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6. 김혁수

 

[본문_창세기 2:15-17_새번역]

15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6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0. 들어가며 

- 런닝화의 딜레마_반발력 vs. 쿠션닝

최근 달리기에 점점 진심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4킬로미터씩 달리고요, 주말에는 10킬로미터를 달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까 런닝화에 관심이 쏠리더라구요. 어젯밤에 유투브 선생님들을 찾아봤습니다. 어떤 런닝화가 좋은지 여러 선생님들이 알려주시더라구요. 그런데 런닝화에도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탄성 반발력이 좋은면 쿠셔닝이 떨어지고, 쿠셔닝이 좋으면 반발력이 떨어지는 딜레마가 있더라구요. 다를 완벽하게 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런닝화를 구입할 예정입니다. 

 

- 인생의 딜레마_일관성 vs. 유연성

그런데, 이런 종류에 딜레마는 우리 인생 곳곳에 존재합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일관성을 중시하고 엄격하게 일관성을 고수하려고 하면, 유연성/융통성이 부족해집니다. 반대로 유연성/융통성을 중시하여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려고 하면, 일관성과 성실성이 부족해집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딜레마죠. 다를 완벽하게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쩔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죠. 중간 어디쯤에 나의 위치를 잡는 거죠. MBTI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I E, N S, T F, P J, 모든 성향지표들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쩔 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의 다른 면이 단점이 되죠. 

 

하나님의 창조에도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딜레마인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면 좋겠습니다. 

 

1. 창조의 딜레마 

1) 대리통치자를 둘지 말지?

번째 딜레마는 대리통치자를 둘지 말지 였을 것입니다. 이건 순전히 저의 추측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이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을 보시고, 정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관리를 하나님 당신이 직접 하실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맡길지 고민을 하셨던 같습니다. 물론 그분이 모든 것을 직접 관리하실 있었을 겁니다.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모든 동식물의 행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들을 그분이 몸소 직접 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대리통치지를 두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고 판단하신 같습니다. 그분이 혼자서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관여하고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보다 대리 통지자를 두어 세상을 맡기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신 같습니다. 하나님은 첫번째 딜레마를 이렇게 풀어내셨습니다. 

 

2) 대리통치자의 권한과 책임? 

번째 딜레마는 대리통치자의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어디다가 것인가하는 점이었습니다.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에덴 동산에만 국한 시킬 것인지 아니면 세계에 걸쳐 영향을 주게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한다고 , 그가 무엇까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죠. 생명나무의 열매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것인지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느냐에 따라 대리 통치자의 위상이 달라지는 거죠. 나라를 대표하여 타국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죠. 영사가 있고 대사가 있고 특사가 있습니다. 각각이 다른 정도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나라를 대표하지요. 

 

결국 하나님은 모든 권한과 책임을 아담에게 넘깁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어갈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있게 하였습니다. 이건 엄청난 권한입니다. 

 

여러분, 아시죠? 에덴 동산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나무의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생명 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다른 나무도 갖가지 이름이 있었을 같습니다. 지혜를 주는 나무의 열매, 용기를 주는 나무의 열매, 사랑을 더하는 나무의 열매 등등상상할 있는 아주 다양한 나무의 열매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나무의 열매가 바로 생명나무의 열매였습니다. 영원한 삶을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열매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실 ,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 나무가 바로 생명나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언제든지 먹을 있었습니다. 다른 나무의 열매도 언제든지 먹을 있었습니다. 지혜, 용기, 사랑, 리더십, 절제 등등의 열매도 먹을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한과 책임의 범위였습니다. 어마어마한 권한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세상의 돌봄 통치자의 자리를 주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정이었고요, 창조의 딜레마 번째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었습니다. 

 

창조의 딜레마 가지를 하나님은 담대하게 풀어내셨습니다. 대리통치자를 두는 것이 더욱 좋은 세상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리통치자에게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답하셨습니다. 한가지만 금지하셨던 것이죠.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는 명령이었죠. 그건 조금 있다가 다루도록 하고요. 우선 다시 기억할 내용이 있습니다. 

 

2. 에덴의 기능 

1) 세계 돌봄 통치의 중심지 

에덴의 가지 기능과 관련된 내용인데요.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에덴의 번째 기능은 혹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세계 돌봄 통치의 중심지로서 에덴의 역할이 있습니다. 에덴으로부터 세계를 돌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동물들의 이름이 지어지고 분류가 되고 관계가 설정됩니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세상에 흩어져 살아갑니다. 앞으로 태어날 인류의 삶은 에덴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개의 강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돌봄을 받게 되는 거지요. 돌봄 통치의 주체가 바로 대리 통치자로 지목된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2) 지성소  

에덴의 번째 역할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에 우리가 다루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전의 지성소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공간이 바로 에덴이었습니다. 아담은 에덴 지성소를 섬기는 대제사장 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덴의 가지 기능을 살펴 보아야, 하나님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의 명령을 내리셨는지 조금 이해를 있게 됩니다. 

 

3. 명령_선악과의 딜레마

1) 최고 통치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최고 통치자와 대리 통치자 사이에 차이를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 돌봄 통치를 하는 데에 있어 사람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체계화시킬 있는 권한이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열매를 먹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돌봄 통치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것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세계 돌봄 통치에 관해서는 사라지게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안전장치였습니다. 최종적인 선악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사람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임을 사람들이 계속 인정하도록 돕는 안전장치였습니다. 바로 동산 중앙에 있어 매일 보게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던 거죠. 

 

2) 지성소의 보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둘째,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지성소를 보존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중의 성전, 지성소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지성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계시다는 말의 의미는 최종적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고유한 권한은 침해받을 없고, 따라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선악 판단을 세상에 알리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겁니다. 에덴 지성소에서 계속 일어나야 하는 일이 바로 이런 중재와 화해의 역동이었습니다. 지성소의 역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선악의 최종적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그걸 온전히 인정해야 했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셨습니다. 그걸 먹는 것은 에덴 지성소를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선악과를 먹는 것에 하나님이 그리도 엄중한 벌을 내리시는지 우리는 조금 이해할 있습니다. 사람의 반역을 통해 세계 돌봄 통치의 질서가 망가져버립니다. 사람의 반역을 통해 에덴 지성소가 더렵혀지고 기능이 멈춰버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에게 걸었던 기대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4. 나가며

- 딜레마 이해하기

저의 오늘 설명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에덴과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계획에 비추어 , 창조의 딜레마와 선악과의 딜레마 조금 이해할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비추어 ,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대리 통치자이며 대제사장인 하나님의 형상, 사람을 두어 세계 돌봄 통치와 세상 화해중재를 맡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욱 좋은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의 딜레마, 선악과의 딜레마에 많은 분들이 헷갈려하고 힘들어합니다.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겠죠. 저는 오늘 하나님 편에서 한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바라기는, 100%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분이 그리는 세상에 대한 그림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고 그래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분은 몰래 숨어서 사람들이 죄를 짓는지 안짓는지를 보는 경찰 아닙니다. 덫을 놓고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냥꾼 아닙니다. 지은 사람을 정죄하고 형량을 매기는 재판관 아닙니다. 가장 아름답고 보기 좋은 세상을 창작한 예술가 가깝습니다. 균형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예술가입니다. 창조자는 창조자로서, 사람은 대리통치자와 제사장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균형이 계속 유지되길 바라는 예술가입니다. 

 

9 ,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만드시고,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작품 걸작품이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인데, 사람에게는 특별한 역할을 맡기셨죠. 바로 대리통치자, 대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처음 그렸던 세상에 대한 아름답고 보기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앞에 머물러 있으시길 바랍니다. 10, 20, 30, 조용히 침묵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신 그림 앞에 머물러 있어 보는 겁니다. 마치 갤러리 그림 전시회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분이 그리신 그림을 응시해보는 겁니다. 

 

이번 , 하나님의 창조의 그림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따뜻해지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창조의 하나님을 불러 봅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되뇌여 봅시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할 , 물질만 창조하고 손을 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만물을 돌볼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만물과 소통하고 평화를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대리통치자, 대제사장 사람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런 그림을 다시 상상하면서 창조의 하나님을 불러 봅시다. 

 

2. 혹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면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든다면 그런지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시간을 가집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창세기를 읽으며 들었던 의문은 무엇이었나요? 어떻게 해결이 되었나요? 아직 해결이 안된 지점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오늘 설교를 통해서 부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내용은 무엇인가요? 

2021 06 17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 왕이 목놓아 울면서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소문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2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도 날의 승리가 슬픔으로 바뀌었다. 왕이 자기의 아들 때문에 몹시 슬퍼한다는 소문이, 모든 군인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3 그래서 군인들은, 마치 싸움터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 부끄러워서 빠져 나가는 것처럼, 슬며시 안으로 들어왔다.

4 그런데도 왕은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큰소리로 " 아들 압살롬아, 아들아, 아들 압살롬아!" 하고 울부짖었다.

5 마침내 요압이 집으로 왕을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임금님, 모든 부하가 오늘 임금님의 목숨을 건지고, 임금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목숨도 건지고, 모든 왕비의 목숨과 후궁들의 목숨까지 건져 드렸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오히려 오늘 부하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6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임금님을 반역한 무리들은 사랑하시고, 임금님께 충성을 바친 부하들은 미워하시는 겁니까? 우리 지휘관들이나 부하들은 임금님께는 있으나마나 사람들입니까? 임금님께서는 오늘 임금님의 본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차라리 오늘,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더라면, 임금님께서는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7 이제라도 일어나 밖으로 나가셔서, 임금님의 부하들을 위로의 말로 격려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지금 임금님께서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에 사람도 임금님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님께서 젊은 시절부터 이제까지 당한 모든 환난보다도 무서운 환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8 그러자 왕이 일어나서 성문 문루로 나와 앉았다. "임금님께서 성문 문루에 앉아 계신다!" 하는 소식이 모든 부하에게 전해지니, 모든 부하가 왕의 앞으로 나아왔다.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도망하여,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9 이스라엘 백성은 지파마다 서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다윗 왕은 우리를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었다.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을 피해서 나라에서 떠나 있다.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압살롬은 싸움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다윗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셔 오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11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다윗 왕에게 전달되었다. 다윗 왕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다 장로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어찌하여 왕을 다시 왕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

12 그들은 나의 친족이요 나의 골육지친인데, 어찌하여 왕을 다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려고 하는지,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그리고 아마사에게는, 그가 나의 골육지친이면서도,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사령관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벌을 내리시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고 하더라고 알려 주십시오."

14 이렇게 다윗이 모든 유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같이 자기쪽으로 기울게 하니, 그들이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부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어서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슬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부하들을 격려하고 왕국을 안정시켜야 상황이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요압의 책망과 협박을 들은 다윗은 억지로 왕의 직무를 재개합니다(1-8). 북이스라엘 지파가 왕의 환궁을 주도하려하자 다윗은 자신의 친족 유다 지파가 주도권을 갖도록 부탁합니다. 아마사를 군사령관으로 세워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이들에 의해 왕은 환궁 요청을 받습니다(9-14).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로 왕의 직무에 복귀한 다윗은 제대로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환궁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유다 지파를 의존함에 따라, 이후 북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간의 갈등을 촉발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군사령관 교체는 요압의 아마사 살해라는 불상사를 불러옵니다(삼하 20 참조).

 

——

다윗의 이야기는 현실 역사 이야기다. 

단순히 영적으로 해석될 내용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일들에 시사점을 많이 던져준다. 

다윗은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용사들을 격려하거나 환대해주지 못했다. 

쿠데타가 일어났으면 어쩔 없이 쪽은 죽음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압살롬이 죽지 않으면 다윗과 그를 따르는 식솔, 부하들이 죽는다. 

대등한 국가간의 전쟁이라면, 휴전이라는 것이 있다. 

전력차가 경우라면, 항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럴 경우 목숨은 살려 두기도 한다. 최고 지도자는 죽더라도 부하들을 살려 두기도 한다. 

그러나 쿠테타는 패배한 쪽의 세력이 거의 대부분 축출된다. 내전이 무서운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압의 말이 옳다. 

다윗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목숨을 다해 싸운 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것은 알겠지만, 씨앗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시시비비를 다루든지, 아님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든지 

중에 하나를 결단력있게 감당했어야 했는데, 애매하게 진행했다.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지게 만들었다. 지혜롭지 못했고, 어설펐다. 

그가 작성한 수많은 시편은 때로 이런 약점에 대한 자신의 도피처가 아닌가 싶다. 

 

요압이 다윗을 압박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쿠테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협박 수준의 말이 나왔다. 

싸움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격려하고 축복하지 않고, 오히려 패잔병처럼 대한다는 사실에 요압은 화가 많이 났다. 

 

다윗은 여전히 개인적인 감정, 사적 감정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다윗은 공인이다. 왕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현실판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왕국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다. 고통은 심하다. 

그럼에도 왕국의 회복을 위해 고통을 감당한다. 

인간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자신의 아들이 귀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귀하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해야 했다. 

게다가 압살롬만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왕위 계승자도 있었다. 

 

여러모로 다윗의 인생 후반부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아브라함은 인생 후반부에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까지 성장, 성숙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다윗은 과연 어땠을까? 

다윗은 인생 후반부로 갈수록 초심을 잃어버렸다. 

왕이라는 직책이 갖는 부담 때문인가? 

 

죽을 때까지 성숙할 있는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닮을 있는가? 

죽을 때까지 믿음의 삶을 진보시킬 있는가? 

 

——

평생에 걸쳐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 머물거나 퇴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의 관계, 믿음, 신실함, 윤리의식, 실천력 

모든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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