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8.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10:25-37]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27그가 대답하였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28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것이다.”

29그런데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마침 어떤 제사장이 길로 내려가다가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이와 같이레위 사람도 곳에 이르러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가까이 가서,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다음 , 그는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하였다. 36너는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설교]

0. 들어가며 

- 인격적으로 가르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은 예수님의 가르침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적으로, 인격적으로, 통합적으로 가르치시는 분임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성육신적으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유로 말하시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성육신적임을 확인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인격적으로 가르치시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함께 읽어 볼까요? 

 

1. 적의를 가진 자와의 소통 

- 시험하다(25)

오늘 등장하는 율법학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진리를 갈구하는 정직한 질문자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서 예수님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늦게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요한복음 3:4)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5-16)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은 진실한 질문자에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답변해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을 소문으로 들은 오늘 본문의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있을까요?”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과 전세계 통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속국 신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어 전세계를 호령하는 유대제국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일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로부터 일어난다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는 자기를 믿어야 영생, 영원한 삶을 얻을 있다고 말하는 촌뜨기 선생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겁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율법학자임을 알고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나요?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읽고 있나요?” 

그러자 율법학자는 대답을 하는데요, 같으면아니 생각이 중요한 아니고 선생님의 생각이 듣고 싶은 겁니다이렇게 예수님을 강하게 압박했을 같은데, 그는 생각보다 허영심이 강한 율법 선생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해 절대 그냥 흘려 보내지 않습니다. 항상 그는 대답하는 위치에 있었거든요. 

 

27그가 대답하였다.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말이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고 당황하게 의도를 가진, 그러니까 적의를 가진 똑똑한 지도자의 질문을 그냥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 자기를 옳게 보이다(29) 

뿐이 아닙니다. 율법학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29절입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인정을 받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의 관심을 받고 있는 당시 슈퍼스타 예수님보다 자신이 훨씬 옳고 대단한 선생이라는 사실을 뽐내고자 다음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의 질문의 태도는 여전히 진정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율법학자의 이웃은 동료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벗어난 다른 인종과 민족은 그의 이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상하게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죄인들과 이방인들과도 식사를 같이 하는 , 당시 평범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는 도리어 예수님을 가르치고 싶었을 겁니다. 일단 질문을 던지고, 만약 예수님이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줄줄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는 비유를 들어 그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게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내용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게요.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좋은 태도가 아닌 율법학자 아니 적대적이고 위선적인 율법학자와도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뿐만 아니라 매우 적절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클라스입니다. 저라면 벌써 손절하고 쌩까고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아님 기적을 보여줌으로써 꼼짝달싹할 없을 정도로 기겁하게 해서 신적 권위에 놀라 무릎꿇고 싹싹 빌게 만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적의를 가진 자들과도 진실하게 대화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인격적이라는 말의 번째 의미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과의 수평적 소통, 수평적 대화입니다. 반대자들과도 이렇게 수평적으로 대화하신다면 옹호자나 중립적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욱 수평적으로 대화하시겠습니까? 

 

=> 반대자와의 수평적 대화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칠 , 모든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나를 신뢰하면서 경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때로는 나를 반대하기 위해, 약점을 찾기 위해, 비평하고 비난하기 위해 말을 기록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때로는 짓궂은 질문이나 나를 무시하는 질문들을 마구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화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질문에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적절한 화법을 구사하기 위해 중심을 잡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자와도 수평적 대화, 수평적 소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적 가르침을 본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 공감되는 설명

그럼 이제 인격적 가르침의 번째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공감되는 설명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는 자체로 너무 유명해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비유가 얼마나 율법학자에게 얼마나 공감되는 상황 셋팅이었는지에 집중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여행

먼저, 비유는 예루살렘으로 왕복 여행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도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매년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일종의 의무였습니다. 그들에게 여행은 영적 여정에 아주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고무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여행중이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누가복음 9:5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도 종종 예루살렘을 왔다갔다 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주 아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혼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상황을 비유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공감대 형성에 진심이셨습니다.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고 계셨고, 그걸 비유의 모티브로 사용하십니다. 율법학자도 충분히 공감가는 내용이었고, 당시 이야기를 듣는 모든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어떤 영에 속해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인자가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여 함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누가복음 9:52-56)

 

예수님이 오시면서 겪었던 일화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미리 사람을 보내 숙박 시설을 잡고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좋은 분으로 이미 소문이 많이 났었습니다.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복음 4) 이후에 예수님은 제법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소리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환심을 끌고 싶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사마리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았나요? 그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니까 그런겁니다. 정통 유대인으로 낙인을 찍은 것이지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의 오랜 갈등과 혐오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황을 오늘 본문의 율법학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감가는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사마리아인 

게다가 율법학자에게 제사장, 레위사람은 너무나 친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항상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존경하고 존중했습니다. 율법 준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중심 유대교를 유지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일반적인 행동 패턴도 쉽게 이해를 있었습니다. 홀로 여행하는 중에 강도 만나 죽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때마다 시체를 만지거나 거둘 없었습니다. 율법에서는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어 제사의 직분을 감당할 없게 됩니다. 그들의 밥벌이가 위협을 당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가 싫어서 죽은 보이는 사람을 멀찌감치 피해서 다닙니다. 봐도 못본척 그렇게 지나갑니다. 그걸 율법학자는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 공감대 형성

이렇듯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쉽게 이해할 있는 상황을 비유로 풀어가십니다. 탁월하게 공감대를 만들어 가신 겁니다. 공감대 형성의 대가이십니다. 아마 사마리안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예수도 정확히 알고 있구만. 나의 이웃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지, 그들이 종교적 의무를 행하기 위해 어쩔 없이 하는 행동에 대해 이해해주는 ,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야.”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듯 율법학자의 기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십니다. 공감대를 극대화하는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적으로 가르친다는 번째 의미입니다. 수평적 소통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함으로 가르침의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상대방을 나의 경험으로 끌고 들여오기 위해 억지로 끌어 당기기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십니다. 

 

3. 포기하지 않는 기준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다가간다고 해서 그분의 기준이 무너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를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적 가르침의 번째 의미입니다. 

 

- 그대로 행하여라(28)

28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해주시면서, 동시에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대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순간에 하나님을 몰라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같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굳이 시험하면서 곤경에 빠뜨리려는 이런 비열한 행동과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가 왔습니다. 그가 아는대로 행동할 때가 왔습니다.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37)  

37절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여주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람을 도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사마리아 사람들이든, 죽음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물어본 사람이 이웃의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면 이것은 위선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 소통과 기준

이렇듯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웃의 바운더리를 자기 가족, 친족,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이렇듯 원대합니다. 수평적으로 대화하여 소통하고, 상대방의 상황에 공감하며 설명한다고 해서, 기준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지식과 행위에 있어 높은 기준을 유지합니다. 결국엔 그걸 가르치시는 것이지요. 

 

4. 나가며_인격적으로 가르치기 

- 소통과 공감 그리고 기준

인격적 가르침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풀어낼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저는 적의에 반대자와의 수평적인 소통과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공감되는 설명, 그리고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기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때로 우리가 삐딱하게 반응하고 그분의 생각과 뜻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와의 수평적인 대화와 소통을 멈추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황을 너무나 아시기 때문에 종종 우리의 경험 속에서 배울 있는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하늘에 글씨를 써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온전함에 대한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에 대해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가르침의 태도를 배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위에 차이가 생길수록 수평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힘듭니다. 서로에게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험의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기준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기준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배우고 가르치는 존재들입니다. 당장은 배우는 것에 시간이 많이 할애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치게 됩니다. 떠올립시다. 수평적 소통과 공감적 설명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기준을 가진 인격적 가르침의 태도를 끝까지 붙들겠다고 말입니다. 유치부, 아동부, 그리고 중고등부 선생님들은 사실을 잊지 말고 교회에서 실천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우리와 다정하게 수평적으로 대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고 공감하시면서 설명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가지고 있는 높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준은 여전히 자리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인격적 가르침에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사실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읍시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2. 때로 우리는 자기 한계에 갇혀 위대한 선생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그저 내가 설정해 놓은 바운더리,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서 넓은 마음으로 자라나도록 많은 사람을 품을 있는  데까지 나아갈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적의에 반대자와 대화하고 소통할 ,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나요?        

 

2. 성경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중고생들을 인격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 어떤 컨텐츠, 어떤 기술들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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