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름다운 섬마을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아이유와 박보검의 등장부터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의 환타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별로 보고싶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공개될수록 이 이야기는 한 인생 전체가 담겼음이 드러났다. 젊은 청년들의 사랑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 걸친 삶과 사랑이었다. 이야기 구성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2. 1950-60년의 제주가 처음 이야기의 배경이다. 전쟁의 참화와 제주 4.3. 사건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곳, 가족의 죽음으로 생계는 위협받고 가난이 대물림 되던 곳, 제주는 그런 곳이었다. 엄마는 딸 애순을 남기고 재혼을 해야 했고 생계를 위해 잠녀(해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애순은 엄마를 잊지 못하니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를 찾아왔다.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진 애순은 눈치밥을 먹어야 했고,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생선가게 아들인 관식은 그런 애순을 아꼈고 보호했다. 억척스러운 엄마로부터 깊은 사랑을 경험한 애순은 힘겨운 삶 속에서도 문학 소녀의 꿈을 꾸며 당차고 야무지게 자라간다. 
 
3. 애순은 엄마의 죽음 이후 어쩔 수 없이 동생들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애순 곁엔 무쇠처럼 무겁고 든든한 관식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허나 새아버지가 다시 새엄마를 데리고 오면서 애순은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게 되고,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고아가 된다. 애순은 관식과 함께 부산으로 야반도주를 감행하지만, 사기를 당한 뒤에 다시 제주로 붙잡혀 온다. 우여곡절 끝에 애순과 관식은 결혼하게 되고, 딸 금명이를 낳는다. 
 
4. 시리즈의 모든 내용을 요약할 작정은 아니다. 초반부의 이야기는 애뜻하고 사랑스럽고 설렌다. 인생의 봄에 해당된다. 유채꽃 밭에서의 꼼냥꼼냥은 아이유와 박보검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들이다. 노란 유채꽃 밭에서 풋풋한 사랑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장 아름다운 자연 속에 가장 아름다운 청춘이 서로를 붙들고 있다. 영화관에서 보면 더욱 아름다웠을 드넓은 유채꽃 밭의 푸른 청춘. 어려웠던 시절이 더 이상 고달프지 않도록 덮어준다. 
 
5. 이야기가 여기서 멈춘다면 이 드라마는 그저 청춘 사랑 이야기에 끝났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일생에 걸친 삶과 사랑의 대서사시가 되기 위해 이제 여름, 가을, 겨울로 나아가야 한다. 오애순과 양관식의 자녀들, 금명, 은명, 동명이 어떻게 가족이 되어 가난과 상실의 시기를 극복하는지가 남아있다. 1950년대에서 시작해서 2025년까지 애순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16부에 담아낸다. 그 점이 감동적이다. 70-80년의 긴 시간이 흐른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회상이 교차한다. 여전히 애순과 관식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자녀들을 위해 더 깊이 헌신하다.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내려간다. 좋은 일이 있은 뒤 시련의 시기가 닥쳐온다. 그 모든 시기를 애순과 관식은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이겨나간다. 
 
6.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떠오른다. 가난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상경하여 미싱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어머니,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나 일찍 어머님을 여의고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상경하여 미싱 공장의 여공 관리자로 일하셨던 아버지, 그렇게 1970년대 초에 두 분은 섬유 공장에서 만나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상태로 나를 낳으셨다. 내리 삼형제를 낳았기에 엄마는 아이들을 돌보셔야 했다. 아버지만의 월급으로는 항상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고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자식들만큼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좋은 교육을 시켜야겠다는 결심만은 무수히 많이 들었다. 
 
7. 금명이가 서울대에 합격하고 부모의 큰 기쁨이 되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과외와 알바를 쉬지 않아야 했고 원하던 유학길이 좌절 되는 상황 속에서 부모에게 서서히 짜증을 부리는 장면은 잊히지가 않는다. 내 모습을 너무나 빼닮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웬만한 시험은 100점을 맞았고, 중고교 시절에도 반에서 1, 2등, 전교에서도 10등 안에 들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어머니의 기쁜 표정은 나의 성적표와 상장에 달린 것처럼 보였다. 고려대에 합격하고 과외와 학업과 교회 생활을 병행하면서 점점 지쳐가는 나 자신을 봤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음 속의 불편함과 짜증은 점점 늘어갔다. 금명이처럼 쏘아부치지는 못했지만, 나의 내면은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결국 군대로 도피했다. 
 
8. “폭삭 속았수다”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께 드리는 헌사다. 
 

너무나 어렸고, 
여전히 여린 그들의 계절에 
미안함과 감사, 깊은 존경을 담아 
 
폭싹 속았수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이 시가 이 드마라의 주제다. 나의 엄마는 나를 22살에 낳으셨다. 둘째를 24, 셋째를 26에 낳으신 셈이다. 아빠는 27에 나를 낳으셨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섬유공장, 중동 건설 노동자, 자동차 카 센터, 농기계 판매, 운전 기사 등등 쉬지 않고 돈을 벌어오셨고,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지금도 나에게 박사학위 따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물어보신다. 자신이 대주고 싶다 하신다. 그분들은 참 어렸고, 지금도 여리시다. 하지만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끝이 없다. 매일 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자녀들, 자손들을 위해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가며 기도를 드리신다. 이러니 이 드라마를 보면서 울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엄마 아빠의 이야기며, 그렇기에 내 이야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9. 한 인생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그려줘서 너무 고맙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16부작이 길어 보이지 않고 600억의 제작비가 아깝지 않다. 아버지 관식의 사랑은 나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고, 하늘 아버지를 기억나게 한다. 한결같은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생명과 회복의 이야기다. 현실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생명의 기운으로 씌운 뒤에 다시 마음의 밭에 뿌리니 인간 존재가 봄의 유채꽃처럼 피어난다. ‘미스터션사인’ 이후 최고의 드라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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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0) 2025.04.08

 

삼형제 중 첫째, 방 두 칸의 반지하. 

어린시절, 꿈 중의 하나는 아침 햇살 가득한 나만의 방을 갖는 것이었다. 

여름보다 겨울이 좋았던 이유는 내가 겨울에 태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장마기간을 지나고 나면 벽에 물기가 먹어 눅눅함이 지나쳤다. 

겨울에 결로 현상으로 곰팡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여름이되면 집안 곳곳에 무한대로 번식했다. 

그래서 여름이 싫었고 겨울이 그나마 나았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은 청소년이 나뿐이었겠는가! 

영화 속 17세 여주인공, 우담은 9남매의 넷째로서 자기방을 끔찍히도 갖고 싶었다.

같은 반 친구이자, 19살 오빠의 여자친구인 경빈은 임신한 몸으로 우담의 집에 들어온다. 

결국 우담과 경빈이는 룸메이트가 되고 마는데, 이를 끔찍이도 싫어한 우담은 경빈의 태아가 지워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경빈은 외롭고 우울한 가정사를 지니고 있었고, 경제적 이유로 우담의 집에 머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결국 생명, 가정,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모든 줄거리를 여기다 쓸 수는 없으니, 이정도로 입을 닫자. 

 

첫째는 발달장애가 있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자신의 노력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둘째는 지옥같은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20세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등장하는 인물이 다 9남매의 현실 속에서 애환을 겪지만 다복함을 경험했다. 

그 다복함은 좁은 공간에 서로 모여살아가는 가족에 의해서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감으로 성숙해간다. 

과거 대가족의 풍요로움이 현대적으로 해석된다. 

부모의 권위보다는 모두가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밝힌다. 

부모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혼내지 않고 대화하며 설득한다. 

이런 가족이 현대에 있을까 싶다. 

19세 고3과 17세 고1 사이에 생긴 아이에 대해 이토록 담담한 부모가 있을까 싶다.  

 

우담은 자기만의 방을 원했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었다. 

아니 또 한 명의 식구를 얻었다. 

많은 식구로 인해 지옥처럼 여겼던 그 공간은 누군가의 안식처로 기능했다. 

그러니 지옥이 아니라 사람 냄새나는 천국이다. 

생명이 소중히 여겨지고, 발달장애인도 살아내고, 버림 받은 청소년도 구출되는 10남매 가족 이야기. 

 

교회가 이러면 참 좋겠다 

 

** 대한민국의 2024년 가족 영화이다. 감독은 오세호이고, 김환희, 김리예, 김민규 등이 출연했다.
** 2024년 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초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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