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톤을 완주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네거티브 스플릿으로 처음보다 나중에 속도가 더 빨라지는 주법이다. 그에 반대되는 포지티브 스플릿은 처음에 빨리 달리고 점점 속도를 늦추는 방식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네거티브 스플릿을 사용하라고 하지만 초보자들은 나중에 빨라진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처음부터 오버페이스를 시전하고 만다. 내 경험이 말해준다. 책도 처음엔 너무 재밌고 몰입되어 쪽 빨려들다가도 후반부에 가서는 힘이 다 빠지고 흥미와 긴장감이 사라져서 겨우겨우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책과는 달리, 김혜령님의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는 네거티브 스필릿이다. 갈수록 집중하게 만든다. 마지막 챕터에는 마치 내가 나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이라서 더욱 몰입된다.
김혜령님은 이 책에서 치매(인지저하증)을 앓고 계신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 때로는 부끄럽기도,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한 감정을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그 이면에 어떤 관습과 생각과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지 끄집어 낸다. 저자는 인간의 죽음에 천착하는 하이데거보다는 죽기까지 살아있는 존재에 집중하는 폴 리쾨르로부터 용기를 얻는다(p. 15). 치매환자가 기억을 잃어가면서 겪게되는 사소한 일상을 포착한다. 배회하는 모습,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으로 외출하는 모습,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중에도 남아 있는 습관, 케어 센터에서의 모습, 바지에 대소변을 지리는 모습, 이런 모습 속에서 저자는 삶의 의미와 신학의 의미를 찾아간다. 특히 7장 '돌보는 자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변하지 않는 전지전능한 분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을 바꾸시는 분으로 그려낸다. 마지막 장은 만약 자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자신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해 딸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 책은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의 해석학”이라는 부제에서 밝히듯이, 점점 쇠약해지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돌봐야 하는지 깨우침을 준다. 남들에게 해가 될까봐 혹은 부끄러워서 약해진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과 욕구를 무시하면 안될 일이다. 인간의 존엄은 그 기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 담겨있다. 어린아이건 장애인이건 정신질환자건 치매환자건 예외가 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시와 경멸과 부끄러움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신학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혜령님은 이렇게 쓰고 있다. “변화 가능성과 취약성, 그리고 상호 관계성에서 다시 쓰는 현대 신학의 존재론과 신론 위에서 치매 환자의 존재는 더 이상 저주받거나 열등한 존재로 해석될 수 없다.”(p. 151)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그 때까지 살아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존엄하며 심지어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8장 “똥의 신학”에서 밝히듯이, 우리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만든 것인지 재고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혐오스러운가? 도리어 존재의 수동성으로 인해 수많은 접촉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던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사람들의 발과 눈과 몸을 접촉해주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강력히 임했다. 접촉을 잃은 현대인들의 허무함은 무엇을 채울 수 있는가?
혜령님은 모든 신학자들이 골머리를 썩는 “고통의 문제”를 대면한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고통과 고난을 허용하시는가? 욥의 경우처럼 시험하시기 위해? 고난을 극복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아님 통속적으로 말해지듯 잘못에 대해 벌을 주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제대로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헤령님은 이렇게 적는다. “…기독교는 고통을 함께 나눠지고 고통을 멈추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삶의 종교라는 생각…”(pp. 207-8). 고통의 원인을 찾기에 혈안이 되기보다, 예수님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함으로 그 고통을 경감시키며 삶의 의미를 함께 찾아가도록 돕는 일에 집중하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면에서 기독교는 정치적일 수 밖에 없고, 정책 결정에 있어서 약자를 더욱 고려해야 한다.
이 책은 약한 사람들 혹은 약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을 새롭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설득력 때문에, 나도 이런 경로를 통해 저자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만, 성경의 문자와 교회의 교리에 천착하는 보수적인 신학을 너무 쉽게 옆으로 제쳐 두는 것은 아쉽다. 성경의 문자와 교회의 교리가 없고서는 현대 신학이 현재의 모습을 가질 수 없다. 반복학습이 없이는 새로운 창조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과 교리의 반복학습이 없이는 '사랑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통속적 '사랑' 이데올로기의 반복적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의 문자와 교회의 교리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늘 새롭게 일깨우는 창조적인 언어 작업”(p. 17)이 과연 불가능한가?
작은 아쉬움이 있지만, 이 책은 실로 유익하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실제적으로 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처음도 매력적이지만, 가면 갈수록 더욱 깊이가 더해지고, 마지막에는 마음을 울리는 감정적 접촉이 일어난다. 나도 내 딸에게 이 글을 보여주면서 내 삶의 끝을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진다. 멋진 레이스를 달려준 헤령님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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