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4월 27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2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알아보십시오.

13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서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14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15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NIV

Now we ask you, brothers and sisters, to acknowledge those who work hard among you, who care for you in the Lord and who admonish you(12절).

 

주석

14절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을 지칭할 수 있으며, ‘마음이 약한’ 사람은 슬퍼하고 맥이 빠진 사람들로 보인다. ‘힘이 없는’ 자는 역경이나 유혹의 공격을 받아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공동체 안팎의 관계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에게 가져야 할 태도로써 존경과 화목을 권고합니다(12-13절). 그리고 교회 안에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며(14절), 교회 밖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에 힘쓰라고 요청합니다(15절).

 

바울은 ‘형제자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할 것을 부탁합니다. 특별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교인 모두에게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고 지도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내하며 사랑으로 섬길 때,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로 세워집니다.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영적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1.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바울은 성도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 존경, 화목으로 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전에 살펴야 할 것은 어떤 교회 지도자들인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성도들 가운데서 수고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도들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사람들이다. 

핵심은 이들이 수고한다는 점이다. 

지도하고 훈계하는 것도 수고로움이겠지만, 그보다도 더 많은 섬김으로 수고하기에 지도자라고 불린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을 섬기러 왔으며, 그 본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삶을 사셨다. 

지도자는 권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 

 

마가복음 10:43-45_43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이런 지도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온당한가? 

바울은 사랑으로 대하라고 한다. 그리고 극진히 존경하라고 한다. 

더불어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한다. 

권위가 무너진 세상에서 교회 지도자들과 사랑으로, 존경으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세 가지 단어 중에, “극진히 존경”이라는 표현은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상호 존중이라는 단어가 더 와닿는다. 

극진히 존경은 폐기되어야 할 어구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무비판적으로 존경을 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이단과 사이비가 판 치는 세상에서 지도자라고 해서 무조건 내가 가진 보석을 건네는 것은 옳지 않다.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해 보고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한 뒤에, 그 지도자가 수고하는 섬김의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실하고 신실하게 지도하고 훈계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극진한 존경”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존경은 위험한 요소가 분명히 있다. 

사람이란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에, 타락할 수 있기에, 지도자를 위해 극진한 존경보다는 안전한 존경이 어떨까 싶다. 

안전한 존경은 지도력의 범위와 한계를 함께 인정하고 그 한계와 범위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우에는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되, 그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는 경우에는 분명히 주의와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가 미리 정해 놓은 것이 필요하다. 

 

존경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랑일 거다. 

지도자도 약점이 있을 수 있다. 

약점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반응해 주어야 한다. 

부족함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는 훈계와 치리와 용서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연약함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품고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더 크고 품이 넓은 나무가 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도자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도와 지도자들 사이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2.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오늘 말씀 중에는 이 말이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 

참을 만한 사람에게 오래 참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는 것은 하기 싫은 것 중 하나다. 

마음의 약하거나 힘이 없는 사람은 그나마 참을 수 있겠다. 

하지만,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오래 참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래 참으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바울은 마가에 대해 오래 참지는 못했던 전력이 있다. 

선교단 활동 도중에 팀을 이탈했던 젊은 마가에 대해, 그 다음 선교 여행 때는 배제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자신의 신앙의 멘토격이었던 바나바와 싸우고 결별하게 된다. 

바울도 이 점이 약점이었던 걸로 보인다. 

완벽주의적 관점에서는 이런 약점이 있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로 말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바울도 약점이 있는 사람이다. 

추후에 마가와 서로 화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바울은 노력형이요 성장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듣는 것이 좋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는 것은 성도들의 덕목이다. 

특히 약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사이 나는 마음에 힘이 빠져 있다. 

간사 수련회 이후에 감기와 위장 장애로 몸에 힘이 없다. 

의욕도 감소했다. 

할 일은 많은데 덕지덕지 마음에 쌓여 있는 것들이 참 많다. 

기도의 깊이도 현저히 떨어졌다. 

글을 쓰는 것도 기도의 일환이겠으나, 묵상글과는 다른 깊은 기도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다만 시간과 힘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과연 내가 다 담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이기적이게도 하나님께 나를 인내해 달라고 요청하고자 한다. 

마음의 힘이 없고 약하니, 주님께서 참고 인내해 주십사 부탁드리려고 한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힘을 경험하고 싶다. 

내 의지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오는 힘을 공급받고 싶다. 

 

시편이 그립다. 

이번 시심은 다 좋은데, 시편이 없다는 것이 때로 아쉽다. 

시편을 통해 내 감정을 토로하고 싶다. 

다윗을 따라 그의 감정을 따라 나도 하나님께 내 감정을 토해내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시는 그분께,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뢴다. 

 

오늘은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의 기도]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아시는 예수님,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저에 대해서도 참아 주세요.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깊이 없는 기도 생활에 은혜를 뿌려주소서.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삶의 활력을 공급해주세요. 

몸과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세요. 

스트레스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세요.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넘치게 해 주세요. 

 

무기력 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지 않게 하시고, 

독수리처럼, 범고래처럼 세포 하나 하나에 에너지가 공급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4 14 수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견디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2).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죄를 낳고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3-15).

 

사탄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끌어가는 반면, 좋은 것을 주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6-18).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주는 달콤함 이면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분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의 길을 있길 기도합시다.

 

——

욕심에서 소망으로

 

1. 입증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강력한 권면은 바로 시험을 견디어 내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박해가 있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울의 변심 혹은 회심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러기에 영적 해방의 기치를 내건 그리스도인들의 이분법적 주장에 대해 경계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중심 가치와 정신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지 로마의 황제는 아니었다. 

로마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로마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이런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마의 법을 따르는 같았지만, 속마음은 로마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안팎에서 고통과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 

 

야고보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고된 삶인지, 얼마나 핍절한 삶인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면 더욱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험을 인내하라. 시험을 견디어내라. 

그것이 그의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있는 방법은 시험에 인내하는 것이다. 

 

시험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14)

시험은 집착이 만들어낸 구렁텅이가 아니다. 

시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내외부의 고통이다. 

시험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12절의 시험과 14절의 시험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요사이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같다. 

점점 확신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상 회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회의는 나은 신앙으로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믿는 신앙은 맹신을 낳아 모두를 괴롭힌다. 하나님조차도 괴롭다. 

그러나 항상 회의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년 내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한다면, 달리 말하면 때로 이것은 나태함의 다른 이름이다. 

나태함은 회의를 방치한다. 참된 회의자는 진리 추구의 길에 근면하다. 

하지만 나태한 사람들은 회의라는 방패로 근면을 방해한다. 

 

신앙에 대한 시험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당하는 시대다. 

내부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비난과 비판 때문에 점점 신앙의 시험에 노출된다. 

시험은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의 통과 여부는 인내다. 오래참음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다. 

당장 혼자 잘한다고 해서 교회가 욕을 안듣는 것은 아니다. 

욕을 그냥 받고 있어야 때가 있다. 욕받이가 됨을 거부하지 말자. 

 

 

2. 욕심, 참혹한 결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데 조직의 욕심은 참혹하다. 

개인의 욕심은 개인의 생이 끝나는 순간 멈춰진다. 

그러나 조직의 욕심은 대를 이어 비참한 결과를 만든다. 

 

미얀마 군부의 욕심은 군사, 정치, 경제를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쓰겠다고 안달이다. 

국민들의 죽음에는 무관심이다. 

욕심이 무덤을 만든다. 무덤에 결국 자신들이 들어가게 것이다. 

 

민주화는 어쩔 없이 피를 부른다. 

기득권의 철옹성을 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피다. 

 

야고보는 욕심에 빠져서 참된 시험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결국 내외부의 고통과 핍박을 이겨내기 못했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욕심은 인내를 갉아 먹는다. 

현실적합성의 욕심은 때때로 인내하며 소망해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조급함을 노출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인간의 욕심으로 당길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완성시킬 나라다. 

우리가 일은 어쩌면 인내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때로 욕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나의 욕심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나를 이끌어야 한다. 

그럼 욕심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욕심은 자생적이나 소망은 투사적이다. 다시 말해, 욕심은 자기 자신의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고 유지되지만, 소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며 자기 삶과 동기와 생각과 감정을 비춘다. 욕심을 방치하면,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과열된다. 뇌와 심장에 걸쳐있는 컨베이벨트의 속도가 빨라져서 다른 생각들이 들어서질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소망은 뇌와 심장에 걸쳐놓은 내생적 컨베이벨트를 끊고 나와 주변과 외부를 보게 한다. 

소망이 들어온 문을 쳐다본다. 나에게 없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고 바라본다. 

응시한다. 소망 때문에 나의 삶의 지향이 새롭게 설정된다. 

이게 욕심과 소망의 차이다. 

얼핏보면 비슷하다. 욕심도 욕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소망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차이가 난다. 

차이를 분별하고,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욕심이라는 말을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자생(스스로 만든)시킨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만큼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나라(욕심) 거스르고, 때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죄에 노예가 되고 어쩔 없이 죽음에 이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조명받지 않으면, 영상이 뇌와 심장에 투사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욕심에 점점 미쳐버린다. 광인 

 

 

——

소망을 주시는 예수님, 

욕심을 꺾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시험에 당하여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하소서. 

인내의 힘은 나의 욕심이 아니라 당신과 나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게 하소서. 

나의 뇌와 심장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소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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