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09일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3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1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15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16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18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1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The Message

Speaking to the people, he went on, “Take care! Protect yourself against the least bit of greed. Life is not defined by what you have, even when you have a lot.”(15절)

 

and I’ll say to myself, Self, you’ve done well! You’ve got it made and can now retire. Take it easy and have the time of your life!’(19절)

 

주석

21절.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는 없다. 부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가지는 진정한 부요를 얻는 데 실패하였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통해서 한 단계 더 나아감으로써 얻을 수 있다(33절). 따라서 부자는 어리석은 자 즉, 경건치 못하며 따라서 감각 없는 자였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이 사람은 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가져 왔을까? 

그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동안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생각할 때, 이런 질문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건가요? 

이스라엘의 독립은 언제인가요? 

로마의 멸망은 언제 어떻게 오나요? 

온 민족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때는 언제인가요?” 등등 

정말 질문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질문은 어디가고,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중재해 달라고 한다. 

예수님을 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싶다. 

예수님이 언젠가 탕자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순간이 오는데, 아마도 이 질문을 떠올리며 말씀하셨을 수도 있겠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후에 받을 유산을 미리 정산해서 달라고 요청했었다. 

탕자는 돈에 눈이 멀었다. 

그리고 오늘 질문한 사람도 돈이 삶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매우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형제가 주지 않고 있다. 

이 사람의 탐욕보다 유산을 나누지 않는 형제의 탐욕이 더 문제가 될 터이다. 

이런 유산의 불공정한 분배는 형제간의 미움을 낳고 결국 살인을 낳는다. 

 

돈과 하나님,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 

돈이 주인이 되면, 돈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돈이 주인이 되면, 가장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보다 돈의 출처가 더 무섭게 다가온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제일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분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돈을 사용해야 한다. 

돈이 주인이 아님을 내 스스로 각인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다. 

그 통치 자금도 주님께서 주신다. 

복음밥 캠프는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캠프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캠프는 계속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재정이 필요하다.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필요한 재정을 주시길. 

적자로 마무리 되지 않기를… 

 

 

[오늘의 기도]

주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에는 어쩔 수 없이 돈이 필요합니다. 

재정을 채워주시길 위해 기도합니다. 

헌신할 사람을 허락해주소서. 

함께 도와줄 교회를 연결시켜주소서. 

귀한 사역이 계속 즐겁게 진행되도록 

주님께서 일하여 주옵소서. 

사람을 붙여 주시고, 사역이 유지되도록 도와 주세요. 

제 힘으로는 한계를 느낍니다. 

필요한 돈을 허락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8월 08일 화요일

 

여는 기도

내가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1 그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2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 놓은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들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4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5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는다.7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다.

 

10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거슬러서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11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12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바로 그 시각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다.”

 

The Message

You can’t keep your true self hidden forever; before long you’ll be exposed. You can’t hide behind a religious mask forever; sooner or later the mask will slip and your true face will be known(2절).

 

And he pays even greater attention to you, down to the last detail—even numbering the hairs on your head! So don’t be intimidated by all this bully talk. You’re worth more than a million canaries(7절).

 

[오늘의 묵상]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서로 밟힐 지경에 도달했다. 

이정도면 위험하다. 

사람들은 분산시켜야 한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제자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뭔가 가르침을 주신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되질 않는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지 않도록 예수님 입장에서도 뭔가를 해야 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또한 저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음해하는 사람,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위선을 파악하고, 그들의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 운동의 허점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힘있게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제자들은 이제 공인이 되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빛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된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진짜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니다. 

권력자들이 아니다. 

오직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두려워하라”와 “두려워하지 말아라”가 동시에 쓰이고 있다. 

사람들이 많으면 사실은 두렵다. 

안전도 문제고, 언제 반대자가 등장할 수도 있고, 그들의 먹을 것을 챙겨야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사람들이 많으면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수 있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결국 제자들은 권력자 앞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해야 할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바로 ‘예수님을 시인’(8절)하는 말이다.

두려우면 원래 생각했던 말도 못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의 말을 하면 된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그분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시인한다. 

그것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이다(12절). 

그리고 평생 마음과 입에 달고 살아야 할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일에 두려워말자.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결국 그들을 살리는 말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여전히 두려움이 많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무엇인 맞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부르심은 무엇인가요? 

혹시 지금과 다른 길로 부르시는데 제가 못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주님,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제 삶의 결정을 주님과 더 깊은 대화 속에서 내리고 싶습니다. 

어떤 결정이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내리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9. 5. 김혁수

 

[본문_창세기 2:4-14_새번역]

4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5 하나님이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6땅에서 물이 솟아서, 땅을 적셨다.

7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0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에덴을 지나서는 줄기로 갈라져서 강을 이루었다. 11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땅을 돌아서 흘렀다. 12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구스  땅을 돌아서 흘렀다. 14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0. 들어가며 

- 극한직업

어제 우연히 TV 보다가 EBS1에서 방영하는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직업 세계의 방대함과 각각이 가지는 극한의 어려움 등을 보고 있으면, ‘세상엔 정말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새삼 느끼게 됩니다. 어제는 동물원의 사육사 분들의 작업을 다루었는데요, 200KG 넘는 사자를 건강검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 맹수들을 건강검진한다는 사실을 몰랐거니와 그저아프면 수의사가 와서 마취하고 치료하면 되는 아닌가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매년 여름이면 더위에 맥을 못추는 사자의 건강상태를 살피기 위해 건강검진을 실시합니다. 문제는 엑스레이며 각장 의료 장비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사자를 동물병원으로 이동시키는데요,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일단 마취를 시키고, 들것에 옮겨서, 철로 만든 이동장에 넣어, 용달 차에 싣고, 병원까지 이송합니다. 모든 것을 마취가 깨기 , 그러니까 1시간 만에 진행해야 하는데요, 사육사 20여명이 달라붙어서 일을 합니다. 긴장감, 긴박감이 장난 아닙니다. 검진 마지막 어간에 사자가 눈을 뜹니다. 너무 많은 마취 주사는 사자의 건강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일을 마쳐야 합니다. 맹수 옆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가슴이 떨리더라구요. 

 

사육사들은 사자를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 이렇게 매년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돌봄이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책임감 있게 생명을 돌보는 것에는 이렇게 많은 인력과 세심한 배려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돌봄은 습관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창의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오늘부터 9 동안 창조의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묵상의 방향은 창조세계를 돌보시는 하나님과 돌봄으로 초대받은 인간입니다. 오늘의 첫번째 입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볼까요? 

 

1. 질서의 창조자(4-6)

1) 무에서 유로, 혼돈에서 질서로 

오늘 본문을 보면, 창세기 1장과는 다른 그림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창세기 2장에서는 그분이 직접 흙이라는 재료로 사람을 빚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1장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상상 불가의 능력으로 빛부터 우주와 지구와 모든 동식물을 만드시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나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척박한 땅위에서 생명이 살아갈 있는 생명력 있는 지구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있습니다. 1장에서는 무에서 유의 창조가 눈에 띄지만, 2장에서는 혼란함과 혼돈에서 질서를 잡아가시면서 생명이 거할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시는 장면 눈에 띕니다. 대목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가 연구할 것이 정말 많은데요, 9 동안 숙고해 함께 숙고해 보면 좋겠어요. 

 

2) 질서를 위한 조건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의 질서를 잡아가실까요? 어떻게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세상을 보기 좋게 평화롭게 조화롭게 질서를 만들고 유지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마치 자녀와도 같은 대리 통치자, 대리 돌보미 세상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고, 지혜로운 존재를 세상에 두기로 것이죠. 하나님이 계속 아주 세밀한 영역까지 돌보고 통치하실 있지만, 그분 혼자서 하지 않으시고, 그분을 대행할 사람, 함께 다스릴 사람을 만들기로 것입니다.

 

2. 작품의 창조자(7-9) 

1) ,

이렇게 질서의 창조자되신 하나님이 작품의 창조자가 되시는데요.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며, 독창적인 예술품인 것은 사실이지만, 더욱 세밀하고 세심한 작품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7-9절을 보실까요? 

 

7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마른 땅에 물이 오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마른 땅이 이슬 혹은 안개로 축축해집니다. 토기장이들이 흙으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으려면 좋은 흙과 물이 필요합니다. 양질의 진흙이 필요하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 재료는 흙과 물이었습니다. 축축해진 흙으로 사람을 빚어가십니다. 섬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흙과 물은 흐트러지기 십상입니다. 물레 위에 진흙을 조그만 잘못 다루면 진흙이 뭉개져버립니다.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실제 하나님이 물레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정성을 다해 사람을 만들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2) 손길, 숨결

자신의 이미지를 닮은 사람을 흙으로 빚은 뒤에, 하나님은 전과는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충분히 그저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생명을 불어 넣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식물과 동물의 생명을 만들었듯이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만큼은 완전히 다르게 창조하십니다. 어떻게요? 그렇습니다.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이죠. 그분의 예술가적 손길도 대단하지만, 마지막이 그분의 숨결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 생명체, 생령

이렇게 진흙은 생명체가 됩니다. 단순한 생명체, 생물학적인 생명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머금은 생령 됩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숨결을 머금은 하나님은 예술 작품 바로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런 사람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의 중심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 인간의 탁월한 문명이나 문화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길과 숨결이 담긴 그릇 인간이기에 인간은 존엄합니다. 모든 생명이 고귀하지만, 인간에 고귀함에 비할 것은 아닙니다.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예술 작품으로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넘을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이런 인간의 고귀함, 하나님의 예술 작품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 없습니다. 폭력은 예술 작품을 망가뜨리고 깨뜨려서 다시 혼돈과 혼란으로 뒤돌아가게 만듭니다. 말의 폭력이든 물리적인 폭력이든 제어되지 않은 힘의 분출은 예술가이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반역 행위입니다. 

 

3. 통치의 창조자(10-11) 

1) 에덴의 위치와 역할 

질서의 창조자, 작품의 창조자되신 하나님은 통치의 창조자이시기도 합니다. 에덴 동산이 그걸 말해줍니다. 에덴 동산은 온갖 아름다운 예술품이 전시된 정원 아닙니다. 저희집 근처에 퍼스트가든이라는 가꾸어진 정원이 있습니다. 곳에는 꽃과 나무, 식물과 동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작은 놀이 시설까지 구비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오후 때를 보내기 좋습니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서 한번 같이 가도 좋을 같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퍼스트가든이잖아요. 에덴 동산이 떠오르더라구요. 에덴 동산이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즐거운 공간일 것이라는 상상은 그것만으로 행복하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히 여흥을 즐기는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있습니다. 왜일까요? 에덴동산은 왕의 정원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실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이, 질서의 기운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있습니다.

 

9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0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에덴을 지나서는 줄기로 갈라져서 강을 이루었다. 11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땅을 돌아서 흘렀다. 12 땅에서 나는 금은 질이 좋았다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와 같은 보석도 거기에서 나왔다.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구스  땅을 돌아서 흘렀다. 14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앗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다.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생명의 기운이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맛있는 열매의 나무가 동산에 가득합니다. 흙과 물이 양질이며 맛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어떻게 세상으로 퍼져가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하나가 에덴 동산을 휘돌아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나옵니다. 비손 강은 금밭을 휘감아 돌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장 값진 것들이 모여듭니다. 최상의 금과 최고의 보석들이 강을 따라 이동합니다. 에덴은 나무와 풀과 흙으로만 이뤄진 작은 공원이 아닙니다. 금과 보석과 당시의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세계 통치의 중심입니다. 

 

기혼 강은 구스 땅을 돌아서 흘렀는데요, 고대 세계의 지명은 때때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반영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적용하면,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구스는 노아의 손자로서 힘센 장사, 장수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참고, 창세기 10:6-10). 만약 그렇게 가정한다면 기혼 강은 군대 내지 노동력을 일으킬 있는 최선의 루트를 제공합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농경문화의 중심이었으며, 문명의 발달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개의 강을 통해 에덴은 동산이라기 보다는 세계 통치의 중심으로 최고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생명의 기운에 에덴에서 세상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강들을 통해 세상에 전파됩니다. 에덴은 세상 통치의 중심이 됩니다. 물류의 중심입니다. 사람과 생명과 물건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 바로 에덴입니다. 그러니 에덴은 놀이 동산이 아니라 왕의 정원이 되는 거죠. 세계 통치의 중심지입니다. 

 

2) 에스겔의 환상과 요한의 환상 

왕의 정원이 인간의 반역으로 기능을 상실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3 이후로 등장하는 내용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에덴에서의 통치를 회복시키십니다. 아니 멋진 에덴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에스겔 47 

1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2 그가 나를 데리고 북쪽 문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와, 담을 돌아서, 동쪽으로 문에 이르렀는데, 보니, 물이 동쪽 문의 오른쪽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다.

7내가 돌아올 때에는, 보니, 이미 강의 양쪽 언덕에 많은 나무가 있었다. 8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아라바로 내려갔다가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9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것이다.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가 에스겔은 낯선 이방땅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바로 회복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세상을 회복시키는 비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의 회복이요. 세상 통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요, 성전의 회복입니다. 

 

에스겔만 이런 환상을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2 

1천사는 ,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쓰입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요한이 마지막 환상 중에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물이 나와 강이 되어 세상으로 흐릅니다. 그곳에서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며,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사용됩니다. 이렇게 에덴 통치의 비전이 실현됩니다. 

 

3) 세계 통치/ 세계 돌봄

저는 세계 통치와 세계 돌봄이라는 단어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세계 통치는 세계 돌봄이라는 관점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통치라는 단어가 워낙에 오염이 많이 되었습니다. 통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세상의 권력자들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폭력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방향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예 제도를 정당화했습니다. 국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장 전쟁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통치가 폭력이 되는 역사가 인류의 역사입니다.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21세기 수많은 정보가 축적되어 있지만, 인류의 역사가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엄청나게 많은 양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여전히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는 점은 인류의 아이러니일 밖에 없습니다. 소말리아, 미얀마, 팔레스타인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까지전쟁은 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취약합니다. 무기가 없는 사람들은 노예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통치는 폭력이 아니라 돌봄이어야 합니다. 힘은 약한 존재를 돌볼 의미가 있습니다. 

 

=> 강과 돌봄 

그런면에서, 에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강은 세상을 돌보는 물입니다. 돌보기 위해 물이 흐르고, 교류가 일어나고, 물건이 사고 팔리는 겁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 치료와 회복이 일어나기 위해 물이 곳에서부터 나오고, 세상은 곳에 모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개의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지형지물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순히 에덴의 위치를 추적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돌보는 중심이 바로 에덴이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무너진 에덴의 기능은 결국 하나님께서 온전히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에덴의 기능보다 훨씬 멋지게 작동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어 주실 겁니다. 

 

4. 나가며_창조의 하나님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작품을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돌봄통치를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도 위대하지만, '유'에 질서와 작품과 돌봄의 기능까지 넣어서 만든신 것이 더욱 위대한 일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는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창조를 묵상하면 그분의 원대한 계획과 뜻을 이해할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관을 튜닝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분의 창조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창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번 , 창조의 하나님을 깊이 살피고 묵상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창조의 하나님을 불러 봅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되뇌여 봅시다. 일종의 촛점 기도가 되겠습니다. 단어를 되뇌이며 창조의 하나님의 그려봅시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질서, 작품, 통치를 창조해내실 하나님을 떠올려 봅시다. 

 

2.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합시다. 탈레반의 위협과 박해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더이상의 테러와 폭력, 살해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가 땅에 임하도록 같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새롭게 떠오른 질문은 무엇인가요? 

 

2. 세계 통치의 중심지로서 에덴 동산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의도가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2021. 6. 1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4:1-10]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야고보 의식의 흐름

시련의 하나님의 지혜로 인내하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특히 빈자들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무엇보다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하라. 

 

이런 일련의 메시지가 어떻게 도출 되었을지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던졌을까요? 당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 사실 공동체들은 그렇게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메가처치들이 즐비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가정교회들이 도시마다 형성되어 있었죠. 그런 교회들에게 야고보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는 기본적으로 회람되든지 아니면 필사본을 가지고 도시마다 전달되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저는 힌트가 오늘 본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싸움과 분쟁(1-3)

- 초대 교회 현실 

야고보는 기독 공동체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죠. 예수님을 본받아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사람들을 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렇게 예수의 제자들로 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 공동체에는 싸움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이며, 성령님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던 때의 교회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의 저술 연대가 대략 40-50년대고 ,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지 10-20 지난 시점의 교회 공동체는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가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 싸웠을까? 

어떤 종류의 싸움과 분쟁이었을까요? 아까 전에 우리는 야고보의 의식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 사회 계층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빈자와 부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고 이것인 때로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했을 겁니다. 또한 신학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도 구원에 있어서 충분하다는 입장과 믿음보다는 선한 행위에 방점이 있다는 구원의 방법론의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혀를 제어할 것을 야고보가 주문했던 것이죠. 이런 종류의 싸움과 분쟁과 갈등이 초대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 싸움의 본질 

야고보는 이런 싸움과 분쟁의 본질을 꿰뚫는 아주 인싸이트풀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읽어볼까요?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욕심입니다. 욕심이란 쾌락을 누리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욕심은 십계명의 탐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소유와 권리를 탐하는 마음입니다. 십계명 유일하게 마음의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번째 계명, 탐심입니다. 육심의 욕심이 기독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이런 탐심,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현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단순한 말싸움 정도로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라고 말씀해주셨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간구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간구가 이뤄지지 않을 , 자신의 쾌락과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 그들은 때로 살인도 서슴지 않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까지 들어 주실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육신의 욕심, 자기 쾌락을 위한 기도와 같은 기도조차 무조건 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2. 하나님께로(4-8) 

- 질투하시는 하나님

그럼 그런 욕신의 욕심을 제어하고 자신의 쾌락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간구하고 열망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야고보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욕심, 자기의 쾌락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분께 집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많이 닮았습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쓰던 단어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간음, 외도, 바람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 아세라, 바알 같은 신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없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오래된 하나님의 성품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의 인용구는 정확히 어떤 성경인지는 길이 없습니다. NIV에서는그가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이 강하게 시기한다이렇게 번역했는데, 그것보다는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불어 넣으신 각각의 영과 교제하기 위해 그리워하신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에는 좀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 가까이

그러니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야고보가 제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도 더욱 가까이 오실 겁니다. 죄인들이라도 하나님은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사람을 하나님을 보듬어 주십니다. 다만, 주인을 섬기겠다는, 명의 아내, 명의 남편, 명의 애인을 두겠다는 생각과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는 마음을 품는 , 바람을 피고, 외도를 하는 것을 악마에 비유하는 같습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겠지만, 곧바로 전략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전략을 쓰나요? 마음 전략을 쓰는 겁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네전략입니다. 여러분, 물론 현대 사회는 다원성의 사회며, 취존의 사회입니다. 좋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없느니라”(마태복음 6:24). 세상의 가장 강력한 신이 바로 돈의 , 풍요의 신인데, 돈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인으로 두고 섬길 없다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 전략은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무언가를 동시에 섬길 있다고 꼬득입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시고, 설득합니다. 

 

- 난점_분리주의? 

사실 지점에서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삶의 많은 부분에서 제약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갖지 않고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모두 속세를 벗어나서 산사람, 자연인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님 수도원을 짓고 우리 만의 격리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나요? 마치 아미쉬 공동체처럼 말입니다. 

 

성경이 그런 수도원적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보편적 공동체 상으로 두지도 않습니다. 왜냐구요? 초대 교회 공동체들이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여전히 남아 활동했습니다. 에베소, 고린도, 로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이런 지역들은 당시 최고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도시였습니다. 바울도 도시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단순히 분리주의자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마음을 품게 가능성이 높고, 그러니 마음 전략으로 다가오는 악마, 사단, 귀신을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교묘한 꾀임과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단으로서 돈을 벌고, 수단으로서 다른 여러 가지를 좋아합니다. 결코 수단이 목적이 되어 섬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돈과 재능과 에너지는 오로지 하나님께 드릴 예배요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겁니다. 

 

- 세상 속에서 마음 갖기

여러분은 마음을 가져다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마음이 아니라 오롯이 여러분의 재물과 은사와 에너지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돈이요, 재능이 돈이요, 외모가 돈이요, 건강이 돈이고, 에너지가 돈이요, 웃음이 돈입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자칫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곤 합니다. 그러니 돈을 섬기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존재를 교환가치를 높게 쳐주는 시장에 진열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 재능, 에너지를 아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돈에게 예배합니까? 하나님께 예배합니까? 

 

 

3. 순결을 향해(9-10)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버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있을까요? 야고보는 이외의 제안을 합니다. 보실까요?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는 데에, 가지를 제안합니다. 

 

- 울라

첫째는 우십시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울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고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지 못해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는 공동체를 바라보며, 야고보는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구약에서 자신의 죄를 인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털썩 주저 앉아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왕이 그러기고 했고, 선지자들이 그러기도 했죠. 예수님은 옷을 찢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죄로 신음하는 모습에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죠. 야고보는 이런 감정적 반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야고보 자신도 당시 기독 공동체가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 마음을 품으며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행동했을지 예상이 됩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고보도 울었을 겁니다. 슬퍼하며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아니 싫었습니다. 야고보서를 설교하는 것이 점점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문학 장르가 등장하잖아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묵상하고 상상하고 이야기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그래서 좋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줄기차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진술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무슨 법률 같고 회사의 규정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왠지 그러다 보니 마음이 딱딱해지고, 연구하고 싶지 않고, 말씀을 준비하고 싶지 않고, 자꾸 다른 것에 눈이 돌아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9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야고보가 지금 울고 있구나. 야고보가 몇날 며칠 애통해하며 고통 속에 있구나. 피상적인 웃음과 현실 도피의 즐거움, 기쁨을 버리고 근심과 슬픔으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저를 깊이 돌아보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저의 불성실함,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 말씀에 깊이 천착하지 못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꿈에서 저의 죄가 보였습니다. 하나님 보다 다른 것으로 기쁨을 찾으려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슬펐습니다. 설교자로서 목사로서 깊이 말씀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애통하는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찬양하다가 혹은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의 죄와 부족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우리 공동체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소망 때문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것도보다는 저와 공동체의 현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로 눈물이 말랐습니다. 온라인 예배는 이상하게 사람의 정서를 터치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어려워 보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정서를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쁨이든 애통이든간에 우리는 찬양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정적 존재입니다. 감정은 우리 내면 깊은 곳의 갈망과 바램을 드러나게 줍니다. 이게 원활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예배가 이런 감정이 풍부하게 표현되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낮추라

순결한 마음 마음이 되기 위한 야고보의 번째 제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겁니다. 스스로 높아졌던 마음을 낮추어 그분께 나아오는 겁니다. 이것은 번째 제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높였던 마음, 높아진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가면들, 위선들, 연기들을 포기하는 겁니다. 거짓된 웃음, 경직된 눈빛, 반응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 깊은 내면의 감정을 들키지 않겠다는 딱딱한 몸짓,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투와 손사래이런 자신 만의 속에서 살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겁니다. 그분께 자신의 과오와 실수와 부족함과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그분께 우리의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리고 때로는 무릎을 꿇는 겁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마음이 아닌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다시 시작하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왜냐구요, 그분은 우리가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거든요. 

 

4. 순결한 공동체

- 산상수훈의 초대 교회 적용 버전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초대교회 적용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정말 이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상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현실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분쟁, 약자에 대한 차별, 욕심과 욕망에 치우친 기도들야고보는 이를 치료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야고보가 21세기 한국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분은 여전히 비슷한 아니 그때보다 심한 기독 공동체를 보며 아연실색하며 눈물로 몇날 며칠을 지냈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순결한 공동체가 되기를 요청하셨을 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롯이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공동체가 되길 요구하셨을 겁니다. 자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돈과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야고보는 오직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애통하기를 그리고 더욱 겸손해 지기를 우리에게 요청했을 겁니다. 

 

- 송청 예배 적용 버전

저는 부작용이 염려되지만 그래도 좀더 구체적으로 특히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예배 시간을 지킵시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마음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은 시간 사용으로 드러납니다. 

2) 찬양 시간에 우리의 감정을 충분히 드러냅시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찬양과 기도에 드러나야 합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때로는 애통함도 표현합시다. 찬양인도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표현되도록 노래로 혹은 멘트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에 그치지 않도록 합시다. 최대한 집중해서 나의 마음을 표현합시다. 

3) 설교를 들을 , 적극적으로 리액션합시다. 하나님께 리액션하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안되면 이해가 안된다고, 납득이 되면 납득이 되었다고,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있다고, 감동이 있으면 감동이 있다고, 마음이 무감각하다면 무감각하다고그렇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리액션하는 겁니다. 설교 중간에 해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설교를 듣고 나서 함께 기도 , 그때 더욱 집중해서 우리의 리액션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순결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 이런 몇가지 실천 사항은 아주 작은 요소일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될까봐 부작용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책감이 아니라 소망으로 전환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그리고 야고보가 전한 순결한 공동체에 대한 비전과 이상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상과 비전을 향해 함께 가자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5. 나가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싸우고 분열되는 초대 교회 현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나뉘어져서 육신의 욕망과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로 밤잠을 설칩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씁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세요. 마음을 품지 마세요. 마음을 품게 만드는 악마를 대적하세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세요. 그게 안된다면 나처럼 울면서 애통해 하면서 슬퍼하세요.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야고보의 메시지는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송청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메시지를 다시 우리 마음에 새기고 음미해서 정말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순결한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혹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충분히 타협하면서 살아갈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2. 우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드려지길 위해 기도합시다. 찬양, 기도, 말씀 속에서 더욱 우리의 정서와 마음이 표현되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길 위해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나요? 때의 심정을 나눠주세요.   

 

2. 예배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마음의 중심을 드리기 위해 나의 예배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부분인가요? 어떻게 변화되길 원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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