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12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하나님,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2 악한 자와 속이는 자가 일제히, 나를 보고 입을 열고, 혀를 놀려서 거짓말로 나를 비난합니다.

3 미움으로 가득 찬 말을 나에게 퍼붓고, 이유도 없이 나를 맹렬하게 공격합니다.

4 나는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건만, 그들은 나를 고발합니다.

5 그들은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습니다.

6 "그러므로 악인을 시켜, 그와 맞서게 하십시오. 고소인이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고발하게 하십시오.

7 그가 재판을 받을 때에, 유죄 판결을 받게 하십시오. 그가 하는 기도는 죄가 되게 하십시오.

8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9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10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

11 빚쟁이가 그 재산을 모두 가져가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재산을 모두 약탈하게 하십시오.

12 그에게 사랑을 베풀 사람이 없게 하시고, 그 고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자도 없게 하십시오.

13 자손도 끊어지고,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이름까지도 지워지게 하십시오.

14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주님이 기억하시고, 그의 어머니가 지은 죄도 지워지지 않게 하십시오.

15 그들의 죄가 늘 주님에게 거슬리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잊게 하여 주십시오.

16 이것은 그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도리어 가난하고 빈곤한 자를 괴롭히며, 마음이 상한 자를 못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저주가 그에게 내리게 하십시오. 축복하기를 싫어하였으니, 복이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십시오.

18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였으니, 그 저주가 물처럼 그의 뱃속까지 스며들고, 기름처럼 그 뱃속에까지 배어들게 하십시오.

19 그 저주가 그에게는 언제나, 입은 옷과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십시오."

20 주님, 나를 고발하는 자와, 나에게 이런 악담을 퍼붓는 자들이 오히려 그런 저주를 받게 해주십시오.

 

ESV

For he did not remember to show kindness, but pursued the poor and needy and the brokenhearted, to put them to death(16절).

 

주석

저주(6-15절) 죄의 심각성에 비례하여 심판해야 하나님의 정의가 성립되므로, 시편 기자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적절한 저주를 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 저주시 

시인에겐 찬양과 간구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찬양만 해야 한다거나 간구만 해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는 찬양을 하면서 간구를 한다. 

찬양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찬양 중에 마음의 소원과 억울함이 묻어 나온다. 

시인은 참 억울하다. 

그는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축복하며 기도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인을 고발하고, 비난하고, 죽자고 달려든다. 

시인은 배신감을 느낀다. 

사랑과 축복의 기도에 대한 반응이 이런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5 그들은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건만,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 앞에서 시인은 절망한다. 

찬양이 막힌다. 

찬양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찬양 속 간구는 저주가 되어 버렸다. 

이 시는 저주시에 해당한다. 

악인과 속이는 자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배신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저주로 표출된다. 

 

사실 저주시를 읽으면 불편하다. 

이렇게까지 상대를 저주하는 것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 

신세를 정확히 아뢰고 상대의 죄에 대한 고발하는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가족과 자녀들까지 언급하면서 저주를 퍼붓는 것, 

그 저주를 들어 주시기를 강청하는 것이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으셨을 때, 어떤 감정과 생각을 갖게 될지 상상이 잘 안간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라고 하실지, ‘그래 니 말이 맞다. 내가 손 좀 봐 줄게’ 하실지… 

 

물론 시인은 그들의 죄에 대해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16 이것은 그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도리어 가난하고 빈곤한 자를 괴롭히며, 마음이 상한 자를 못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가난하고 빈곤한 자를 괴롭히고 있다. 

마음이 상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모살게 하고 있다. 

시인인 철저히 약자의 편에 서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저주의 기도를 끊을 수 없다. 

찬양과 저주가 한 성대에서 울린다. 

 

그들의 죄악을 보면서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하다. 

시인이 악인이 하는 저주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살펴보자.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저주가 그에게 내리게 하십시오. 축복하기를 싫어하였으니, 복이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십시오.

18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였으니, 그 저주가 물처럼 그의 뱃속까지 스며들고, 기름처럼 그 뱃속에까지 배어들게 하십시오.

19 그 저주가 그에게는 언제나, 입은 옷과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십시오."

 

시인은 악인이 저주하는 그 저주가 악인에게 도로 돌아가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저주가 저주를 쏟아부은 사람에게 돌아간다면, 시인 자신의 저주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 

상대는 저렇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데, 착한 아이 컴플렉스로 욕이나 저주를 내뱉지 않는다면 속터져서 죽을 일이다. 

그래서 저주시는 지극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허용이다. 

인간됨을 지켜주는 힘은 솔직함에 있다. 

자신의 감정을 속여서는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욕지기가 나오는데, 억지로 참을 수 있나!!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면 참을 수 있겠지만, 인간적인 감정이야 벌써 쌍욕이 여러 번 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을 가지고 있다. 

모두에게 착하게 대하고 싶고, 모두에게 착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다. 

그러다보니 정작 요구해야 할 때, 요청해야 할 때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게다가 시인처럼 욕해야 하고, 저주해야 하는 순간에도 참고 벙어리가 된다. 

아마 그래서 오늘 시인의 저주에 대해 반발하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저주하면서 저주하는 사람을 욕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성경에 이런 저주시가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저주시를 허용하신다고 믿을 때, 결국 나를 조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저주의 욕을 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 찬양과 함께 억울함과 고통을 토로할 일이다. 

 

끝나지 않는 일들과 싸운다. 

소통은 끝이 없다.

회의도 끝이 없다. 

나에겐 자기만의 공간이 너무 중요하다. 

비밀의 공간과 시간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수많은 소통과 회의는 평범함의 블랙홀로 이끈다. 

난 평범해지기 싫다. 

그렇다고 유아독존이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 중간 어디선가 내 존재의 빛을 계속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월요일을 기다리기가 지랄맞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무엇보다 주님과 더 깊은 교제로 나가는 일을 하고 싶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잠시 뒤로 미루고, 하나님과 더 깊은 소통으로 들어가고 싶다. 

바쁘다는 핑계로 본질에 게으르지 말자. 

 

 

[오늘의 기도]

모들 요일의 주인되신 하나님, 

일요일만 주님의 날이 아닙니다.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며, 주님은 모든 날에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저의 모든 감정을 주님께 쏟아 붓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의 마음을 아십니다. 

평범하기를 거부하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더욱 특별해지고 싶습니다. 

월요일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특별해질 수 있는 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말에 잘 놀고, 월요일부터 열심히 일합니다. 

저는 주말에 공동체를 섬기고, 월요일에는 주님 안에서 안식하고 싶습니다. 

그 특별함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