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 16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사람을 대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1).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람의 외모나 옷차림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은, 사람을 차별하며 판단하는 것입니다(2-4).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십니다(5-7).


율법은 우리에게이웃 사랑 가르치며, 일부를 어긴다 해도 율법을 범한 것이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합니다(8-11).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랑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따릅니다(12-13). 요즘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외모나 경제적 형편, 정치적 성향 등으로 차별하거나 판단하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

차별 금지

 

1. 난해함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하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다. 

 

2. 차별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온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하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번째 이유도 적고 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빈자를 택해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한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수호에 적극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이다. 

어쩔 없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된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된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번째 이유도 있다. 

생각보다 치밀하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율법이 필요하고, 율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한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한다.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는다. 

그러니 율법은 포괄적(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는가? 율법도 그렇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다. 

 

 

3. 의미심장한 13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사실 13절의 의미는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율법의 종속 개념엔 심판이 있다. 율법이 있다면 심판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도 심판이 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도 율법이니 심판이 규정되어 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따르는 자유하게 하는 심판은 혹시자비 방점이 찍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13절이 의미심장하다. 

솔직히 야고보가 13절을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까? 

뭔가 깊은 의미가 숨겨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오늘 의미를 깨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니, 조금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다. 

 

 

——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치료하셨던 예수님, 

당신을 닮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4.16 이상하게 슬픕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확한 사고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의문이 많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신원, 원한을 풀어주세요. 

 

복음이 가져다 주는 자유의 율법이 곳곳에 적용되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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