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07일 토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11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12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13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14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15 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주석

모세의 범죄(12-15절). 이집트인은 상당한 인종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등하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무시했다. 따라서 외국인이 이집트인을 죽이는 것은 커다란 범죄에 해당되었다(IVP 배경주석). 

 

생명을 건짐 받았던 모세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을 쳐 죽입니다(11-12절). 다음 날 모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는 것을 중재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살인죄가 탄로난 것을 알고 도망칩니다(13-14절). 이 일을 들은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찾습니다(15절). 

 

나일강에서 생명을 건짐 받은 모세는 동족들이 학대와 고통을 받는 또 다른 죽음의 현장을 봅니다(11절). 이때 모세는 살리는 선택이 아니라, 죽이는 선택을 합니다(12절). 이 방식은 동족들을 돕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의도는 오해를 낳았고, 또 다른 죽임의 방식을 형성합니다(14-15절). 나는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모세는 민족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친모로부터의 영향일 것이다. 

바로의 딸의 양자로 입양은 되었으나 양육은 친모에 의해 받았다. 

자신의 외모와 일반 이집트 사람의 외모가 다르다는 것도 인지했을 것. 

 

자신의 동족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던 차에, 왕궁 밖으로 나갈 일이 생겼고, 히브리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그는 친모로부터 히브리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들었을 것. 

오랫동안 상상 속이지만, 불합리한 정책과 고통받는 동족에 대한 연민으로 분노가 쌓였을 것. 

이집트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자 그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집트 관리인을 죽였을 것. 

추측컨대, 노동현장에서 히브리인을 때리고 있는 사람은 이집트 관리인 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모세가 아무리 분노가 쌓였기로 한 두대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였을 것 같지 않다.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있었던 것 같고, 계속되는 폭행에 모세의 분노가 폭발했을 것이다. 

모세는 그 순간 자신이 정의롭다고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폭력과 폭행으로부터 구해준 그 히브리 사람이 이 사건을 소문을 냈다. 

온 히브리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바로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의아한 것은 바로의 반응이다. 바로의 딸의 양자이면, 자신의 손자가 된다. 비록 양자지만 왕궁 사람이다. 

그런데 노동 현장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해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오히려 히브리 사람들의 반응은 이해가 된다. 

모세를 동족으로 여기기보다 왕궁 사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울 때 모세가 싸움의 이유를 묻자,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동족 사람들을 돕는 사람으로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세는 사실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다. 

경계인. 

히브리 사람도 아니고 이집트 왕궁 사람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섣부른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 물불 안 가리는 성격과 판단 탓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가족 같았던 왕궁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될 지경이었다. 

자신의 위치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혜롭지 못한 살인 때문에 그는 홀로 외로이 광야로 가야만했다. 

40년의 인생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나,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잘 파악하지 않은 채, 과도하고 섣부르고 충동적인 행동은 자칫 문제를 악화시킨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십브라와 브아처럼 좀더 지헤롭게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충동적이기보다 면밀히 검토하고 사람과 돈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일상을 잘 지켜내되,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과감하게 결단한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준비하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용기 있는 헌신이 필요하다. 

지혜롭게, 성실하게, 과감히게… 

 

오늘 하루 더욱 지혜롭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분의 때에 과감하게 뛰어들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토요일은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나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이라고 해서 한 없이 풀어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 당신의 시야와 생각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게 하소서. 

가족을 더 사랑하고, 교회를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한 마음과 몸의 준비를 하게 하소서. 

 

고통 속에 있는 약자들을 품으시는 하나님, 

당신의 눈과 마음으로 그분들을 보게 하소서. 

호소할 곳이 없어서 고통 가운데 외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10.29 참사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돌보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06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 레위 가문의 한 남자가 레위 가문의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3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4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5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공주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그것을 가져 오게 하였다.

6 열어 보니, 거기에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7 그 때에 그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8 바로의 딸이 대답하였다.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였다.

10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NIV

and she became pregnant and gave birth to a son. When she saw that he was a fine child, she hid him for three months(2절).

 

레위 가문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엄마는 ‘하도 잘 생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남몰래 키웁니다(2절).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여자는 아이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습니다(3절). 마침 강가에 목욕을 하러 온 바로의 딸이, 아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깁니다(5-6절). 이것을 지켜보던 아이의 누나는 바로의 딸에게 적절한 제안을 합니다(7-8절). 이렇게 모세는 건져집니다(10절).

 

나일 강은 히브리 남자 아이에게는 죽음의 장소요, 그의 가족들에게는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한 생명이 건지십니다. ‘하도 잘 생겨서(2절)’의 원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며 ‘좋았더라’라고 하신 단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눈길로 바라봤던 어머니(2절), 갈대 상자에 담긴 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며 지켜보던 누나(4절), 히브리 남자 말살 정책을 알고서도 히브리 아이를 불쌍히 여긴 바로의 딸에 의해(6절) 모세는 건짐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작은 행동들을 모아,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의 묵상]

바로의 딸은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바로의 정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갈대에 담겨 떠 내려오는 아이가 히브리 남자 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아이를 길렀다. 

솔직히 몇 명이나 이렇게 건졌는지 잘 모르겠다. 

꽤나 많은 아이가 이 공주에 의해 살았을 것 같다. 

 

하나님은 이 공주를 사용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모세의 아빠, 엄마, 누나, 그리고 바로의 공주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퍼즐들로 기여한다. 

모세를 기르는 것은 그들에게 큰 일이자 작은 일이다. 

큰 일은 왕국의 정책을 거스르기 때문이요. 

작은 일은 모세가 세울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크기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연 알았을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 말이다. 

전혀 몰랐을 것이다. 그저 아기를 살리고 키워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도 아기를 키웠다. 

3개월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언제 이집트 관리들이 들이 닥칠지 모른다. 

아기 울음 소리를 막기 위해 갖는 방법을 다 동원 했을 것이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그들을 짓눌렀다. 

3개월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이 눈물로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다. 

아들을 떠나보내던 엄마와 아빠의 눈가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태어나면서부터 3개월이 되어 아기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떠나 보내는 이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키웠다. 

 

모세의 부모는 아기를 버렸고,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다. 

부모 입장에서는 모두 고통스런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손 안에 모세와 예수님은 새로운 나라를 일으킨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나, 새로운 영적 생명을 키우는 목회자 혹은 사역자들은 모두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간다. 

사람을 키우고 양육하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온 마을이 달라 붙어야 되는 일이다.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 혹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이 그래서 어렵다. 

부모나 목회자가 자기 혼자 하려고 하는 순간, 고통이 배가 된다. 

많은 사람이 도와야 한다. 

주양육자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옆에서 돕는 사람들이 필수적이다. 

함께 양육하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도 살고 양육자도 산다. 

 

기독 공동체는 서로 양육하는 공간이다. 

서로 배우고 서로 자라가는 공간이다. 

한 두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영적 선생님이 되어 서로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준다. 

그런 상호 협력 배움이 사라지면 생명이 잘 자라나지 않는다. 

가르치려던 그 한 두 사역자는 번 아웃에 이르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모세의 아빠, 엄마, 누나, 그리고 바로의 딸이 필요하다. 

긍휼과 연민과 애정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 

나에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인가? 

 

[오늘의 기도]

생명의 주관자 되신 주님, 

저를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그 또한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움을 받도록 인도해주세요. 

저에게 사랑, 연민, 애정, 긍휼의 마음을 주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05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5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16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17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18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19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20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21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22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NIV

And because the midwives feared God, he gave them families of their own(21절).

 

강제노동 정책이 실패하자, 이집트 왕은 은밀히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립니다(15-16).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은 이집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17절).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강해집니다(20-21절). 마침내 바로는 이집트 백성에게 히브리 남자 아기를 강물에 던지도록 명령합니다(22절).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브아는, 바로의 명령이 절대적인 이집트 땅에서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17절). 하나님은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좋게 보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18-21절). 내 삶에 큰 영향력을 가진 권위자로부터 옳지 못한 요구를 받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반응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십브라와 부아로 대표되는 히브리 산파들은 당시 절대 권력인 바로 왕에게 끌려간다. 

바로 왕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본문에서는 두 명으로 보이긴 하나, 히브리 산파들이 두 명 뿐이지는 않았을 것. 

그들은 많은 히브리 산파들의 대표격이었을 것이다. 

산파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생명의 고귀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구분해서 죽이라는 명령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다. 

십브라와 부아는 경험많고 나이도 많고 그래서 대표격으로 거명된 분들일 것이다. 

그들의 인생 전체는 생명의 탄생에 기여하고 민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첫째 딸이 태어나던 그 산부인과 분만실에 들어갔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최선을 다해 아이를 배에서 꺼냈다. 

제왕절개 수술이라 그 자체로도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았다. 

아기가 나오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유난히 다리가 길었던 작은 생명체를 내 품에 꼭 안고 몇 시간 동안 있었다. 

아내가 회복실에서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3-4시간 정도 였나? 

생명의 신비가 그 시간 안에 집약적으로 다 담긴 듯 했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아기의 얼굴, 꼭 감은 눈, 꽉 다문 입, 붉은 볼… 작고 작은 소중한 생명체를 보면서…

 

생명을 실제 품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생명을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십브라와 부아는 바로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죽음 또한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시지만, 그렇다고 그분이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분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부족한 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생명의 실제를 많이 보지 않아서인 것은 아닐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못 만나봐서 그런 것은 아닌가?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실제로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그저 나의 욕망에 충실하고 욕구 충족에 온통 관심이 쏠려서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의 경험이 부족하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제한된다. 

 

하나님과 친밀하되 그분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 정치 지도자들이 많아지길 고대한다. 

그런 그리스도인 관리자들이 많아지길 고대한다. 

그런 그리스도인 목사, 선교사, 사역자가 많아지길 고대한다. 

 

그럼 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오늘의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생명을 품고 생명의 탄생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전도는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입니다. 

영적 탄생을 경험하게 하소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두려워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의 탄생은 주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되, 당신의 영광과 위엄과 신비 앞에 두려워하게 하소서. 

그렇게 무릎 꿇고 당신을 부르며, 당신의 영광에 압도되길 소망합니다. 

현실에 굴하지 않고, 당신을 바라보며, 미래로 투사하게 하소서. 

주님의 명령을 듣고, 주님의 명령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04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9 그 왕이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10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욱 불어날 것이고, 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떠나갈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몹시 싫어하였고,

13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이집트 사람들이,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

 

주석

비돔(11절). 이집트의 피(르) 아툼[Pi(r)-Atum], 곧 ‘아툼의 부동산’으로 밝혀졌다. 이 곳은 현재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약 97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본문에는 국고성을 건축하는 일이라고 나와 있지만, 이 곳이 곡물 저장소일 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국고성은 지역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중심지였으며 수도였을 수도 있다(IVP 배경주석).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왕은, 수가 많아진 이스라엘을 잠재적인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8-10절).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노동으로 억압합니다(11절). 그럼에도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 번성합니다(12절).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이집트 사람들의 적대감과 괴롭힘이 더욱 심해집니다(12-14절).

 

이스라엘의 번성을 억제하는 이집트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있습니다(12절).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냉혹한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해받지 않습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성취되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만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최종적 성취와 과정적 성취로 나룰 수 있겠다. 

구약 백성들에게 최종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이며, 

신약 백성들에게 최종적 성취는 예수님의 재림이다. 

그 과정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새 바로 왕은 지혜로운 왕이다. 

미래의 위협에 대해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대응한다. 

잠재적 위협의 최악을 상정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계획을 세운다. 

번성하여 인구가 많고, 나름 경제적 부를 소유했으며,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종족 전체를 억압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새 왕의 리더십과 그 주위 신하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바로 왕의 리더십과 정치력을 높게 산다. 

 

그러나 왕이 놓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언약(약속)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로의 머리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의 아들이자 신 그 자체로 떠받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와 정치력은 착각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권력이 자신을 신처럼 만들어 놨으니 그 자신도 어찌보면 피해자이다. 

왕의 리더십과 정치력은 포화된 극강 자의식, 즉 신화화된 자기애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자의식으로 둘러쌓여 있다. 

언제나 자기는 옳고 상대진영의 사람들은 틀리다. 

자신의 세력과 자신은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으면서 과도한 특혜를 받는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개나 돼지 급으로 여긴다. 

자신들은 통치자며 시민들은 피통치자이다. 

자신의 지지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한다. 항상 그런 사람들 사이에 살면, 어느새 자신은 하나님처럼 되고 만다.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죄악의 시작은 사단의 부추김이며 칭찬이며 유혹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핍박을 받는다. 

번성과 핍박이 동시에 찾아온다. 

자손의 수가 줄지 않는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에 충실한 종족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이한 번성에 기득권들은 위협을 느끼고 박해하기 시작한다. 

생육과 번성은 문화에 기반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것이 당연하며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문화 속에서는 출산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그 반대 문화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서구권과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문화다. 

이스라엘은 출산의 문화가 정착되고 장려되었다. 

아마 다른 기득권들은 그 정도의 출산 문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문화를 갖게 된 것도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그리고 그분의 축복 때문이다. 

기득권 층의 시기와 두려움이 극에 달하자, 결국 히브리 민족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기에 이른다. 

강제 노역을 통해 삶의 의지를 꺾는다. 

부부관계가 원활하지 않도록 막는다. 

출산 문화가 작동하지 않도록 제한하려고 한다. 

그렇게 히브리 민족은 핍박을 받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을 지키신다. 

핍박이 찾아오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그 강도가 점점 세진다. 

죽어나가는 젊은이들이 상당하다. 

고대의 건축 노동의 노동자들의 피의 산물이다. 

현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카타르의 월드컵 경기장은 동남아시아의 노동자의 공동묘지이기도하다. 

히브리 사람들이 일하다 죽는다.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한다. 쉬지 않고 일한다. 일이 점점 많아진다. 

사람은 쉬지 않으면 죽는다. 생명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치료받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 쉼과 회복이 충분하지 않으면 생명은 단축된다. 

평균 수명이 줄고, 젊은이들이 공사판에서 죽어나가면, 자연히 인구는 줄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을 지키셨다. 당신의 언약과 약속을 지키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한 공동체와 사람들을 지키신다. 

교회를 지키시고, 선교단체를 지키신다. 

선택한 가정들을 돌보신다. 

핍박과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우리가 희망과 소망을 버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분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신다. 

핍박으로부터의 탈출계획을 세우신다. 

그 위대한 출애굽의 서막이 시작된다. 

교회도 그렇고 선교단체고 그렇고 하나님의 희망의 이야기가 계속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용기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한 공동체와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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