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7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10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1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여러분의 소식을 전해 주어서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내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일이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5 그러므로,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16 내가 스데바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는, 그 밖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석

11절: 여기에 나오는 정보 제공자들은 고린도 아니면 에베소의 부유한 여인이었던 글로에에게 속한 대리자로서 두 도시 사이를 오가며 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교적 신분이 높은 노예이거나 자유민으로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은 바울에게 소식을 전했다. 소식이나 서신은 다른 사업을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빈번하게 전달되었다(IVP 배경주석).


어느 곳에나 분쟁이 있다. 

싸움이 있고, 분열이 있고, 긴장과 갈등이 존재한다. 

고린도교회에도 분쟁이 있었다. 

분쟁의 발단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몇 가지 유추해 볼 요소가 있다. 

먼저, 그들은 아볼로 편, 게바 편, 그리스도 편이라는 단어를 써가면 편가름, 줄서기를 하고 있다. 

둘째, 이는 세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매우 적은 소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다(14절)

이 두 가지 근거를 놓고 볼 때, 문제의 발단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문제의 전개 양상은 결국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에게 줄서기를 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를 통해 교회 전체가 분열의 양상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그리스도 편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그래도 중심을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중립을 지키면서 당시의 어떤 인물에게 줄을 서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화의 중재자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들도 다른 분파처럼 자신들의 사람들을 모으고 의견을 주장하되 다른 사람들을 비판함으로 분쟁을 가중시켰던 점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로 편이 갈려 서로 의견이 충돌한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러 고린도에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한 발 물러선다. 

사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명령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첫째, 바울은 현재의 분열과 분쟁이 세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세례를 받아 자신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둘째, 바울은 세례를 주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복음의 핵심에는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셋째, 분열을 막고 새롭게 화합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누가 주었는지 따지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확실히 이번 편지는 분열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이 유지되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사역자들의 책임이다. 

분열은 결국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분열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주신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중보를 무색하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한다. 

그리고 그 담을 허무는 일을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우리는 계속해서 담을 쌓는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다른 도덕과 윤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작은 운동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교회는 연합이 아니라 섹터와 된다. 

 

불의와 손잡을 수는 없다. 

거대 악을 묵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를 빼고, 나와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주변에 있는 모두가 거대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 

그 순간, 사랑와 화해와 연합은 사라진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오늘도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한다. 


예수님, 

주변에 분열과 고통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마다 교회마다 분열이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볼 때마다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 명의 의견과 생각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나 독재 사회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서로 깊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계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아픔과 슬픔이 가라앉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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