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1월 30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사람에게 들어가니, 블레셋 통치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왔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다. 

8 그들이 사무엘에게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한 마리 가져다가 주님께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고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께서 큰 천둥소리를 일으켜 블레셋 사람을 당황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였다. 

11 이스라엘 사람이 미스바에서 나와서, 블레셋 사람을 벳갈 아래까지 뒤쫓으면서 무찔렀다.

 

주석

7절. 고대 근동에서는 보통 선제 공격을 하기 전에 의식을 수행했다. 정탐꾼들이나 밀고자들은 사람들이 기존의 절기들과 연관되지 않는 의식들을 수행하는 수상한 모임을 가질 때, 군사 행동이 계획되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IVP 성경배경주석).

10절. 고대 사람들은 천둥과 번개를 신의 노여움의 표시로 믿었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미스바 대성회

20년간 이스라엘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다. 

상당히 오랜 기간이다. 

언약궤가 기랏여아림으로 돌아오고 엘리아살이 궤를 지켰다. 

과거 사무엘리 하던 일들을 엘리아살이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실로에 있지 않고 기랏여라림으로 옮겨졌고, 

엘리 제사장에서 사무엘로 리더십이 이양되었다.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쟁과 갈등을 중재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나라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무엇이 먼저일까? 

마음이 하나님께 향한 것이 먼저일까? 

아님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한 리더십이 먼저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질문처럼 느껴진다. 

상승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 

사무엘은 사람들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식 대성회 집회를 열었다. 

하나님께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언약궤가 돌아왔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다른 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우상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엔 너무나 많은 신들이 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자기에게 시간과 돈과 마음을 달라고 부르짖는 이들,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돈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야 인기와 명예를 견고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너도 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우리 시대 넘쳐난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들.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을 쫓아 다닌다. 

 

미스바 대성회가 필요한 이유다. 

마음을 다시 하나로 집중하여 오직 하나님만 끝까지 섬기겠다고 결심하는 시공간이 필요하다. 

주님의 구원을 바라며 부르짖는 시간이 요청된다.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주님을 부른다. 

아이돌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우주의 영원한 신을 부르고 찬양하는 것이다. 

 

2. 성회 중 벌어진 사건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주님께 나아와 마음을 쏟아붓고 주님을 찬양하는 그 때, 블레셋은 전쟁을 시작했다. 

블레셋은 정신을 못 차렸다. 

지난 번 언약궤 사건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새겨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그건 이성적인 합리적인 사람들에나 일어나는 결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떤 사건의 시말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며, 그 의미도 놓치고 만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에 마음을 쏟다보면, 어느새 우상이 자기 옆에 와있고, 마음 속에 들어와 있게 된다. 

우상은 가깝고 매력적이며 신비롭고 유익하다.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도움이 된다. 

에덴의 선악과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 방식이 우상에게도 적용된다. 

보암지고, 먹음직도, 슬기롭게 할 만한 그 선악과처럼 우상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우상에 마음을 빼앗긴 블레셋은 과거의 일들을 잊고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큰 곤경에 처했다. 

전투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부르짖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블레셋이 미스바의 비무장 군중들에게 다가와 약탈을 계획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예배하러 모였지만, 두려움이 팽배해졌다. 

마음을 모을 수 없었다. 

 

사무엘이 한 일은 더 기가 막히다. 

전투를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린 양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여리고 앞에 여호수아 같은 믿음을 발휘하고 있다. 

사무엘의 믿음은 홍해 앞에 모세를 닮았다.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과 유사하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이다. 

비현실적이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믿음이다. 

 

솔직히 닮기 싫다.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게 낫지 않나? 

제사는 제사대로 드리고, 전투준비는 그것대로 진행해야 했다. 

모세와 아론이 산에서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전장에서 전투를 치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 전투 준비를 아예 안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블레셋이 당황하니, 그들을 따라가면서 죽였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투 트랙을 사용한 것이었다. 

사무엘은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렸으며, 다른 한 편으로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무엘의 행위만을 강조한다. 

믿음의 미스바 성회 말이다. 

그건 그대로 아주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극단주의자는 언제나 설 길이 없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싸움터로 나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며, 일터로 나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성경을 영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왜곡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시어 그 “일”을 하게 하신다. 

 

오늘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삶의 현장으로 나아간다. 

두려움을 뚫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이 사무엘의 역할을 대체하셨다. 

내가 굳이 사무엘이 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예수님과 성령님을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삶터, 일터, 전장터로 나아갈 뿐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 이게 중요하다. 

그분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 그 중에 신뢰도 중요하지만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한 가지만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호도하는가!! 

 

[오늘의 기도]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길 원하시는 하나님, 

지금 이 땅엔 우상이 판치고 있습니다. 

고대의 우상과 현대의 우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무속의 신들과 우상들이 곳곳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쾌락의 우상도 결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당신이 오직 온 우주의 유일한 신임을 증명해 주소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소서. 

주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고대합니다. 

 

주님, 

미스바의 대성회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주께로 향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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