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10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5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으며,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들어왔다.

16 때에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을 찾아와서, 압살롬을 보고, "임금님 만세!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7 그러자 압살롬이 후새에게 물었다. "이것이 친구를 대하는 그대의 우정이오? 어찌하여 그대의 친구를 따라서 떠나지 않았소?"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주님께서 뽑으시고 백성과 이스라엘 사람이 뽑아 세운 분의 편이 되어서, 그분과 함께 지낼 작정입니다.

19 제가 다른 누구를 섬길 있겠습니까? 당연히 부왕의 아드님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전에 부왕을 섬긴 것과 같이, 이제는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가 무슨 일부터 해야 될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오."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 후궁들과 동침하십시오. 이렇게 임금님께서 부왕에게 미움받을 일을 하였다는 소문을 이스라엘이 들으면, 임금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더욱 힘을 것입니다."

22 그리하여 사람들이 옥상 위에 압살롬이 들어갈 장막을 차려 주니,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였다.

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아히도벨도 함께 갔고, 다윗이 보낸 후새도 위장 전향하여 함께 했습니다(15-19절).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을 따라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이는 다윗을 미워하는 반란 세력이 더욱 결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20-22절). 패륜적인 행위였으나 아히도벨의 말은 압살롬에게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23절).

 

아히도벨은 다윗도 인정한 모략가 입니다. 압살롬에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했습니다. 그 영향력 아래에 익숙해지면 주체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 생각을 의존하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목소리, 대상, 매체들은 무엇입니까?

 

——

 

이쯤 되면 반역은 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고 있다. 

예루살렘 사랃뜰은 어리둥절 자체이다. 

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다윗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윗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들은 믿을 없는 표정이었다. 

어찌 다윗이 모양이 되었는가

민족의 영웅과도 같은 다윗이 어찌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단 말인가

매년 다윗을 따라 전장터를 누볐던 백성들은 세월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흘렀는지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운 순간이 왔다. 

혁명때로 세상의 변화는 도둑처럼 다가온다. 예측하기 어렵다. 

 

코로나가 그렇다. 

일대 문화대혁명을 가져왔다. 

그동안 생각만했던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디. 

정치적 혁명만큼이나 어마무시한 삶의 혁명이 그동안 있어왔다. 

마스크, 거리두기, 온택트 

세상이 갑자기 변하면 어찌해야 바를 모르는 사람들은 현자를 찾는다. 

그래도 지금 시기를 지혜롭게 넘길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는다. 

마치 압살롭이 아히도벨을 찾듯이 말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없다. 

책사가 필요하다. 아히도벨이나 후새 같은 모략을 펼칠 있는 참모가 필요하다. 

어찌보면 세상은 2인자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가들은 권력을 대표하기는 하지만,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권력을 유지할 없기 때문에 2인자들을 의존할 밖에 없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에게도 많은 조언을 했던 인물이었다. 

혹시 압살롬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다윗에게 조언했었는지도 모른다. 

다윗의 정책에 대해 많은 부분 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23절이 보여주고 있다. 

 

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 같이 여겼다. 다윗도 그러하였지만,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아히도벨은 여러모로 지혜와 모략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실 조금 끔찍한 방식을 압살롬에게 조언하는 모습을 본다. 

다윗 왕의 후궁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 압살롬이 강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압살롬은 넘지 말아야 선을 넘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에게 확실히 편을 정하라고 압박할 있었다. 

다윗 편인지 압살롬 편인지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이다. 

중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입장을 정하라고 한다. 

괜히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도리어 공격을 받을 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다윗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는지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압살롬에게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라고 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지혜로운 조언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죄를 부각하고, 그의 실각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그의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아히도벨은 그의 손녀 딸의 치욕을 갚을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어느 순간의 지혜로운 말과 책략이라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압살롬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 강을 넘어버렸다. 

이제 압살롬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정적을 죽일 있을 정도로 뜻이 강고함을 세상에 드러냈다. 아버지의 후궁들을 대낮에 범할 정도로 어찌보면 포악해 보일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이제 압살롬을 따를지, 아니면 도망자 다윗을 따라 도망자 신세가 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것이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는 딜레마였다. 

 

세상이 바뀌면 딜레마에 빠진다. 

혁명이 일어나면 어느 편에 설지 고민이 깊어진다. 

잘못 결정하면 패가망신이다. 삼족, 칠족이 죽는다. 

정치적 혁명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대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고심이 깊어질 밖에 없다. 

기존 질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흐름에 속할 것인가.

어느 순간에는 결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작년과 올해, 

나와 우리 공동체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답을 아는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누구도 답을 없었다. 

다만 각자의 의견이 있었을 뿐이다. 

엄청난 변화 앞에 사역자로서 고심이 깊어진다. 

어떻게 사역을 만들어 있을 것인가.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변화는 불가피하다. 

예루살렘 성의 주인이 바뀌었 , 지금 세상의 중심이 바뀌었다. 

아히도벨이 아니라 예수님께 묻고 싶다. 

후새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의견은 의견일 , 그들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지혜로운 조언 조차도 주님의 앞에 비추어야 것이다. 

 

최근 사역의 가시적 열매를 기대할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1) 하나님 분으로 기쁨을 누릴 있어야 한다. 

2) 이슬람 선교사의 마음과 태도로 사역에 임해야 한다. 

3) 열매보다 가지 표현에 의미를 두고 자기 표현의 아카이빙을 시도하면 좋다. 

4)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 

 

이렇게 가지 정도가 머리를 맨돈다. 

하나님 분만으로도 삶의 의미와 기쁨을 유지할 있는가? 

이것은 나에게 계속 던지는 질문이다.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할 있는가? 

 

이슬람 선교사분들은 10년을 사역해도 회심자 명을 얻는 일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분들이 사역에 임하는 자세는 열매에 있지 않다. 

지금 부르심에 자리에 자신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캠퍼스 현실이 지금 그렇다. 

회심자를 얻기가 점점 어렵다. 

년을 사역해도 여전히 맨땅일 있다. 

그럼에도 내가 부르심에 자리에 있다는 사실로 만족할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역자는 어떤 기쁨을 추가적으로 추구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자기 표현 있겠다 싶다. 

열심히 자기를 드러내라. 글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자기의 은사로 드러낼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의 자기 세계를 구축하라. 

누가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자기 만족을 추구하라. 

수년 전에 달인의 리더십에 대해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그렇다. 미래의 리더십은 달인에게서 나올 있다. 미래의 영향력은 자기를 계속 표현하면서 명확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달인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지금 당장 영향력을 미친다는 조급증과 결벽증에서 나와 느긋하게 예술가의 삶을 살자. 

 

하지만, 우리는 사역자이니 만큼 있는 전략은 해보는 것이다. 

열매가 있든 없든,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과 에너지와 전략으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정이 즐거울 있다.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라. 

전략을 짜면서 즐거울 있다.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 동역자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보는 것이다. 

과정 자체가 열매가 되도록 하라.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본다. 

 

——

하나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4 산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어떤 의견을 채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오늘의 일정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의 평안이 흘러가도록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2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1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쏠리는 것을,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알았다.

2 요압이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슬기로운 여인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부탁하였다. "그대는 초상당한 여인처럼 행동하시오.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이미 오랫동안, 죽은 사람을 애도한 여인처럼 꾸민 다음에,

3 임금님 앞으로 나아가서, 내가 일러주는 대로 호소하시오." 요압은 여인에게, 말을 일러주었다.

4 드고아에서 여인은 왕에게로 나아가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절을 뒤에 "임금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5 왕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니, 여인이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이 죽어서, 가련한 과부가 되었습니다.

6 여종에게 아들이 있는데, 들에서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들 하나가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7 그런데 이제는 집안이 들고 일어나서, 종에게, 형제를 때려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죽은 형제의 원수를 갚고, 살인자를 죽여서, 상속자마저 없애 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남아 있는 불씨마저도 버려서, 남편이 땅에 이름도 자손도 남기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8 듣고 왕은 여인에게 말하였다. " 문제를 두고서는, 내가 직접 명령을 내리겠으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9 그러나 드고아 여인은 왕에게 아뢰었다. "우리의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일에 있어서 허물은 저와 아버지의 집안에 있습니다. 임금님과 왕실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10 왕이 대답하였다. "누구든지 너를 위협하거든, 그를 나에게로 데리고 오너라.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다."

11 여인은 간청하였다. "그러면 임금님, 임금님께서 섬기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셔서, 저의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집안 사람들이 살아 있는 저의 아들까지 죽이는 크나큰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막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

 

12 여인이 간청하였다. "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말씀만 드리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13 여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처럼 그릇된 일을 하셨습니까?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친아들인 왕자님이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처사는 지금까지 종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렇게 말씀만 하시고, 왕자님을 부르지 않으셨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4 우리는 죽습니다. 땅에 쏟으면, 다시 담을 없는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방책을 베푸셔서 비록 내어쫓긴 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15 높으신 임금님, 제가 지금 임금님을 찾아 뵙고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까닭은, 제가 친척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문제를 임금님께 아뢰면, 임금님께서 제가 간구하는 바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입니다.

16 저의 집안 사람들이 저와 저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끊어 버리려고 하지마는, 임금님께서 저의 사정을 들어서 아시면,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7 종은 ,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말씀으로 저를 안심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임금님은 바로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까, 저의 호소를 들으시고 선악을 가려내실 것이라고도 생각하였습니다. 임금님이 섬기시는 하나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18 마침내 왕이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묻는 말을,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말고 대답하여라."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19 왕이 물었다. "너에게 모든 일을 시킨 사람은 바로 요압이렷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임금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높으신 임금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피할 길이 없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은 임금님의 신하 요압입니다. 그가 모든 말을 종의 입에 담아 주었습니다.

20 왕자님의 일을 되게 하여 보려고,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이런 일을 꾸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슬기로우시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실 압니다."

 

 

압살롬이 떠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압살롬을 향하고 있으나 다시 불러오지 못합니다. 요압은 한 여인을 보내 다윗의 상황과 비슷한 사례를 실제 자신의 이야기처럼 말하도록 지시합니다(1-11절). 자신을 돕겠다는 다윗의 맹세를 들은 여인은 왕의 모순을 지적하며 압살롬을 데려 오라고 권합니다(12-17절). 다윗은 이 모든 말들이 연출에 의한 것임을 직감하고 배후에 요압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18-20절).

 

다윗에게 압살롬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요?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있었다면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 실행에 옮겼어야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자신의 입으로 말해버렸으니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매한 마음은 미지근한 화해로 이어지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킵니다.

 

——

 

역사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각자의 입장에 서면 판단이 바뀌기 마련이다. 

아버지로서 압살롬과 빨리 화해를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님 왕으로서 죄인에 대해 영구히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다윗 왕에게는 여전히 많은 아들들이 있다. 

압살롬이 외모나 기개가 남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삼하 14:25)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교활하고 폭력적이다. 

암논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다.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다.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왕은 아들에 대한 정당한 벌을 내렸어야 했지만, 다윗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물쩡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압살롬은 큰형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으로 도망했다. 

평생 거기서 사는 것이 압살롬에게나 다윗 왕에게나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심각한 딜레마가 여기도 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둘의 역할을 함께 있냐는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은 왕이 없다. 

왕이 되는 순간, 왕국의 통치를 위해 사적 관계를 공적 원리로 재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되는 순간, 가정과 나라를 동시에 관리하고 보살피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차라리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도덕적 명분도 분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진심으로 따랐다. 

왕이 되어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을 , 그것을 해결할 의지와 지혜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왕은 오롯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분만이 진정한 왕이 되실 있다. 

사무엘상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백성이 왕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싶지 않아서다.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 왕은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도 지혜도 없다. 

그러니 어쩔 없이 분열의 씨앗이 자라게 되고, 전쟁의 빌미가 제공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젊고 능력있는 정치인의 등장은 반갑다. 

청년 세대를 대변하면서 청년의 지지를 받아 정치권에 청년의 문제를 해결해 있는 대표주자가 된다면 그것도 좋을 일이다. 

물론, 개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난관을 계속 만나게 것이기에, 그래서 온갖 딜레마 속에서 고통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인간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든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다. 

부르심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자리다. 

공동체 지도자의 자리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공동체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싶다. 

그분들이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공동체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배제할 없기에, 항상 부딪히는 날까로운 이슈들을 다뤄가며 이루는 밤들이 늘어가게 된다.

공동체에는 항상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 앞에 선봉장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긴장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직장에서도 책임있는 자리, 관리자의 자리에 승진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한다. 

사토리 세대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도 보이는 지점이다. 

책임지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래서 바울은 권세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P4G 국제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개회식 장면을 보았는데, 사슴이 거닐고 나비가 나부끼는 소나무 숲에서 대통령 연설이 진행되었다. 

증강현실이 보여주는 회복된 자연이 모습이 성경이 꿈꾸는 자연과 닮았다. 

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Global Goals 2030 줄임말이 P4G이다. 

자연의 회복을 위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모아지고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도자들이 어디에 힘을 모으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문제는 오랫동안 세계는 세계 평화를 위해 수많은 선언을 했지만, 아직도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자연을 회복시키겠다는 지도자들의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목에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지구의 미래를 위한 희망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역에서도 분명히 필요하다. 

 

다윗의 딜레마를 이해한다. 

그의 어정쩡한 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태도도 이해한다.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국 분열과 전쟁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찌보면 다윗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찾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기도할 밖에 없는 날이다. 

 

——

인간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은 한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자원과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데, 수많은 이슈와 문제는 옴짝달싹 없이 만듭니다. 

하나를 결정하면, 결정에 고통받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결정하지 않으면 모두가 고통받습니다. 

고통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지만 고통을 줄이는 결정이 과연 공동체의 미래에 좋은지도 헷갈립니다.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주님, 우리의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구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최종결정해 주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06 01 화요일

여는 기도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23 해가 지난 어느 , 압살롬은 에브라임 근처의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때에 압살롬이 왕자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24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도 찾아가서 말하였다. "임금님, 제가 이번에 양털을 깎게 되었으니, 임금님도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아들과 함께 내려가셔서, 잔치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5 왕이 압살롬에게 말하였다. "아니다, 아들아. 우리가 모두 따라가면, 너에게 짐이 터이니, 우리는 가지 않으마." 압살롬이 계속하여 간청을 하였지만, 왕은 함께 가고 싶지 않아서, 복을 빌어 주기만 하였다.

26 그러자 압살롬이 말하였다. "그러면 맏형 암논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암논이 너와 함께 가야 이유가 무엇이냐?"

27 그래도 압살롬이 계속하여 왕에게 간청하니, 왕은 암논과 다른 왕자들이 모두 그와 함께 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28 압살롬은 이미 자기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암논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질 때를 지켜 보아라. 그러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쳐죽이라고 하면, 너희는 겁내지 말고 그를 죽여라. 내가 너희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니, 책임은 내가 진다. 다만, 너희는 용감하게, 주저하지 말고 해치워라!"

29 마침내 압살롬의 부하들은 압살롬의 명령을 따라서, 하라는 그대로 암논에게 하였다. 그러자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 노새를 타고 달아났다.

30 그들이 아직도 길에서 달아나는 동안에,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왕자들을 모조리 쳐죽여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는 소식이 들어갔다.

31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입고 있는 옷을 찢고 땅바닥에 누워 버렸고, 그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도 옷을 찢었다.

32 때에 다윗의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나서서 말하였다. "임금님, 젊은 왕자들이 모두 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암논 사람만 죽었습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보인 날부터, 압살롬은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33 그러니 이제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왕자들이 죽었다고 하는 뜬소문을 듣고 상심하지 마십시오. 암논 사람만 죽었을 따름입니다."

34 사이에 압살롬은 도망쳐 버렸다.

바로 때에 예루살렘의 보초병 하나가, 호로나임 쪽에서 많은 사람이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서, 왕에게 알렸다.

35 그러자 요나답이 왕에게 아뢰었다. "틀림 없습니다. 왕자님들이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종이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36 요나답이 말을 마치는데, 왕자들이 들어와서, 목을 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왕도 통곡하고, 모든 신하도 통곡하였다.

37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죽은 아들 암논 때문에 슬픈 나날을 보냈다.

38 압살롬은 도망한 뒤에 그술로 가서, 곳에 동안 머물러 있었다.

39 그러는 사이에 다윗 왕은 암논을 잃었을 때에 받은 충격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오히려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간절해졌다.

 

복수의 날이 왔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질 때까지 두 해를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이 일에도 연루되어, 압살롬의 잔치에 암논과 왕자들의 참여를 허락합니다. 형제간의 살인이 벌어지고(23-29절) 모든 왕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은 비통해합니다. 다행히 살아 돌아온 왕자들로 인해 안도의 눈물을 흘리지만 다윗은 죽은 암논으로 인해 슬픈 나날을 보냅니다(30-37절).

 

암논이 다말을 범할 때도 다윗이 이용되었는데 이번에도 이용됩니다. 그럼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저 슬퍼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거듭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영역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이런 상황을 회피하며 가만히 있는 것은 굶주린 죄에게 먹잇감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

 

 

2년을 기다렸다.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 머물고 있다. 

다윗은 암논의 범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다만 분개했을 뿐이다. 

그렇게 2년이 흘러간다. 

압살롬은 매일 다말의 모습을 보면서 안따까움의 한숨을 쉰다. 

결혼도 하지 못하는 다말의 슬픈 모습이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다. 

지난 2 동안 큰형 암논을 떄마다,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때를 기다렸다. 아무때나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적절한 , 모두가 사건을 잊어버릴 , 경계심이 풀리고 각자가 자신의 일에 매진 , 때를 기다려왔다. 

어떻게 암논에게 복수할 지를 계획한다. 더불어 자신의 도망계획도 세운다. 

가능한 철저하게, 절대 실수가 없도록 준비한다. 

지난 2년은 준비의 기간이었다. 

 

낌새

 

압살롬이 다윗 왕에게 양털깍는 잔치에 초대한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말이다. 

매년 잔치가 있어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매년 모든 형제들을 초대했는지는 미지수다. 

아버지 다윗을 초대하는 것도 매년 했는지,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뭔가 낌새가 있다. 

다윗 왕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압살롬에게 묻는다. 

 

26 그러자 압살롬이 말하였다. "그러면 맏형 암논이라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암논이 너와 함께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암논이 굳이 갈야 필요가 있는지 묻고 있다.

암논과 압살롬 사이의 일들을 알고 있었던 다윗이라면 당연히 이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했다. 

낌새가 이상하니, 조용히 압살롬에게 어떤 의도와 꿍꿍이가 있는지 물어야 했다. 

그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암논에게 죄를 물어 책임을 지게 하든지, 압살롬과 암논 사이의 중재를 통해 서로 화해하게 하든지 해야 일이었다. 

사실 압살롬의 마음/생각/계획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32 그 때에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나서서 말하였다. "임금님, 젊은 왕자들이 모두 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암논 한 사람만 죽었습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보인 날부터, 압살롬은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사촌이었던 요나답은 어느 정도 압살롬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대충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아주 구체적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압살롬이 칼을 갈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충분히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의 범죄

 

그럼에도 다윗은 일련의 사건을 크게 문제시 하지 않았다. 

이게 다윗의 실수 혹은 약점이었다. 

그도 너무 죄악을 저질렀고, 죄를 용서받았다. 

아마도 은혜의 깊이가 너무 컸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관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퉁치기엔 결과가 너무 치명적이다. 

관대함이 필요하다. 포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해 공정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도 왕의 책무이다. 

자신의 아들의 범죄라고 해서 그냥 모른 지나가서는 안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으로 정당하게 잘잘못을 가리지 않으면 사적 복수가 횡행한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당하게 판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살해한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만큼 나쁜 죄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의 죄에 대해 제대로 치리하지 않은 것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공정하게 치리해야 한다. 원칙대로 치리해야 한다. 죄를 묻고 그에 응당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왕이 해야 일이었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리더십

 

사적으로 은혜를 베풀 때가 있고, 공적으로 정당한 책임을 물을 때가 있다. 

이것이 리더십의 일이다. 

그래서 리더십은 이중적일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야 무한정 용서하고 싶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는 원칙이 중요하다. 규정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책임을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모른 넘어가서는 안된다. 

분명히 밝힐 것은 밝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니 리더는 고통을 달고 산다. 

은혜와 공정을 항상 저울질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은혜가 사라진 세상이 어찌 아름답다고 있는가? 

딜레마고통의 연속이다. 

하나님의 딜레마는 모든 리더들의 딜레마다. 

하나님의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은 그래서 모든 리더들의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이다. 

 

——

용서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그렇다고 마치 제가 죄가 없었던 사람처럼 살지 않게 해주세요. 

겸손하게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래야 주변의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대할 있을 것입니다. 

죄를 덮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칫 은혜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지 않게 주세요. 

죄는 빛으로 드러나고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고, 그리고 다시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 것입니다. 

그렇게 밝은 빛이 우리 모두에게 비추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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