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08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30 다윗은 올리브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31 때에 누가 다윗에게,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히도벨도 끼여 있다는 말을 전하자, 다윗이 기도하였다. "주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32 다윗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꼭대기에 다다르니, 아렉 사람 후새가 슬픔을 못이겨서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채로 나아오면서, 다윗을 맞았다.

33 다윗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나와 함께 떠나면, 그대는 나에게 짐만 것이오.

34 그러니 그대는 이제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을 만나거든, 그를 임금님으로 받들고, 이제부터는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이제까지는 임금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그의 아들,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그것이 나를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오.

35 곳에 가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그대와 합세할 것이오. 그러므로 그대가 왕궁에서 듣는 말은, 무엇이든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하시오.

36 그들은 지금 자기들의 아들 둘을 곳에 데리고 있소. 사독에게는 아히마아스가 있고, 아비아달에게는 요나단이 있으니, 그대들이 듣는 말은 무엇이든지, 그들을 시켜서 나에게 전하여 주시오."

37 그리하여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성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간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눈물의 피난길 속, 자신의 부하였던 아히도벨의 배반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기도를 드립니다(30-31절). 후새는 친구 다윗의 처지를 슬퍼하며 흙을 뒤집어 쓴 채로 다윗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압살롬 진영에 가담하여 아히도벨의 계략이 실패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후새는 다윗의 제안에 동의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32-37절).

 

아히도벨과 대비되는 후새의 모습입니다. 이미 머리에 흙을 뒤집어써서 다윗과 같은 편임을 드러냈기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다윗을 위한 결정인지 숙고한 후새는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합니다. 도움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행동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봅시다.

 

——

배신의 사회

 

정당성이 부족한 반역에 동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아히도벨이 그렇다. 

아히도벨이 그렇게 쿠데타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그가 밧세바의 친조부로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집안을 이상하게 만든 다윗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개인의 이유가 어떻든 간에 압살롬의 반역에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 

개인적으로야 권력자를 싫어할 있다. 

그렇지만, 쿠데타를 일으킬 때에는 그에 걸맞는 정당성이 충분히, 아니 차고 넘치도록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쿠데타는 결국 공동체를 갈라치기 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웃을 위해 쿠데타는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 

압살롬도 그렇고 아히도벨도 그렇고 하지 말아야 선택을 것이다. 

 

다윗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으로 수도 있겠다. 

그것은 역사를 전체, 통으로 가능한 해석이다. 

하나님의 처벌이 다른 것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굳이 압살롬, 아히도벨이 처벌의 통로가 필요는 없다. 

구약의 나래이션이 항상 하나님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확신도 어떤 면에서는 조심스럽다. 

나래이터는 역사와 사건을 보는 하나의 시각이다. 

나래이터에 하나님의 관점이 담겨 있기도 하고,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영감은 나래이터를 통해서만 성경에 녹아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의 입장으로 기록하였다. 

저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했다는 사실에 깊이 동의한다. 

허나, 같은 사건, 동일한 역사를 보더라도, 저자가 처한 상황과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성령님의 영감은 일단 저자의 시대에 청자들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있다. 

그렇다고 보편적인 적용점이 아예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과 역사, 사건과 역사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공동체, 사이의 관계의 역동에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며, 원리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반영한다. 

보편적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런 구약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분의 관점으로 구약의 사건들을 보고, 관점으로 지금 현실의 사건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님의 관점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며, 이는 영원까지 지속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약을 해석하셨던 방식을 철저히 연구하여, 방식의 원리들을 최대한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다. 

 

오늘 본문의 나래이터는 확실히 다윗 편이긴하다. 

다윗을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후새, 사독, 아비아달, 아하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의 뒷배가 되어줄 것이다. 

다윗 일생일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복선이 깔렸다. 

갑자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윗을 구출하는데 공헌한 사람들이다. 

비록 삼하의 나래이터는 다윗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처벌을 받는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가운데도 다윗을 위한 안전장치가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본문을 읽으셨다면 어떻게 보셨을까? 

자신의 삶에 본문을 적용하셨을까? 

배신하는 아들, 배반하는 아히도벨 

아마도 예수님은 인생에는 배신과 배반이 언제나 일어날 있음을 본문을 통해 더욱 실감하셨을 같다. 

왜냐하면, 가륫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가륫 유다 아니라 함께 따라 다니던 제자 그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던 사람들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리고 안따까운 마음으로 초심을 잃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배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 물어 보실 같다. 

 

지금 시대에도 배신이 난무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 

가장 극적으로 웃음과 함께 보여주는 곳이 런닝맨이다. 

인간사는 배신의 게임과도 같다. 

배신의 연속이며,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다. 

속에서 예수님의 태도로 응시할 있을까! 

배신을 어찌보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분노가 아니라 긍휼과 연민과 안따까움으로 바라볼 있을까? 

예수님이 가륫 유다를 보며 했던 말들처럼 말이다. 

 

나는 배신하는 사람들을 참아 있을까

 

——

숱한 사람들의 배신과 배반을 참아내신 하나님,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에겐 더욱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의 욕구와 열망이 방향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도와주세요. 

성령님,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배신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배신을 배신으로 갚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있는 초인적인 힘을 공급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7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하나님,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 비정한 무리를 고발하는 송사를 변호하여 주십시오. 거짓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2 나의 요새이신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짓눌려 슬픔 잠겨 있어야만 합니까?

3 주님의 빛과 주님의 진리를 나에게 보내 주시어, 나의 길잡이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 주님이 계시는 장막으로, 나를 데려가게 해주십시오.

4 하나님, 때에, 나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렵니다. 나를 크게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기뻐하면서, 수금가락에 맞추어 주님께 감사하렵니다.

5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시인은 악한 사람들로 인해 비통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원수에게 짓눌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구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1-2절).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그 거룩한 산에서 주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리려 합니다(3-4절).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영혼의 다짐을 합니다(5절).

 

시인은 비정한 무리와 악한 자들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자신의 요새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빛과 진리가 여전히 나의 길잡이가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슬픔이 변하여 기쁨 되게 하실 그 예배를 사모합니다. 오늘 내가 서 있게 될 세상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고백하며, 기쁨의 찬양과 예배를 드립시다.

 

——

예배 인도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예배 인도자는 사람의 상황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배 인도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가교역할을 한다. 

 

시인은 고통과 슬픔 속에 있다. 

주변의 사람들과 어쩔 없이 고소, 고발 사건이 발생했다. 

거짓으로 시인을 옥죄고 있다. 

소위 가짜 뉴스가 판을 친다. 

비정하고 무정한 가짜 뉴스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음해 공작이 거듭되면, 당사자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 

조국 가족에 대한 대한민국 언론의 무자비한 공격이 비근한 예다. 

설혹 그의 가족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과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가짜 뉴스가 많은 시대에 자신 아니라 자신의 가족 모두에게 비난과 음해와 거짓으로 공격을 받으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일 것이다. 

이것이 인간사에 계속 일어나는 일이다. 

언제든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과 공격을 받을 있다. 

억울하게 옥살이 경우도 적지 않다.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어 죽음으로 몰아간 경우가 어디 번인가? 

연좌제로 묶어서 가족들까지 숨어 지내는 경우가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화병이 생기지 않을 없다. 

시인의 상황은 인류 보편의 상황이며,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인으로 통해 하나님께 자신들의 감정을 이야기할 있다. 기도의 언어를 발견한다. 기도할 있는 용기를 얻는다. 

 

최근에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예수님도 성경을 읽으셨을 것이며, 성경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신 방식, 해석하신 방법, 판단하신 내용, 적용하신 결과물들을 철저히 연구하면서, 예수님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 1차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관점을 통해 다시 구약과 신약의 사도행전, 서신서 계시록을 살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 그리고 그분에 대한 묘사들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그분의 홀로그램을 완성한다. 

그리고 홀로그램의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성격들을 읽으시는지 관찰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연습을 하는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구약 다윗의 이야기를 읽을 , 예수님이 다윗과 주변 인물들을 어떻게 평가하셨을지 상상하면서 성경을 읽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읽어가면, 다윗의 죄와, 아들 암논, 압살롬의 죄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있고, 나름의 기준이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전통적인 읽기에 갇히지 않으셨다. 그분의 해석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해석학이 그분의 실천을 낳았다. 전통적인 읽기와 해석을 뛰어넘어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다. 기준으로 구약의 여러 사건들을 분석하는 , 이것이 예수 홀로그램 성경 읽기법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예수님의 말씀, 행적, 가르침과 실제 적용, 주변 인물들의 예수님에 대한 묘사와 평가를 다방면으로 모아서 조각들이 그분의 홀로그램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오늘의 구약 본문을 어떻게 읽으셨을까를 계속 되물어 보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통해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읽기도 가능해진다. 

 

예수님은 시편 43편을 어떻게 읽으셨을까?

당연히 자신을 음해하는 기득권들에 대항하여 시를 음미하셨을 것이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으며,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지로 헤쳐나오셨다. 

하지만, 그분의 정서는 오늘 시인의 정서와 유사했을 것이다. 

거짓으로 음해하니, 고통이 계속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고통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님도 고통을 느끼시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신 분이시다. 

고통을 표현하실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분은 시편 43편을 통해 자신이 당한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시인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다. 

 

4 하나님, 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렵니다. 나를 크게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기뻐하면서, 수금가락에 맞추어 주님께 감사하렵니다.
5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이것이 예수님의 멘탈이었다. 

슬프고 괴롭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신뢰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예배인도자는 이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개인적 상황이 막막할 있다. 

사회적 상황이 너무 슬플 있다. 

그런 개인과 사회적 상황을 노래로 기도로 주님께 아뢸 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사람의 상황을 아뢰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예배 인도자의 역할이다. 

다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면서 노래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그분의 역사에 대한 희망을 노래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배인도자의 숙명이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찬양은 슬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현재 세계 곳곳에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 우리는 평생 슬픈 찬양만 해야 하는 것인가? 

인류의 고통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 슬픔이 현존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할 있는가? 

예배 인도자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사람의 상황과 하나님의 성품을 동시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찬양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의 도움을 구한다. 

 

——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자기 연민에만 빠져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머물지 않게 해주세요. 

결국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쁨을 주시는 주님께 찬양으로 반응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읽으셨던 성경, 예수님처럼 해석하는 방법을 많이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이라는 안경을 착용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홀로그램이 앞에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했을지 항상 생각하게 하소서. 

그렇게 예수님이 더욱 풍성하게 제게 드러나도록 주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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