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여는 기도

살아 있는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하니, 주님의 종을 심판하지 말아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없었습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3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넉넉하다”하셨다.

 

[메시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다르다. 고난에 대비하여라. 힘든 시기가 닥쳐올테니, 필요한 것을 챙겨라. 너희 겉옷을 전당 잡혀서 칼을 구하여라. ‘그는 범죄자와 한 무리로 여겨졌다’고 기록된 성경 말씀의 최종 의미는 나에게서 완성된다. 나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제 결말로 다가가고 있다.”(36-37절) 

 

[오늘의 묵상]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을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보신다. 

고난받는 종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이다. 

그분은 말씀을 성취하신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야 53:5)

 

“그가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이사야 53:10)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이사야 53:12) 

 

예수님은 이런 이사야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신다. 

자신의 삶은 이미 예견되었다. 

온 인류를 위해 속건제물이 되기로 결정하셨다.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제물이 되신 것이다. 

우주의 왕이 인간이 되어 죽음을 선택하신 이야기다. 

나는 그런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어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선다. 

 

예수님은 이제 돈주머니와 자루를 챙기라고 하신다. 

칼도 필요하다고 하신다. 

일차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이차적으로는 이제 제자들은 정말 먼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교여행을 보낼 때는 사실 긴 여행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진행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의 선교여행은 며칠이 아니라 몇달, 몇년이 걸리는 일이다. 

선교여행에 필요한 돈도 필요하고, 들고 다녀야할 짐도 많을 것이기에 자루나 가방도 필요하다. 

게다가 여행중에 길에서 자야하는 순간도 있을 텐데, 캠핑을 하려면 칼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선교여행을 위한 준비에도 소홀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칼을 사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말고의 귀를 왜 고쳐주셨겠는가? 

칼로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다. 

칼은 선교 여행 용이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자세를 두루 갖춰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다. 

다른 하나는 선교적 삶을 위한 철저한 준비다. 

이 두 가지는 같이 가져가야 한다. 

먼저 전적인 신뢰란 돈과 준비가 부족해도 떠나는 것이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떠나야 한다. 

모든 자원이 다 떨어지면 그 때 돌아오면 된다. 

그럼에도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 

선교적 삶은 단기 선교 여행이 아니다. 

선교적 삶은 장기 선교 정착이다.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돈도 필요하고, 비자도 필요하고, 계절과 기후에 맞는 옷도 필요하다. 

나와 가족들을 보호할 안전장치도 필요하다. 

후원자도 필요하고, 기도 동역자도 필요하다. 

할 일이 많다. 

 

그분에 대한 신뢰와 철저한 준비.

모순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공존과 병행이 가능하다.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축복한다.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이 끝까지 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기도의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대화하고 응답을 받는 일이 더욱 많아지길 소망한다. 

 

부르짖는 기도는 사역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마음 중심의 열망을 하나님께 소리내어 아뢴다. 

그분을 부르고, 그분께 마음 중심의 열망을 뜨겁게 표현한다. 

수많은 흩어지는 생각들을 흘려보내고, 마음 중심의 열망을 찾는다.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부른다. 

그리고 열망을 쏟아낸다. 

충분히 쏟아냈으면 이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진심을 원하신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열망을 원하신다. 

 

 

[오늘의 기도]

캠퍼스 선교사로 저를 부르신 예수님, 

주님을 신뢰합니다.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당신이 가라시면 가고, 멈추라하시면 멈추겠습니다. 

당신이 용기를 주시면 더욱 열심히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게 도와주세요. 

기도 속에서 주님의 모습과 느낌과 음성을 경험하게 하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도와 주세요. 

지혜를 주셔서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22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3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이 겹쳐서, 우리는 더욱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분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었던 것입니다.

14 내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자랑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여러분을 두고 디도에게 말한 자랑도 진실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5 디도는, 여러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영접하고 순종한 것을 회상하면서, 사랑하는 정을 더욱더 여러분에게 기울이고 있습니다.

16 나는 여러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말미암아 큰 위로를 받습니다. 여기에 디도의 기쁨까지 겹쳐서 더욱 기뻐합니다. 디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환대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얻습니다(13절). 바울의 근심이 무색할 만큼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극진히 영접한 것입니다(14-15절). 바울은 무엇보다 고린도 교인들과의 신뢰가 회복된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16절).

 

실의에 빠졌던 바울은 디도가 가지고 온 소식으로 인해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일하셔서 바울과 디도를 위로하십니다. 이제 바울과 디도는 고린도 교회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풀기 어려운 갈등과 긴장이 있다면, 더 깊이 사랑하고 신뢰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바울의 정서 상태는 매우 좋음이다. 

바울과 디도는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리고 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디도는 더욱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교인들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 있다. 

관계가 회복되었다.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지만,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고, 그래서 회복되었다. 

위로, 환대, 기쁨, 신뢰… 

이런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 

바울의 오랜 노력과 분투 위에 하나님이 주신 멋진 선물이다. 

 

교회에서 웰컴팀을 시작했다. 

예배 전에 커피와 과자를 먹으면서 예배에 오시는 분들을 환영한다. 

그것만으로도 예배에 오는 분들의 마음이 조금은 열린다. 

다들 조금 일찍 교회에 오게 되었다. 

예배 시작 시간에 조금 더 많은 청년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이건 꽤나 멋진 변화다. 

환대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위로와 기쁨과 신뢰를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 환대가 있다. 

환대의 의미의 그 풍성함을 더 많이 발견하면 좋겠다. 

 

성도간의 서로 위로가 있고, 환대가 있으면, 당연히 그 안에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이 점점 커지고 확대되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도 위로를 받는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다. 

세상에서 받지 못했던 위로다.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와닿는 것은,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바울의 마음 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웠다. 

분열이 있었고, 죄가 있었고, 바울의 대적자가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인들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 당연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계가 회복되었고, 신뢰가 회복되었다. 

신뢰는 한쪽만의 변화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이 신뢰 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교인들도 바울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과 상통한다. 

이런 상호 신뢰가 마련된 교회, 공동체를 참 갈망하게 된다. 

 

한국의 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많이 깨어져 있는가? 

너무 많은 갈등과 긴장이 존재한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를 받는다. 

목사와 성도 사이에, 장로와 장로 사이에, 성도 간에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법정에 가기도 한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신뢰가 깨어진 공동체는 위로와 기쁨을 주기 어렵다. 

서로의 진정성을 믿고, 환대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게 잘 안되니까 사이비가 득세한다. 

사이비는 뇌 한쪽의 정상적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하게 되고, 성도간의 갈등은 최소화된다. 

그러니 얼핏보면 사랑과 환대가 넘쳐난다고 보여진다. 

자아가 망가진, 정상적인 이성 활동이 정지된 사람들은 기계처럼 웃고 살갑게 대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곳에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 

세상에서, 전통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미끼가 되어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이끈다. 

교회는 말씀과 신뢰가 회복되어야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사이비를 능가할 수 있다. 

 

기독 공동체들의 시작은 대체로 원대하다. 

좋은 꿈과 이상을 갖고 시작한다. 

하지만 대체로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상적 그림만으로 공동체가 유지되기가 어렵다. 

작은 상처를 다뤄야 하며, 상호 신뢰를 줘야 한다. 

위로와 환대와 기쁨이 공동체에 흘러야 한다. 

이것은 비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 있는 사랑, 헌신, 인내 등의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 

성숙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불가피하게 어려움이 찾아온다. 

너무 이상적이지도 말고, 너무 자조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은혜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달인의 경지다. 

 

디도가 찾아오길 바라게 된다.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는 디도가 왔으면 좋겠다. 

위로와 신뢰가 더욱 커지는 하루 하루가 되길. 

마음 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이 치유받길… 

 

[오늘의 기도]

위로를 주시는 주님, 

공동체에 위로가 흘러가게 하소서.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관심으로 위로가 흘러가게 하소서. 

 

기쁨을 주시는 주님, 

주님의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공동체의 관계가 회복되기에 갖게 되는 기쁨을 주소서. 

서로 환대하기에 서로의 존재가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렇게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더욱 늘어가길 원합니다. 

서로 신뢰하기에 가족 같은 관계가 되길 기도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위해 기도해 주는 관계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2월 24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7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거쳐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 하나님은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18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대열을 지어 이집트 땅에서 올라왔다.

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히 맹세까지 하게 하며 "하나님이 틀림없이 너희를 찾아오실 터이니, 그 때에 너희는 여기에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거라" 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

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주석

블레셋을 지나는 길(1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려는 의지를 알리셨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셨기에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좀 더 멀지만 안전한 길로 안내하셨다(IVP 성경주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름길인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홍해로 가는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이유는 전쟁을 할 경우 마음을 바꾸어서 이집트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17-18절). 모세는 요셉의 유언대로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19절). 주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 앞에서 인도하십니다(21-22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17-18절). 잘 보이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노약자가 포함된 200만 명 이상의 무리가 노숙하며 광야 길로 문제없이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낮의 더위는 구름 기둥이, 밤의 추위는 불기둥이 막아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동행하십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묵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200만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모습인가? 

모든 백성을 동시에 보호하는 조치는 과연 가능한가? 

구름기둥은 단순히 기둥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둥을 중심으로 하늘에 구름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야 몇 십킬로미터로 줄 서 있는 백성들을 돌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기둥은 상대적으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불기둥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불기둥은 높이 올라 꼭대기에는 마치 태양 같은 빛과 열을 내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멀리 있는 백성들에게도 빛과 열이 미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일대가 환한 대낮같다. 

야생동물들도 함부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런데 밤낮 이렇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돕고 계신다면, 

그래서 밤낮 행군하고 있다면, 

그들은 잠은 어떻게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행군하고 있었을까? 

가축들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나귀나 낙타같은 동물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낮과 밤이 혼란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정신건강까지 위태롭다. 

 

물론 가능한 빨리 이집트 땅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언제 이집트의 정예 병사, 정규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속히 이집트 영토를 벗어나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행군 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다. 

장정들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약자, 병자, 장애인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 

최대한 그들의 편의를 도모해야 장거리 행군을 마칠 수 있다. 

속도가 필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모두를 위한 속도가 필요하다. 

낮에도 쉬어야 한다. 밤에도 행군해야 한다. 

각자의 체력에 맞춰 쉼과 행군을 반복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는 방향을 안내한다. 

이 두 기둥은 단순히 햇볕을 막아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역할 이상을 한다. 

먼 곳에 있는 백성들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행군의 목표지점을 알려준다. 

조금 늦게 가도 된다. 

쉬었다 가도 된다. 

안심이 된다. 

항상 언제나 저 멀리에 기둥이 보이고 그 위에는 구름으로, 발광체로 표지판이 있다. 

신기한 경험이다. 

아이들은 이 놀라운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길다란 행군 행렬도 놀라운데, 그 앞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지난 10가지 재앙이 사실 초현실적이었다. 

 

보호와 방향. 

옷과 신발 텐트, 그리고  나침반. 

장거리 행군에 꼭 필요한 요소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대신하고 있다. 

보호와 방향을 병행하는 기둥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사랑, 능력을 경험한다. 

 

성경저자는 하나님의 염려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중도포기할 것을 염려하셨다.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이스라엘.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그들을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 충분히 신뢰하는 순간까지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심초사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며 많은 은혜를 베푸신다. 

지적인 깨달음을 더하시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신다.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고 간구와 기도에 대해 특별한 응답을 주시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서 천천히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시고, 

그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자유를 말하면서 보호하지 않으면 약자들은 뒤쳐진다. 

자원과 네트워크가 풍부한 사람과 이제 막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유 경쟁으로 내몰면 당연히 전자가 승리할 것이다. 

성장할 수 있도록 경쟁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인큐베이팅 해야 한다. 

자원과 네트워크가 부족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출산률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배려와 염려를 배워야 할 이유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늘 청년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배려를 경험하게 하소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청년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소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청년들이 되게 하소서. 

 

고통받는 이 세대 약자들을 돌보소서. 

보호종료 아동, 청소년, 청년들을 보호하소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소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도 살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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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2월 20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1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신 일을 누가 다 알릴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누가 다 찬양할 수 있으랴?

3 공의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4 주님, 주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5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번영을 보게 해주시며, 주님 나라에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주시며, 주님의 기업을 자랑하게 해주십시오.

6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었으며,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8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의 명성을 위하여, 주님의 권능을 알리시려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9 주님께서 홍해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시고 그들로 깊은 바다를 광야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10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11 물이 대적을 덮으므로, 그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습니다.

12 그제서야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석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음(6절)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그들과 동일한 죄가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죄성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까지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시인은 주님의 이름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1-2절). 그 찬양은 은혜와 구원을 바라고 번영과 기쁨을 구하는 간구로 바뀝니다(4-5절). 시인의 세대 역시 조상처럼 죄를 짓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6절). 조상의 불신앙과 거역에도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셨고(7-11절), 그들은 다시 믿음과 찬양을 회복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조상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시고 건지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시인의 역사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7절이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홍해 앞에서 주님을 거역하게 되었다. 

원망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절망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0개의 재앙으로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충분히 되돌리지 못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 시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기적으로도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사람들을 기적을 원한다. 

신비로운 것들을 원한다.

영적인 것들을 보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10가지의 위대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 10가지 기적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몇 가지 기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여정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린 속도로 배운다.

빠르게 배우는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기적과 이적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충격 요법 같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근육을 키워야 한다. 신경세포만 키워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근육을 키워서 실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어야 한다. 

기적을 넘어 일상을 버티고 유지하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화려한 기적 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이래서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예수님은 줄곧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기존의 기적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기적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신비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일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님도 알았다. 

사람들의 요구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지 말이다. 

 

내가 내세울 기적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놀라운 기적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도 더 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이다. 

그저 다시 한 번 성육신을 떠올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한다. 

그 사건들 속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불순종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의 삶을 추구한다. 

그분 뜻에 따르고자하는 열망이 나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맏음을 더욱 자라게 해 주세요. 

눈 앞에 이적이 아니라 온 주에 영향을 주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그려 내는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도 여러 회의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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