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02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내가 주님의 법도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의로 내게 새 힘을 주십시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대조성경

메시지. 예수께서는 이처럼 많은 이야기로 메시지를 전해 주시면서, 그들의 경험과 성숙도에 맞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예수께서 이야기 없이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과 따로 있을 때에 모든 것을 다시 설명해 주셨다. 혼란스러운 것을 정리하시고, 얽힌 것은 풀어주셨다(33-34절).

 

[오늘의 묵상]

# 비유 

예수님은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 사람들이 친근한 사물과 상황을 비유로 드셨다.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단어 풀이나 논리적, 수사학적 표현으로는 안된다. 

청중들이 평소에 보고 있는 사물, 사건, 상황으로 풀어야 알아들을 수 있다. 

당시 청중들이 충분한 문자 교육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에 능통하고, 구약 성경을 해석학의 기법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생활인이고, 떄로는 아프고 병든 사람들이다. 

그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아무리 설명해도 못알아 들을 수 있는 상황의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바로, 비유다.

비유는 웃음을 가져다 주고, 비유는 통찰을 이끌어 낸다. 

오래 기억되고, 반복 재생산된다. 

의미의 확장이 일어난다. 

 

내 주변에 비유를 잘 드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구체적인 사물과 사건과 사람과 상황을 잘 기억한다. 

그 구체성이 비유를 풍성하게 한다. 

부러운 지점이다. 

나는 내면지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에 부족함이 있다. 

노력하지만, 선천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의 능력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느낀다. 

과거보다 많이 계발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아주 어렸을 떄에는 현실보다 이상,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 외부세계보다 내면세계에 관심이 많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현실을 거부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그것이 나의 성향의 문제 혹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현실을 더 깊이 응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 

비유를 풍성하게 하고 싶다. 

현실을 더 깊이 보고 싶다. 

가능하면 더 자세히, 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안 귀한 사람이 없으니, 각자의 개성과 역사와 꿈과 비전을 기억하고 싶다. 

그런 날이 오도록 갈고닦아야 한다. 

하지만, 젊을 때처럼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몸이 견디질 못한다. 

몸이 견딜만큼만 노력하자. 

 

# 제자들

제자들에게는 따로 시간을 많이 내 주셨다. 

대중 강연 및 설명회가 끝나면 제자들을 따로모아 낮에 했던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구약 성경을 인용하기도 하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읊기도 하셨다. 

비유가 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도 다시 강조하셨다. 

비유는 핵심을 벗어나기가 쉽다. 

그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제자들만큼이라도 그 중심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번 복음밥 캠프에서 독특했던 지점은 차성진 목사님의 열정이다. 

설교 이후에 밤 늦게까지 다른 자리를 마련해서 Q&A를 진행하더라. 

새벽 1시 30분까지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에게 성심껏 대답하는 장면을 보았다. 

젊은 날의 열정이 떠오른다. 

그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바로 제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으로 통해 이해가 깊어지고 말씀이 체화된다. 

자신이 던진 질문은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되어 남는다.

질문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한 번 던진 질문은 그 사람의 생각과 논리의 역동/과정에서 생산된 것이므로, 언제든지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되고, 한 번 답을 얻었으면 그 논리 구조의 연결점이 생성되어 다음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질문은 자신에게 적합한 메시지가 되고, 메시지를 남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Q&A를 통해 점점 더 제자다워진다. 

이걸 못하는 것이 아쉽다. 

나도 더는 질문을 잘 던지지 않는 것 같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더는 나에게 질문을 잘 던지지 않는 것 같다. 

이게 정체됨의 징조가 아닐까! 

내가 먼저 예수님 앞에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누군가의 질문을 받는 것을 더욱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피곤한 일이긴 하지만, 나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라면… 

 

[오늘의 기도]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아직도 더 깊이 알아야 할 것이 많지만, 

점점 정체되어 가는 저를 발견합니다. 

나이듦은 정체를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됩니다. 

언제까지 빠른 속도로 정진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한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을 급속도로 변하고 있거든요. 

주님, 세상이 빠르게 변하기에 주님의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한 분별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질문은 계속 던져져야 합니다. 

던져진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을 구해야 할 겁니다. 

몸이 예전같지 않지만, 그래도 주님 주시는 힘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여전히 붙들고, 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사건, 사고, 행사, 이벤트, 이슈, 담론… 

이 모든 것을 성경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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