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1. 

 

요한복음 16:5-15(새번역)

5. “그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서 아무도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고,

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8.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9.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10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11.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0. 들어가며 

- 성령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그 이유는?

 

4주동안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사는 법 시리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인데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오늘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려면 이 네가지의 방법을 장착해야 하는데요, 마지막인 성령의 도우심은 이 모든걸 가능케하는 힘이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the Helper, the Advocate)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께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변호하시고 대변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공간에 임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육체를 지니신 예수님은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계십니다. 3차원에 갇혀 계실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성령님은 3차원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모든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단어는 요한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께 사용한 단어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1서 2:1). 

 

여기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과 예수님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거죠. 14장 16절에 보니까 ‘다른 보혜사’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1 παράκλητος는 예수님이시고요. 또 다른 παράκλητος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럼 이 παράκλητος 돕는 분, 변호사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1.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보혜사(8-11절)

먼저 그분은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8절입니다.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무엇이 잘 못 되어 있는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세상을 대변하여 제자들을 고소하는 사단이라는 검사는 세상이 옳고 제자들은 그릇되었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변호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옆에서 변호하십니다. 어떻게 변호하실까요? 

사실 8-11절은 한번 읽어가지고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도 다각도로 연구하고 선배님들의 글을 읽고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으니까 그때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하더라구요. 시작해봅시다. 

 

1) 죄에 대해(9절)

첫째는 죄에 대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죄는 세상적인 표준과 이상, 즉 세상에 안전을 제공하는 것들에 반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인 안전망 전체를 의문시하고 또 다른 안전 장치를 열어 주는 계시로부터 자신을 차단하는 것, 그것이 진정 죄다”(Bultman). 

 

세상에서 말하는 죄는 불법적 죄와 윤리도덕적 죄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법률에 의거한 규정을 어길 때, 처벌을 받는 죄가 있겠죠. 그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지탄받게 되는 윤리도덕적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드러내는 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죄인데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겁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성이 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신뢰와 겸손, 예수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불신과 교만과 자기중심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이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이건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런 큰 윤리적 획을 그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세상은 교회 밖이고, 그 교회 밖 세상의 죄에 대해 성령님께서 정죄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은 아주 잘 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구역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으로 구분됩니다. 교회 밖이건 교회 안이건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세상입니다. 불신, 교만,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으면 그 사람이 교회안에 있건 밖에 있건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그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실 겁니다. 

 

2) 의에 대해(10절)

둘째, 변호사 성령님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한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그런데 논거가 좀 이상하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라니요? 이게 무슨 논리입니까? 저도 이 구절에서 한참 헤맸습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로마에 팔았습니다. 결국 유대 지역를 통치하던 5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못 박은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바로 부활과 승천이지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겁니다. 세상에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라고 말하고 다닐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 우편에 계십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이 증명하신 겁니다. 아버지께로 간 자가 의로운 겁니다. 모세가 의로운 거죠. 엘리야가 의로운 거죠. 그렇게 예수님이 의로운 겁니다. 

 

세상은 세상의 규정과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이죠.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람들 상호간의 생명과 복지를 향상 시키는 방향으로 의로움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의롭다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정을 받은 분이기때문이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의입니다. 

 

3) 심판에 대해(11절)

셋째로 심판에 대해서도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겁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예수님을 심판했습니다. 유죄 선고를 내린 거죠. 그러나 성령님은 확실히 알게 하실 겁니다.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세상이요, 그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이라는 사실입니다. 

 

=> 프레임짜기 

이렇게 변호사 성령님은 통념과 편견을 깨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재판을 만드십니다. 기존의 법정에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논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논리가 승리합니다. 세상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판을 다시 짭니다. 프레임을 재구축하는 거죠. 

 

평화 올림픽 vs 평양 올림픽

이런 것이 프레임입니다. 평창 올림픽 때, 남북 선수단의 공동입장을 두고 누구는 평화 올림픽이라고 했고, 누구는 평양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을 너무 많이 배려한다고 그건 평화가 아니고 평양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체제 선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프레임 싸움입니다. 

 

사진 프레임

셀카 찍을 때, 어떤 각도로 찍어야 얼짱이 나옵니까? 

세상의 윤리적 사법적 프레임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면 세상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으로 사태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2.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13-15절)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기도 하시지만, 더 나아가 진리로 이끄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1) 진리 되신 예수님께로(13절)

13절을 볼까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분도 예수님처럼 앵무새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자신 맘대로 말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듣는 말씀만 하십니다. 

 

요한은 지속적으로 진리에 대해 말합니다. 그건 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인격이신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ex) 신입생 홍보와 전도를 위해 캠퍼스에 달았던 현수막_”진리는 인격이다.”  

 

2) 예수님을 영광되게(14-15절)

결국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실 겁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죠.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4-15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성령님의 목표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개인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잘못된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조직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거짓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높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불의의 영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높아져야 합니다. 

 

베뢰아 김기동이 주장했던 성령은 거짓의 영입니다. 음란의 영입니다. 

홍대새교회를 지어 다윗도 범죄했지만 회개하니 하나님이 용서하셨더라라고 말하면서 뻔뻔히 목회를 하고 있는 전OO목사의 성령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성령님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길 원하십니다. 

그외는 그냥 그리스도의 제자일 뿐입니다. 예수의 증인일 뿐입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 어느어느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이런 종류의 설명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 중심으로 그분을 신뢰하면서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요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14:26) 

 

1)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심 

보혜사 성령님의 핵심 역할은 분명합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함께 지낼때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제대로 알게 됩니다. 육성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3년 동안 아무리 말로 가르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임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쉬프팅하고 관점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2) 신약 성경의 핵심 저자_성령님 

그런면에서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 성경의 주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하신 겁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장착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기록된 겁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작품인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 성령 충만이란? 

그럼 여러분 성령 충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논리에 따르면, 성령충만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분을 영광되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공명하고 행동이 공명하고 그분의 삶의 이미지가 공명하는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분이 영화롭게 된다면 자기 자신은 철저히 낮아져도 된다는 겸손한 상태가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4. 나가며 

- 자기중심성, 교만, 불신의 죄의 결과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교만하게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자신의 능력과 돈과 권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뉴스를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약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국가를 사유화하고 부정부패와 뇌물수수를 일삼는 권력자들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작년 3월 10일 헌법재판관들은 당시 최고 권력인 대통력 박근혜를 파면했습니다. 지금 들리는 뉴스에 따르면, 만약 헌법재판소의 결과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기각으로 나오면, 촛불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의혹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위수령을 발동해서 시민들을 진압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겁니다. 만약 그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제2의 518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성, 교만, 불신이 가져다 주는 악의 구조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구조를 떠받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교회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예수님은 이걸 깨고 성령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자기 중심성을 깨고, 교만을 깨고, 불신을 깨고, 예수 중심, 겸손, 신뢰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깨우치시고, 예수님께만 영광돌리기 원하시는 성령, 그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성경연구 방법이나 성경개론 같은 것을 함께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회] 

1. 성령님에 대해 혹시 편향된 생각이나 이미지로 그분을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과 성령님께 고백합시다.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 더 깊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2. 그분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이해를 깨우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함으로써 예수님만을 영광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할 문제]

1. 평소에 생각하던 성령님의 이미지와 오늘 설교에서 나눠진 성령님의 이미지와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2. 대한민국 법률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3. 보혜사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무엇인가요? 기존에 알고 있던 성령 하나님의 핵심 역활과 같은가요? 다른가요?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다른지 함께 나눠봅시다. 

 

4.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영역이 무엇입니까? 

 

5.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한 결단을 기도로 표현해봅시다. 

 

*** 참고 도서

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 IVP

존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IVP

 

 

2018. 02. 25. 

 

0. 들어가며 

1) 가장 친한 친구? 

-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절친의 이름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별설교에서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이렇게 4가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은 두번째인데요. 함께 머무는 교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말씀을 읽어봅시다. 

 

1. 비유로 말씀하시다

1) 참포도나무(1절), 포도나무(5절), 가지(2절), 열매(2절)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이사야5:7).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실패했습니다. 왕정국가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강력한 제국에게 망했구요. 남유다는 그보다 더 강력한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지금 로마에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분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과거 전통에 묶여 있는 성전중심의 유대교, 회당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 유대교를 따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진정한 성전이요. 안식일의 주인되신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가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 비유의 기능_유진 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라

- 비유의 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으라. 거하라. 라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확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는 사물과 개념을 이어줍니다. 비유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힘이 있습니다. 비유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유진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p. 38). 

 

- 고정관념을 깨는 비유 

이렇듯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의 딱딱히 굳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개념과 생각들을 마음속에 심어두십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로 여겼던 유대 사람들은 참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국가를 대체하는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랍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정도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발언입니다. 

 

- 비유의 현대화 

이 비유의 이미지가 우리 내면에 남아야 제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최상의 효과를 냈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현대 사회에 오셔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신다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까요? 

나는 와이파이요 너희는 핸드폰이니 너희가 내게 연결되어 있으면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단다. 

나는 스킵이요 너희는 스윕퍼니 내 말에 머물러라 그러면 하우스안에 들어올 것이니... 

나는 버스 운전자요 너희는 승객이니 내 안에 머물러라 도착지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니...

다양한 비유가 가능하겠지요. 여러분이 만들어보세요. 

 

2. 함께 머무는 교제 

1) 붙어 있으라(4절), 내 안에 머물러라(4-5절),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10절)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면 하나지만, 자세히 띁어보면 세 가지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붙어 있으라’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드러나는 표현이죠. 두번째는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거니와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머무는 것의 좀더 구체적 표현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무엇이 흘러갑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양분이 가지를 타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제자에게 전달되는 물과 양분은 바로 사랑이었던 겁니다. 

 

2) 계명을 지키는 삶(10절) 

여기서 요한은 한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게 10절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바로 머무는 것은 사랑하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상상으로만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내가 가지니까 그래 꼭 붙어 있어야지’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1차원적입니다. 

그분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만나는 것,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물게 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나무에 가지가 붙는 과정이죠. 그 다음에 그분의 사랑안에 머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며 그 농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안에 머물게 되는 두번째 단계의 핵심 동력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홀로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분께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이쯤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열매가 어떤 건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맞습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흘러 가지 끝에 열매로 맺힙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3. 교제의 시작_인격적 만남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의 첫번째 단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대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많고, 인격적인 만남이 뭔지도 모릅니다.

 

1) 비인격적 만남

우선 인격적인 만남의 반대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비인격적인 만남이겠죠. 

- 기계적 만남_알고리즘적 만남

기계적 만남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겁니다. 정해지는 대로, 프로그래밍 대로 반응하는 '쉬리'하고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이겠죠.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바둑을 두는 그래서 결국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일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만남, 기대되는 만남이지만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건 프로그래밍된 결과물과의 만남이니까요. 이 만남에서는 우연을 오류라고 부릅니다. 이 만남에서의 반응은 수많은 데이타와 알고리즘의 산출물일 뿐입니다. 기계적 만남의 대표격이 바로 무속신앙, 기복신앙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공을 들인만큼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 동물적 만남_본능에 충실한 만남

동물은 매우 본능적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교미하고 싶을 때 교미합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본능과 본능이 만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충돌을 피하려고 평행선을 달립니다. 나는 나의 과업이 있고 상대는 상대의 과업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꿈과 열정이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굳이 조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만났지만, 나에게 개입하는 걸 거부하는 만남을 동물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을 내 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으로 나를 조정할 의사는 없습니다. 내 본능, 내 욕구가 더 중요하니까요. 현대의 극단적 개인주의 신앙이 바로 동물적 만남입니다. 

 

- 위계적 만남_권위주의적 환경에서의 만남 

권위에 눌린 만남입니다. 북한 김정은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고대 왕정시대의 왕과의 만남입니다. 질문도 못합니다. 불평도 못합니다. 거절도 못합니다. 앞의 상대는 무서운 분입니다. 이분에게 찍히면 내 앞날이 깜깜합니다. 각 분야의 대부격인 사람들입니다. 연극계는 이윤택이라는 분이 오랫동안 성추행을 해 왔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너무 위대하시고 초월적인 분이라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대면해서 거부의사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슬금슬금 피할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오순절계통의 영적 카리스마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아니면 극단적 보수적인 교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2) 인격적 만남

- 지적, 감정적, 의지적 교류 

인격은 서로를 알아가고 정보를 나눕니다. 그 뿐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교류합니다. 교감이라고 하죠.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제자들을 알아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감정을 교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을 알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정도 우리가 느끼길 원하십니다. 더불어 그분은 어떤 뜻과 계획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뜻과 계획과 의지에 대해서도 존중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교류가 될때, 우리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질문, 불평,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인격적 만남에는 세 가지 권리가 함께 따라갑니다.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막고 질문을 못하는 만남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궁금하면 물어볼 수 있는 관계가 인격적 관계입니다. 비권위주의적 관계입니다. 좀더 세게 나가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도 인격적 관계에서는 가능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좀더 세게 나가볼까요. 때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은 거부 자체를 못하게 막는 분이 아닙니다. 정 하기 싫으면 안하겠다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강제하거나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잘 짜여진 기계에 불과합니다.

 

 

4. 나가며

1)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라. 

핵심은 이겁니다.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십시오. 참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으십시오. 그동안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다면 이제 인격적인 만남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성경을 다독했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제 3월이 시작됩니다. 청소년기를 마치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는 여러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건 한 번 설교를 듣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그분께 붙어봅시다. 그래서 그분안에 머물러 있어봅시다. 인격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행위가 아닌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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