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9월 21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덧붙여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드신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13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14 그런데 그의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므로, 그 나라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16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17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18 둘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벌었습니다.’

19 주인이 이 종에게도 말하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20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은 야무진 분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므로, 나는 주인님을 무서워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

22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 너는, 내가 야무진 사람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 알고 있었지?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화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24 그리고 그는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5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 그는 열 므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주석]

20절. 돈을 썩기 쉬운 수건에 싸 놓는 것은 돈을 취급하는 방법 중 가장 무책임한 것이며, 이는 그곳이 어리석거나 불충분하거나 하니면 둘 다라는 것을 시사한다(IVP 성경배경주석).

 

[오늘의 묵상]

인간의 정신 노동은 시간의 한계가 있다.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체력과 정신력 둘 다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가능하다. 

관성에서 벗어나 정신노동의 강도를 높였더니, 육체가 감당을 못한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주여, 연약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열 므나 이야기에서 항상 놓쳤던 부분이 몇 가지가 눈에 띈다. 

1. 이 이야기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이라도 완성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교정하는 것이다. 

2. 삭개오 본문과 이어진다. 삭개오 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으로 맥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3. 여리고 삭개오 집에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과잉 기대하고 있다. 

4.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말씀에 그분의 왕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5. 10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 맡겼다. 

6. 10므나, 5므나 남긴 종과 장사를 아예 하지 않은 종, 이렇게 3명만 드러나는데, 사실은 나머지 7명의 종도 있었다. 

7. 장사를 하지 않은 종은 주인이 야무진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 못 알고 있는 지점이다. 

 

하나님 나라는 당장 완성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 가까워져 가는 것은 사실 왕권을 받으러 떠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죽음, 부활, 승천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시작하는 과정의 첫 부분에 해당한다. 

이제 예수님은 왕권을 받으러 하나님께로 가신다. 

한 동안은 기다려야 한다. 

 

그 와중에도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작전이 계속된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계속 탄원서를 올린다. 

기도의 탄원서에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는 민란의 원흉이다. 

그는 겨우 세워 둔 유대교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자다. 

메시아는 커녕, 거짓말 사기캐다. 

이런 내용들로 예수님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 10명의 종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10명의 종들이 그 귀족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장사는 장사꾼이나 시민들이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어렵지만 가능한 일이다. 

10므나를 남긴 종, 5므나를 남긴 종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혜롭게 장사를 잘 했다. 

중간 중간에 시민들의 방해 공작과 폭력배들의 자릿세 요구가 성행한다. 

그냥 수건에 쌓아 보관한 종은 아마도 이런 주변의 압박이 무서웠을 것이다. 

게다가 주인이 정말 왕권을 가져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니, 오고 가는 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시민들이 자객을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사를 잘 할 자신도 없었다. 

괜히 돈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공격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은행에도 맡기지 못하고, 이자를 위한 사채도 생각 못한다. 

그저 꽁꽁 싸매어 둔다. 

두려움 그리고 회피, 그를 휘감싼다. 

분별력을 잃었다. 

주인에 대한 신뢰도 없다. 

주인이 정말 왕이 될지도 확실하지 않다. 

 

주인이 언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았는가? 

주인이 언제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가? 

주인은 언제나 부르시고 맡기시고 심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부르시고 맡기시고 심으신다. 

그리고 찾으신다. 

과정에서 도우시고 열매 맺도록 이끄신다. 

그리고 거두신다.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해도 단단히 했다. 

종은 주인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오해했고 두려워했다.

하나님은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당연히 경외를 받으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이시다. 

은혜와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두려워서 주눅들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한 므나를 수건에 싼 종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인격적 교제를 제대로 나눈 적이 없는 사람이다. 

주인이 어떻게 그동안 장사를 해 왔는지, 거래를 해 왔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도왔는지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종이다. 

주인은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장사를 잘 하는 분이셨다. 

다른 종들은 그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이 종은 배울 생각이 없었다. 

결국 장사를 시켰는데, 장사를 하지 않았다. 

 

열 명의 종 중에 3명만 등장하는데, 나머지 7명도 제각각 장사를 했을 것이다. 

많이 남기는 종, 적게 남기는 종, 아니 장사하다가 손해 본 종도 있었을 것이다. 

귀족은 돌아와서 열심히 장사한 모든 종들을 칭찬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손해 본 종에 대해서도 고생했다고 칭찬했을 것이다. 

왜냐면 장사할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 

주인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심상치 않았다. 

주인의 종이라고 하면 위협을 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종은 장사를 잘 해 돈을 벌다가 시민들의 다양한 공격에 자본금까지 날려 버렸을 수도 있다. 

너무 멀리 나간 거지만, 예수님은 그 종도 칭찬했을 것이다. 

수고했다 할 것이다. 

왜냐고? 신약의 나머지가 고난받는 예수의 제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인내를 말하기 때문이다. 

순교를 말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열매가 없을 수가 있다. 

스데반 같은 분, 야고보와 같은 분은 예루살렘 교회 초기에 순교했다. 

예수님이 이런 분들을 보면서 장사를 못했다고 화를 내시겠는가? 

도리어 다른 차원에서 장사를 잘 한 것이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남겼냐 남기지 않았냐의 산술 계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주인을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이다. 

장사를 했느냐의 문제다. 

주인을 야무진 사람으로 알아 시킨 일을 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느냐의 문제다. 

 

나를 부르신 그분의 소명에 끝까지 충성되이 임하는 것. 

열매와 결과는 그분께 맡기고 최선을 다해, 지혜를 다해, 시키신 일, 맡기신 일을 하는 것. 

그분에 대해 오해하지 않고,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그날까지 사명에 신실하는 것.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장사하는 것. 

오늘 당장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저 하루 최선을 다해 그분의 일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정신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며, 최선을 다해 조율하고 생각하고 소통하고 실행하고 기도하는 것. 

 

그래 이제 장사하자.

 

[오늘의 기도]

주님,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저에게 주신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열 므나 비유 말씀이 저를 격동시킵니다. 

충성스런 종이 되고 싶습니다. 

아들이면서 종이 되고 싶습니다.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얼마를 남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람들을 돕고,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겠습니다. 

 

주님, 

어떻게 장사를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주님의 모범을 따르고 싶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원합니다. 

주님, 도우소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6월 23일 금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어서 빨리 나를 도와주십시오.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19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21 그 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26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27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주석

가장 작은 자(28절) 요한은 그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시대는 하나님 나라가 오면서 끝났다. 자기 생애에서 예수님의 왕적 통치를 경험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라도 심지어 요한이 일찍이 알았던 것보다 더 큰 경험을 하게 되었다(BST 누가복음).

 

[오늘의 묵상]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요한에게 알렸을 것이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나 사도 요한도 어떤 방식으로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연락이 닿았을 것이다. 

수많은 이적과 기적, 병고침과 축사… 이 모든 것을 보고 했다. 

세례 요한은 그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던 어느 순간(마 11:2), 요한의 마음에 의심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과연 내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의 사촌 동생 예수가 맞는가? 

정말 그런가? 

감옥은 모든 것을 의심하기 좋은 공간이다.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해 반추하고 의심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간이다. 

조용하고, 할 일이 별로 없다. 

기도하며 생각하고 혹여 책이라도 있으면 읽게 되는 공간이다. 

요한은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예수가 감옥으로 찾아오기를 바랬을 수도 있다. 

위대한 메시야 예수, 억울하게 갇힌 자를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공언하시는 예수. 

지금 자신보다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세례를 베풀었고, 권력자의 비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비참하다. 

감옥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 

예수를 잘 안다. 

그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올 때부터 오감과 육감의 센서가 극대화되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였다. 

그 분명했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 왜 나의 억울함은 해결해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제자들을 통해 들은 예수님은 정말 대단한 분 맞고,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그런데 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시는가? 

감옥에 한 번 찾아와서 위로도 해주고, 축복도 해 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일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제자들을 불러 예수께 다녀오라고 시켰다. 

예수님은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사역을 다시 나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세례 요한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세례 요한이 느꼈을 여러 감정과 생각에 대한 예수님의 치료책이다. 

의심, 두려움, 그리고 미묘한 경쟁 의식…

한 번 의심이 찾아오면, 다양한 감정이 몰려온다. 

‘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등의 생각이 그것들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마음을 꿰뚫고 계셨다. 

의심도 필요없고, 거기서 파생된 비교의식과 좌절도 멈추어야 했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그것이면 되었다. 

잘 한 것이다. 

비록 감옥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본질이 바뀌어서는 안된다. 

요한의 사명은 거기까지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 길로 걷고 있었다.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 

너무 아쉬워 할 일이 아니다. 

이제까지 믿고 견뎠던 그 삶을 부정하지 마라. 

현재의 고난 때문에 소명과 진실을 흐릿하게 만들지 마라. 

굳게 서서 끝까지, 죽음의 순간까지 확신했던 바를 지키라. 

예수님은 메시야가 맞고, 세례 요한은 그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했던 위대한 예언자가 맞다. 

그러니 감옥에 갇혀있어 외롭고 힘든 순간에도 그 사실을 저버리지 마라. 

예수님으로 걸려 넘어지지 마라. 

그분은 예수님의 길이 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원망이나 의심이나 불신을 유지하지 마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야 막을 수 없겠으나, 계속 그런 생각을 붙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 불행한 선택을 하지 마라. 

예수님 때문에 넘어졌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 

 

그리스도인들, 특히 사역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자신의 소명대로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마라. 

그것은 소명이 아니고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소명을 달성하면 주님께 가면 된다. 

 

나에게 주신 소명을 위해 계속 달려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소명을 달성했을 때, 쿨하게 지극히 만족스런 얼굴로,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 

그 소명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에너지와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 

오늘도 제게 주신 소명을 다시 바라보고 더욱 집중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게 주신 당신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매일 매일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사역적으로, 가정적으로 제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하옵소서. 

소명을 따라 살되, 웃음과 쾌할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집중과 진지함이 유머와 즐거움을 집어 삼키지 않게 하소서. 

즐거이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4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0 이스라엘 백성을 부리는 강제노동 감독관들과 작업반장들이 나가서,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다. "바로께서 명령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더 이상 짚을 주지 않겠다.

11 너희는 가서, 너희가 쓸 짚을 직접 구해 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의 벽돌 생산량이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하셨다."

12 그래서 백성들은 온 이집트 땅에 흩어져서, 짚 대신으로 쓸 곡초 그루터기를 모아 들였다.

13 "너희는, 짚을 공급받을 때만큼 벽돌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감독관들은 이렇게 말하며 그들을 몰아쳤다.

14 바로의 강제노동 감독관들은 자기들이 뽑아서 세운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을 때리면서 "너희는 어찌하여, 어제도 오늘도, 벽돌 만드는 작업에서 너희가 맡은 일을 전처럼 다 하지 못하느냐?" 하고 다그쳤다.

15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이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였다. "어찌하여 저희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16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17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 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

18 썩 물러가서 일이나 하여라. 너희에게 짚을 대주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는 벽돌을, 맡은 수량대로 어김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19 이스라엘 자손의 작업반장들은 매일 만들어야 하는 벽돌의 수를 줄일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들이 곤경에 빠졌음을 알았다.

20 그들은 바로 앞에서 나오다가, 자기들을 만나려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과 마주쳤다.

21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벌을 내리시면 좋겠소. 당신들 때문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있소. 당신들은 그들의 손에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어 준 셈이오."

22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주님께 돌아와서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 곳에 보내셨습니까?

23 제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로는, 그가 이 백성을 더욱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주석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칼(21절) 바로는 벽돌을 만드는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욱 힘들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벽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짚도 제공받지 못했다. 히브리인 십장들에게 이것은, 마치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이스라엘 민족 말살 운동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모세와 아론을 바라보았다(IVP 성경주석).

 

바로의 명령을 받은 강제노동 감독관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료를 직접 구해서 벽돌을 만들되, 재료를 공급받을 때처럼 벽돌을 생산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립니다(10-13절). 감독관들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이스라엘 작업반장들은 매를 맞았고, 이런 자신들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호소합니다(14-16절).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절망뿐입니다(17-19절). 작업반장들은 이런 상황의 원인 제공자인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고, 모세는 주님께 호소합니다(20-23절).

 

바로의 분노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구체적인 폭력과 책임 전가를 낳습니다. 불합리한 지시와 강압, 권위자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작업반장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신의 선의가 도리어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는 모세의 입장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 봅시다. 혹 내가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토로합시다.

 

 

[오늘의 묵상]

강제 노동, 쉴래야 쉴 수 없는 쳇바퀴의 삶.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환경. 

일하는 기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강제 노동이 더욱 심화된다. 

재료의 공급이 없이 생산하라고 한다. 

작업 물량도 이전과 같다. 

노동 강도만 더욱 올라간다.

히브리 작업 반장들이 바로를 직접 찾아간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저 감독관들이 임의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면 최고 권력가의 영향인지 확실히 알아야 했다. 

바로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용기있게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최악이었다.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가 들린다. 

마치 히브리 민족들이 일하기가 싫어서 광야에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알려진 것이다. 

바로 왕에게 미움을 샀다. 

안 그래도 힘든 삶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작업 반장들은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중간 관리자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막노동자들에 비하면 대우도 괜찮았다. 

이제 그 마저도 어려울 상황이다. 

바로에게 죽든지, 동족 사람들에게 죽든지 하는 상황이다. 

 

1. 작업반장 시점

원망이 몰려온다. 제사드리러 광야로 가자로 제안했던 모세와 아론이 원수가 되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히브리 장로들과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이제는 고스란히 일하다 죽든지, 도망가다 죽든지 할 상황이다. 

별 볼일 없는 리더십이지만, 어쨌든 작업반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사람들로서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모세와 아론, 그 작자들이 원흉이다. 

살인 충동이 몰려든다. 

언제 모세와 아론이 우리들의 리더였는가? 

언제 그들의 말에 우리가 휘둘렸던가? 

살인자 집안… 한 때 그들 때문에 우리 동족이 큰 위협에 빠지지 않았던가? 

40년전의 그 상황을 여전히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을 규합하여 모세와 아론을 몰아내야 한다. 아니 그들을 살해해서 우리의 뜻을 바로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괜히 방치했다가는 우리가 죽을 판이다. 

우리 동족들이 죽게 생겼다. 

마침 그들을 만났다. 죽이자… 

 

2. 모세의 시점

일이 이상하게 꼬인다. 

바로가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이 권위가 안 선다. 

나(모세)로서는 예견되었던 상황이다. 

시내산 떨기나무 불 앞에서, 그렇게 안 가겠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제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과연 이적으로 바로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앞선다. 

형을 만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왕궁의 말을 잃어버렸다. 

겨우 일상 생활 용어만 알 뿐이다. 이렇게 중요한 협상을 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언어를 자연스럽게 이집트말로 구사할 수가 없다. 

아론 형이 도와줘서 바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일로다. 

히브리 사람들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분노가 느껴진다. 

바로에게 죽기 전에 동족에게 죽을 판이다. 

아 작업반장들에게 들린 저 작업도구들이 살해 도구로 보인다. 

고통스럽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맡았는가? 

왜 내가 여기에 왔는가? 

이러다간 나와 내 가족 모두 몰살 당할 판이다. 

아…. 도망가고 싶다. 아… 하나님을 만나기 전으로 가고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마난 순간부터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 걱정과 두려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다. 

 

3. 나의 시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니면서 신비로운 이적을 많이 보았지만, 

그만큼 고통스런 순간도 많았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오해와 미움을 샀다.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라고 있을라치면 그것도 너무 고통스럽다. 

제자의 삶이 이렇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힘든 길을 걸어간다. 

기쁨과 즐거움이 없었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슬픔과 자기부인과 오해도 있었다. 

나를 계속 말씀 앞에 돌아보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나의 욕망을 줄이고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 어렵다. 

 

연휴의 마지막 날, 

다시 사역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수많은 소통 속에 지쳐가지 않기를… 

주님의 은혜로 위기의 순간을 넘어가기를… 

힘들고 어려운 순간, 누군가의 원망과 분노를 받아내야 하는 순간, 주님의 도움심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의 기도]

어려운 삶을 부탁하신 예수님, 

싫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쉽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부담입니다. 

주님, 억지로 가지 않게 해 주세요.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가게 해주세요. 

네팔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BWTsnZdajY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이 벌어집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세속 사회, 4차 산업 혁명 시대, 우주 시대를 맞아 교만할 대로 교만해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에는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주의 백성 삼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이 저의 기쁨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7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9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10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주석

젖과 꿀이 흐르는 땅(8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그 땅이 풍성한 목가적 생활 방식을 누렸음을 말하지만, 반드시 농업적인 면에서만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젖은 가축의 산물인 반면, 꿀은 자연 자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은 아마도 꿀벌의 꿀보다는 대추야자 당밀을 의미할 것이다(IVP 배경주석).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7-9절). 그리고 이를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10절). 모세는 자격 미달을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11-12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보내십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헌신할 영역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아봅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셨다. 

그들의 부를짖는 소리를 명료하게 듣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잘 알고 계신다. 

오랫동안 진행된 가중된 고통, 그 한계를 넘어섰다. 

400년 중에 지난 100년이 가장 힘겨웠을 것이다. 

모세의 탄생 시점에 바로가 선보인 정책은 그야말로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정책이 입안된다는 사실이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 

노예가 많이 태어나면, 그것도 남자가 많이 태어나면 노동력이 증가하고 군사력이 강화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정책을 편 것이 아니다. 

강대해진 번성한 히브리 종족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정책을 편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은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리더로 왕궁에 있는 모세를 은근히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히브리 세력은 이집트 왕궁에서 축출되었다. 

 

탄압 정책은 더욱 거세어 졌다.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였을 것이다. 

남자 아기들이 죽는 것도 그렇지만, 노동자들도 쉬지 않는 노동에 지쳐 금새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밤마다 죽어나가는 마을 사람들, 친척들, 특히 젊은이들을 보며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르짖음의 소리가 매일 울려퍼진다. 

히브리 민족의 한계가 온 것이다. 

더이상 이집트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전에는 이집트에서 번성하면서 나름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란 꿈이 있었다. 

당당하게 이집트 왕국의 한 민족으로서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란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야말로 씨가 마를 지경이다. 

몇 십년만 더 지나면 히브리 민족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다. 

그리고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내려가서”(8절)이다. 

그분이 내려오신단다. 그분이 직접 이집트 땅으로 오셔서 히브리 백성에게 다가오신단다. 

또한 그분이 하실 일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12절)이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있음으로 이집트 땅에 내려오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신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실패한 일을 모세에게 다시 시키신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 내려가셔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신다. 

당신이 직접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결국 자신의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시고, 그를 통해 사람들을 구출하고 구원하신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사도들을 보내셨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셨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한다. 

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구조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 악한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이들을 구출하시러 하나님은 사람을 혹은 사람들을 보내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다. 

신비로운 상상 속 세계가 아니다. 황홀경의 세계가 아니다.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지극히 현실에 뿌리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요 그들을 위한 구출 역사다. 

 

어제 오늘 두 분의 장례식에 문상다녀왔다. 

82세, 84세. 

죽음을 맞으신 분들 앞에서 나오는 대화들은 또 다른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픈 사람들, 암과 섬망과 침해 증세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 고통받는 사람들 옆을 지키고 돌보느라 또 고통받는 사람들… 

우리는 그렇게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이런 고통에서 인류를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인간사에 내려 오셨다. 

죽음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악과 죄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분이 오신 것이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러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성령님과 함께 오신 것이다. 

 

우리에게 모세는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또한 누군가를 부르신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출하라고 부르신다. 

그 누군가가 나라면…

 

[오늘의 기도]

주님,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며칠 사이에 많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고통이 바로 옆에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끄는 사단의 세력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구출하기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좀더 적극적으로 돕게 해주세요. 

주님의 구출작전에 참여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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