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4월 23일 금요일

 

IVP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21년 3-4월호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

6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9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툼과 분쟁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욕심으로 인해 폭력과 살인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1-3절).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들을 간음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이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로 인해 마음아파 하십니다(5절).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킬 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때 친밀히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시며(6-8절), 우리가 욕심에 따라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겸손히 주님을 찾을 때 온전히 회복시켜주십니다(9-10절). 내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깨어진 모습이나 관계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내 마음을 돌이키며 회복의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시다.

 

——

순결을 향한 싸움

1. 단어의 연결, 생각의 연결 

야고보의 사고를 따라가는 것, 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 그 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 분쟁, 갈등을 보았다(1절). 

그리고 그러한 싸움은 욕심 때문이라고 밝힌다. 욕심은 쾌락과 연결되어 있다. 

쾌락은 기준을 무너뜨리고 선을 넘나든다. 결국 간음하는 사람들(4절)을 양산한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도 쾌락을 찾고, 하나님에게서도 즐거움을 찾는다. 

결국 두 마음(7절)을 품게 되고, 마음의 순결을 잃게 된다. 

두 마음, 두 세계에서 동시에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분명히 권면한다. 

 

“우십시오”(9절)

울라. 

울어라.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이 유지되지 못함에 대해 슬퍼하며 울어라. 

그렇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라. 

 

야고보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이런 길을 발견하게 된다. 

 

2. 마음의 순결 

오늘 본문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권면의 편지는 그래서 무겁고 부담이 된다. 

마치 법조문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가장 눈의 띄는 어구는 “마음의 순결”이다. 

야고보의 사고와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순결에 가 닿는다. 

두 마음을 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만다(4절). 

처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사랑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기쁨에 만족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욕심이 생겼다. 세상이 주는 쾌락도 만만치 않게 기쁘다는 사실을 아니 때로 그 이상임을 깨닫는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마음의 순결을 잃어간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걸 원치 않으신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상당히 질투하시는 분이시다(5절).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으시다. 

세상의 쾌락에 넘어가 결국 그 마음의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때, 분열과 싸움과 갈등과 긴장이 고조될 수 밖에 없다(1-3절). 

결국 이런 마음의 태도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표방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깨지고 싸우고 죽인다. 

그걸 야고보가 봤던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1장부터 야고보는 분노, 말 조심, 차별 금지 등의 덕목을 끌고 들어왔던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라고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결코 이런 그림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도 질투하시지만, 결국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으면 공동체는 분열되어 산산히 조각나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현실의 하나님 나라가 심각하게 오염되고 훼손되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질투의 마음을 발동하신다. 

 

그분은 마음의 순결을 원하신다. 

 

3. 갑분싸

여기까지 묵상하며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마음이 싸늘해진다. 

내가 누리는 여러 즐거움들이 혹시 두 마음의 결과는 아닌가 싶다. 

수 많은 즐거운 요소들이 혹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들, 좋은 음식, 화려한 액션 영화, 스포츠, TV… 

 

즐거움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잘 지키고 있어야겠다. 

그 경계선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렇다고 어느 율법주의자처럼 아예 경계선까지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경계선을 설혹 넘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분은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6절). 

조심해야 하지만,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고도의 응시를 낳고 응시는 마음의 흐름을 낳고, 마음의 흐름은 의도치 않은 경계 침범을 낳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길은 경계를 잘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8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가는 길이다. 

 

그럼에도 그 경계를 잘 지켜야 하는 사실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지혜가 필요하다. 

 

——

참 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예수님, 

주님 주시는 기쁨에 더 노출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세요. 

세상이 주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완전히 거부하는 율법주의적 완벽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예수님을 더 가까이, 성령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겁니다.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주는 유익과 즐거움을 어느 정도 누리면서, 

그럼에도 가장 큰 열망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이 경계를 지키는 일. 

주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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