의 선의가 도리어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는 모세의 입장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 봅시다. 혹 내가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토로합시다.

 

 

[오늘의 묵상]

강제 노동, 쉴래야 쉴 수 없는 쳇바퀴의 삶.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환경. 

일하는 기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강제 노동이 더욱 심화된다. 

재료의 공급이 없이 생산하라고 한다. 

작업 물량도 이전과 같다. 

노동 강도만 더욱 올라간다.

히브리 작업 반장들이 바로를 직접 찾아간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저 감독관들이 임의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면 최고 권력가의 영향인지 확실히 알아야 했다. 

바로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용기있게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최악이었다.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가 들린다. 

마치 히브리 민족들이 일하기가 싫어서 광야에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알려진 것이다. 

바로 왕에게 미움을 샀다. 

안 그래도 힘든 삶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작업 반장들은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중간 관리자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막노동자들에 비하면 대우도 괜찮았다. 

이제 그 마저도 어려울 상황이다. 

바로에게 죽든지, 동족 사람들에게 죽든지 하는 상황이다. 

 

1. 작업반장 시점

원망이 몰려온다. 제사드리러 광야로 가자로 제안했던 모세와 아론이 원수가 되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히브리 장로들과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이제는 고스란히 일하다 죽든지, 도망가다 죽든지 할 상황이다. 

별 볼일 없는 리더십이지만, 어쨌든 작업반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사람들로서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모세와 아론, 그 작자들이 원흉이다. 

살인 충동이 몰려든다. 

언제 모세와 아론이 우리들의 리더였는가? 

언제 그들의 말에 우리가 휘둘렸던가? 

살인자 집안… 한 때 그들 때문에 우리 동족이 큰 위협에 빠지지 않았던가? 

40년전의 그 상황을 여전히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을 규합하여 모세와 아론을 몰아내야 한다. 아니 그들을 살해해서 우리의 뜻을 바로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괜히 방치했다가는 우리가 죽을 판이다. 

우리 동족들이 죽게 생겼다. 

마침 그들을 만났다. 죽이자… 

 

2. 모세의 시점

일이 이상하게 꼬인다. 

바로가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이 권위가 안 선다. 

나(모세)로서는 예견되었던 상황이다. 

시내산 떨기나무 불 앞에서, 그렇게 안 가겠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제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과연 이적으로 바로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앞선다. 

형을 만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왕궁의 말을 잃어버렸다. 

겨우 일상 생활 용어만 알 뿐이다. 이렇게 중요한 협상을 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언어를 자연스럽게 이집트말로 구사할 수가 없다. 

아론 형이 도와줘서 바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일로다. 

히브리 사람들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분노가 느껴진다. 

바로에게 죽기 전에 동족에게 죽을 판이다. 

아 작업반장들에게 들린 저 작업도구들이 살해 도구로 보인다. 

고통스럽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맡았는가? 

왜 내가 여기에 왔는가? 

이러다간 나와 내 가족 모두 몰살 당할 판이다. 

아…. 도망가고 싶다. 아… 하나님을 만나기 전으로 가고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마난 순간부터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 걱정과 두려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다. 

 

3. 나의 시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니면서 신비로운 이적을 많이 보았지만, 

그만큼 고통스런 순간도 많았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오해와 미움을 샀다.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라고 있을라치면 그것도 너무 고통스럽다. 

제자의 삶이 이렇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힘든 길을 걸어간다.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슬픔과 자기부인과 오해도 있었다. 

나를 계속 말씀 앞에 돌아보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나의 욕망을 줄이고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 어렵다. 

 

연휴의 마지막 날, 

다시 사역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수많은 소통 속에 지쳐가지 않기를… 

주님의 은혜로 위기의 순간을 넘어가기를… 

힘들고 어려운 순간, 누군가의 원망과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 순간, 주님의 도움심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기도]

어려운 삶을 부탁하신 예수님, 

싫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쉽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부담입니다. 

주님, 억지로 가지 않게 해 주세요.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가게 해주세요. 

네팔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WTsnZdajY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 벌어집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세속 사회, 4차 산업 혁명 시대, 우주 시대를 맞아 교만할 대로 교만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에는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주의 백성 삼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이 저의 기쁨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1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

2 그러나 바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주가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3 그들이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4 이집트의 왕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들어라. 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어서 물러가서, 너희가 할 일이나 하여라."

5 바로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이집트 땅의 백성보다도 더 불어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들이 하는 일을 중단시키려 드는구나."

6 바로는 그 날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에게 명령하였다.

7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더 이상 이전처럼 저 백성에게 대주지 말아라. 그들이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8 그러나 벽돌 생산량은 이전과 같게 하여라. 만들어 내는 벽돌의 수가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게을러서, 그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떠든다.

9 그들에게는 더 힘겨운 일을 시키고, 그 일만 하게 하여서, 허튼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

 

주석

그 주가 누구인데(2절) 바로는 모세와 아론, 특히 하나님을 향해 철저한 모욕을 드러냈다. ‘여호와가 누군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여호와’를 아는 주제가 이후의 장들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IVP 성경주석).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는 주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지만, 바로는 그 ‘주’가 누구냐고 모욕하며 비꼽니다(1-2절). 모세는 바로의 거절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지만 쫓겨나고 맙니다(3-4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전보다 더 강도 높은 노역을 시키도록 명령합니다(6-9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무능함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넘어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갖고 바로에게 당당하게 나아갔지만, 강력한 반대를 마주합니다.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다가 강한 반대에 직면한 적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파라오는 역시 왕이었다. 

왠만한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 신이라고 여기고 있다. 

수 많은 신들이 있는데,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들의 노예를 데려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신이 신전을 짓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들을 데려간단 말인가? 

납득하기 어렵다. 

안그래도 인구가 늘어 산아제한 정책을 펴기도 하고, 노동 강도를 높여 가며 통제하고 있는데, 

그들이 광야에 나아가 몇십만명이 집회를 가지면, 그동안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성토 대회를 가지면, 

그 위력과 위협이 얼마나 클 것인가? 

파라오 입장에서는 결코 허락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모세와 아론이 뭐기에… 

모세는 왕궁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이지만, 과거에 살인을 저질러 광야로 도망친 작자 아닌가? 

아무런 권세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와서 몇십만명의 노동자들을 데리고 나가겠다고 하니, 이건 미쳤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라오 입장에서는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 두 사람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집트의 왕은 역시 파라오였다. 

 

파라오는 묻는다. 

도대체 그 주가 누구냐고. 

도대체 히브리 백성을 끌고 나오라고 말하는 신이 누구냐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신의 명령을 들을 리 만무하다. 

도리어 더 강력한 노동명령을 내린다. 

노동강도를 더 높여서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도록 강경책을 구사한다. 

모세와 아론의 말들이 파라오의 화를 돋구었다. 

 

상황은 더 악화일로다. 

자칫하면 파라오의 근위병에게 잡힐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소식을 접하면 모세와 아론에게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박해고 고난이다. 

상황을 타개할 만한 일들이 보이지 않는다. 

며칠 동안 모세와 아론이 겪었을 고통이 눈에 들어온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가족들은 챙길 여력이 없다.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다. 

겨우 몸을 일으켜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그대로 진행하려고 해도, 모든 일이 다 수월하게 풀리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꼬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묶인다. 

꿈과 비전을 말하고, 미래의 소망을 말해도 꿈쩍도 안한다. 

도리어 비난과 비판이 난무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비난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어렵고 힘든 길을 제시하는지 묻는다. 

마음이 떠나고 몸도 떠난다. 

공동체가 와해되고 하나됨이 무너진다. 

갈등과 긴장이 증폭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진다. 

한 팀이 되어야 할 사람들끼리 와해되고 분열되어 산산히 흩어진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도 왜곡되고 저 운악산 꼭대기에 버려진다. 

 

그런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계속 말할 수 있는가?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혹시 잘못된 것이라고 회의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헬륨 풍선처럼 북녘으로 사라진다. 

 

절망의 순간, 실패의 순간, 비통의 순간, 원망의 순간. 

우리 인간이 겪는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런 순간들이다. 

기대가 낭패가 되고, 소망이 원망이 되며, 비전이 허상이 된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원래도 그렇게 예상했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했었고, 그 중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원망의 마음이 돌아간다. 

왜 나를 부르셨나? 왜 나를 이곳으로 이끄셨나? 

모든 것이 그분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날이 있다. 

그런 일주일이 있다. 

그저 그럴 때는 그냥 있어야 한다. 

그분이 일하시길 멍하니 쳐다본다. 

하늘이 조율해 주시길…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길… 

기도의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흩어졌던 꿈들이 다시 모이기를 바라며 운악산 정상을 쳐다본다. 

 

 

오늘 본문에서 도출할 수 있는 사실과 적용이다. 

 

1. 세상은 효율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 파라오는 일의 관점에서만 히브리 백성들을 대한다. 

- 모세와 아론에게도 너희가 할 일이나 하라고 말한다. 

- 노동강도를 더 높여서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 원래도 그랬지만, 당시에는 안식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 

-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 예배드리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려고 한다. 

-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다. 

 

3. 한 번의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마라. 

- 파라오에게 한 번 협상해서 실패했다고 그것이 실패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 원래 큰 일일수록 오랜 걸리는 법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보라. 남북의 통일은 아직도 달성되지 못했다. 

- 실패로 여길 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으로 전환하라. 

 

구정이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세상의 효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그리고 실패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말고 다시 그분의 일하심을 기대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새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설 명절을 통해 새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새로운 다짐들을 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세상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예배드려야 살 수 있는 예배자의 관점으로 보게 하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졌을 때,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처량한지 알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변화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게 하소서. 

그 올바른 관계에서 올바른 변화가 일어남을 믿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25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제 아들의 포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놓아 주셨는데,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할례 때문이다.

27 주님께서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하나님의 산에 가서 모세를 만나서 입을 맞추어 문안하였다.

28 모세는, 주님께서 자기를 보내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과, 자기에게 명하신 이적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아론에게 말하여 주었다.

29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았다.

30 아론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주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주석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24절) 이집트에는 모세를 죽이기 위해 찾는 이집트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피흘림의 죄를 지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훗날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정상 참작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도피성이 지어졌다. 하지만 모세는 미디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런데 이제 피난처를 떠나게 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더 나아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IVP 배경주석).

 

이집트로 가던 중에 모세는 뜻밖의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여정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십보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24-26절). 그 후 모세는 아론을 만납니다(27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은 모세에게서 아론에게로, 그리고 아론에게서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전해집니다. 말씀과 이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믿게 되었습니다(28-31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모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십보라의 도움과 아론과의 동역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모세의 부정적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합니다(31절). 짐을 나누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십보라와 아론 같은 동역자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은 난해한 분문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 

기껏 조용히 숨어 지내던 모세를 찾아내서 위대한 부름에 응답하도록 설득하셨다.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그를 죽이려고 하신다. 

그래서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추정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언약 백성으로서의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즉 히브리 백성들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약 백성임을 증명한다. 

모세 자신은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아직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 민족을 탈출시키라는 엄청난 부르심을 갖고 바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모세 스스로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고대 가족은 가장의 연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가장의 규정과 관례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가족 속에 계속 살 수 없다. 

혹은 가족 구성원의 탈주를 방치한다면 가장의 책임일 수 밖에 없다. 

가부장제의 특징이다. 

언약 백성은 할례가 그 징표다.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다. 

아들을 언약 백성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하나님이 원치 않은 일이다. 

 

둘째, 배경주석에도 나왔듯이, 모세의 죄값을 치러야 했다. 

모세는 사람을 살인했던 사람이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일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도피성 규정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설명은 나에겐 설득력이 없다. 

미래에 있을 도피성 제도를 끌고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고, 죄 값을 아들의 할례로 속죄한다는 개념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배경 주석과는 별개로, 나는 첫째 이유가 좀더 타당하게 들린다. 

모세와 그의 가족은 이제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탈출시키는 민족의 리더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가족, 특히 자신의 아들도 할례를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례의 민족의 리더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민족의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 꼭 치러야 할 예식을 모세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이미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모세와 십보라는 과거에 이 문제로 부부 싸움을 했을 수도 있다. 

십보라 원가족의 문화는 아들에게 할례를 주는 것을 혐오했을 것이다. 

굳이 아들에 몸에 칼을 대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어느 부모인들 좋아하겠는가!

모세와 십보라의 의견이 대립되었을 것이다. 

처가 살이를 하며 이집트와 동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세 입장에서는 강력하게 대립하는 아내의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자신의 민족 정체성,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로서의 자격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다른 히브리 사람들에게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하나님은 약속, 언약에 집요하신 분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신실하신 분이시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상대방도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를 요청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사에 들어오셨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치와 모멸을 겪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인류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내고 약속의 피, 할례의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피를 흘리더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아니 과연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는가? 

하나님은 나와 무슨 약속을 하셨던가? 

성경을 통해 하신 최종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말고 개인적으로 나와 하셨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는가? 

과연 그런 것이 있었나? 

그분이 하셨던 약속과 내가 드렸던 약속을 계속 기억하고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며, 소홀히 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다.

 

모세의 말을 듣고 그의 형 아론과 동족의 장로들이 믿고 받아들인 것은 좋은 징조다. 

첫발은 잘 디뎠다. 끝까지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원래 일이란게 그렇다. 

좋다가도 나쁘게 흘러가고, 나쁘다가도 좋게 마무리 된다. 

앞으로의 모세과 히브리 사람들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대충은 알지만 다시 궁금해진다. 

자주 보는 영화처럼, 자주 보는 드라마처럼, 모세 드라마의 다음 장면이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오늘의 기도]

약속에 진심이신 하나님, 

저도 하나님과의 약속에 더욱 천착하게 하소서. 

신실하게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합리화, 정당화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동시에 사석화, 율법주의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않게 하소서. 

약속을 신신하게 지키시어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약속을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시고, 

그 싸움에서 혹 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가 그 자리에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그 순간에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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