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04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 뒤에 압살롬은 자기가 수레와 여러 필을 마련하고, 호위병도 이나 거느렸다.

2 그리고 압살롬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가에 있곤 하였다. 그러다가, 소송할 일이 있어서, 판결을 받으려고 왕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압살롬은 그를 불러서, 어느 성읍에서 오셨느냐고 묻곤 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소속 지파를 밝히면,

3 압살롬은 그에게 "듣고 보니, 옳고 정당한 말이지만 사정을 대신 말해 사람이 왕에게는 없소" 하고 말하였다. 압살롬은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하였다.

4 더욱이 압살롬은 이런 말도 하였다. "누가 나를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 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소송 문제가 있을 때에 나를 찾아와서 판결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것이오."

5 누가 가까이 와서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하면, 그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곤 하였다.

6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였다.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7 이렇게 지났을 때에 압살롬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주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헤브론으로 내려가서 저의 서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8 종이 시리아의 그술에 머물 때에, 주님께서 저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시면, 제가 헤브론으로 가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9 왕이 그에게 평안히 다녀오라고 허락하니, 압살롬은 곧바로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10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첩자들을 보내서, 나팔 소리가 나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고 외치라고 하였다.

11 그 때에 이백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손님으로 초청받은 것일 뿐이며, 압살롬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따라가기만 사람들이다.

12 압살롬은 사람을 보내어서, 다윗의 참모이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 그의 성읍인 길로에서 올라오라고 초청하였다. 아히도벨은 길로에서 정규적인 제사 일을 맡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점점 커지니,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도 점점 많아졌다.

 

압살롬이 반역을 꾀합니다. 수레와 말을 모으고, 성문 곁에서 왕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 합니다.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인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1-6절). 그렇게 반란을 준비한 지 사 년이 지나고 압살롬은 다윗이 처음 왕이 되었던 헤브론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알리고, 다윗의 뛰어난 부하였던 아히도벨까지 합류하여 세력은 더욱 확장됩니다(7-12절).

 

압살롬이 성문 곁에서 반란을 준비한 4년의 기간 동안 다윗은 무엇을 한 걸까요?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것을 다윗은 몰랐을까요? 압살롬의 계략이 성공한 배경에는 백성의 마음을 돌보지 않은 다윗의 무책임함이 큽니다. 내가 보살펴야 할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의 마음이 허탄한 곳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합시다.

 

——

정당성이 없는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의 반역 도모는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다윗만해도 블레셋의 거대한 장군 골리앗을 무찌르며,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럼에도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어쩔 없이 도망자가 되었으며, 사울 입장에서는 반역자라고 소문을 내었다. 

허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라고 대우하며 그를 죽이지 않았다. 

반역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몇번이나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 다윗과 압살롬은 차원이 다른다. 

압살롬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활동에 제약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윗이 그가 하는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4년이나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다윗은 언젠가는 압살롬을 용서하려고 했을 것이다. 

기다리면서 압살롬의 죄의 값을 치를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그를 복권시켜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자체가 다윗의 이런 장기적 계획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4 동안 예루살렘 성문에서 백성들을 만나서 하는 말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일종의 왕자 수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왕이 되기 위해 백성들의 삶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행동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다윗 같은 전략에 뛰어난 사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첩보를 듣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알면서도 허용한 것이리라. 수업을 수행하는 압살롬을 은근히 대견해 하면서 말이다.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며 충분히 죄의 값을 치르고 나면 멋진 왕이 자격을 갖추게 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간다고 ,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헤브론은 다윗의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유다의 왕으로 지냈던 곳이다. 

헤브론은 다윗 왕국의 시작점이었다. 

그런 헤브론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 어찌보면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없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는 아들의 다짐을 엿보았던 아닐까. 

 

다윗은 사울 왕의 직계 자손도 아니었고, 정권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의 삶을 살다가 적국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망명도 했었지만, 반역을 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살롬의 다윗의 친아들이며, 왕의 계승 서열 1위이고, 여전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며, 점점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과거의 잘못이 더이상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 여러움을 주지 않을 상황이 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반역을 실행한 것이다. 

아들의 반역을 눈치 못한 다윗의 과신도 문제지만, 문제는 아들 압살롬에게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유지하기 위해 반역을 선택했다. 

욕망 덩어리 인간의 모습을 압살롬이 보여준다.

단순히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은 나라의 통치자와 권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관계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다.

욕망이 선을 넘었다. 

압살롬의 간계는 항상 선을 넘는다. 

암논을 살해하던 장면, 아버지를 알현하기 위해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장면, 그리고 반역을 위해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는 장면 모든 장면에서 압살롬은 선을 넘는 욕망을 보여준다. 

생계형 범죄, 우발적 범죄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욕망이 선을 넘자,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모아 계획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반역을 꾀한다. 

왕의 호의를 자신의 미래권력을 위한 마중물로 쓰고 있다. 

 

기준점

 

원래 사람이란 이런 존재들이다. 

기준점 효과라는 것이 있다. 

백신을 맞으면 현금으로 10만원을 준다는 정책이 시행되면, 그것이 기준이 되고 권리가 되어 백신은 돈받고 맞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리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수도 있게 된다. 

시혜가 권리가 된다.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럴 있으며, 주변의 사람들도 그럴 있다. 

나를 항상 돌아봐야 대목이 바로 지점이다. 

리더는 자기 자신이 선을 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한다. 

자기 맘대로 기준점을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기준점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존재가 세워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 기준의 기준이다. 그리고 하나님 통치 질서를 대변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기준을 제시하여야 한다. 

개인인 내가 기준점을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정관이 있고, 운영 규칙이 있다. 

운영위원회가 있고, 총회가 있다. 

모든 것이 바로 기준을 세우는 공동의 프로세스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를 돌아보고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용할 있는 기준의 세부규칙들이 작성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기준을 져버리고 선을 넘고 만다. 

자신들이 자연만물의 이름을 지을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기준을 어길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이것이 죄의 기원이 된다. 

 

속은 다윗도 문제지만, 속인 압살롬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압살롬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자신의 분노를 발전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선을 넘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기를 바랬다

결과는 보듯 뻔하다. 

 

——

인생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기준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인생의 기준이 되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항상 상황을 합리화하며 지내게 것입니다. 

저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것입니다. 

 

주님, 다시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기준, 예수님의 기준 앞에 다시 섭니다. 

더욱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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