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10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22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23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다.24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25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26 너희가 지극히 작은 일도 못하면서, 어찌하여 다른 일들을 걱정하느냐?27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28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29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30 이런 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31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32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33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34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The Message

There is far more to your inner life than the food you put in your stomach, more to your outer appearance than the clothes you hang on your body(23절).

 

People who don’t know God and the way he works fuss over these things, but you know both God and how he works. Steep yourself in God-reality, God-initiative, God-provisions. You’ll find all your everyday human concerns will be met(30절).

 

주석

31절.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모든 삶을 그분의 통치 아래 놓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두는 것을 말한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거주 공간이 정해지지 않았다.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예수님을 따라 이곳 저곳 여행을 다닌다. 

그동안 배고프고 잠자리가 불편해도 예수님의 사역을 옆에서 보기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자리를 비운다고 하신다. 

죽음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도 하셨다.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은 여전히 살기등등하다.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곳곳에서 지켜보고 전략을 짜고 있다.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양을 늑대에게 보내는 심정… 

곳곳이 지뢰밭이다. 

 

걱정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제자들의 앞날이 걱정이다. 

예수님도 그들을 걱정한다. 

그리고 제자들도 자신들의 앞날이 걱정이다. 

그리고 이런 걱정은 너무 당연하다. 

걱정없이 지낼 수가 없다. 

 

걱정과 우려는 계속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공동체에 있는 한, 어떤 사회에 속한 이상, 우리는 걱정이 늘어만 간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공동체를 돌봐야 하고, 사회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관리는 걱정과 염려가 기본이다. 

걱정, 염려가 없으면, 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긴장을 끈을 놓으면 관리 소홀로 흐르고, 결국 누군가는 큰 손해를 입거나 상해를 입는다. 

인사, 재정, 행정, 행사, 교육… 어느 것 하나 손쉽게 되는 일은 없다. 

누군가가 치열하게 준비하고, 사고를 예방하고, 위기를 관리하고,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걱정과 우려가 없을 수가 없다. 

공동체는 걱정과 우려를 어떻게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웃음과 열매로 승화시키느냐와 관련이 있다.

관리자, 리더십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과 염려, 우려 만으로는 승화시킬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관리자와 리더십의 꼼꼼한 시나리오도 감당이 안되는 지점이 있다. 

그건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하는 영역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해도,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런 자원도, 인력도, 혹은 그런 철학도 공유되기 어렵다. 

결국 누군가는 불평하게 되고, 누군가는 비난하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엔 그저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에 입각한 결정을 계속 내려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절대적 필요를 채우는 방식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길 원한다. 

1억을 버는 사람은 10억, 100억을 벌기 원한다. 

100억을 버는 사람은 천억을 벌고 싶어한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 

돈을 쫓으면, 하나님이 들어설 마음의 공간이 없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길 기뻐하신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라고 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목적어는 바로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에 의해 우리는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된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을 하는 법을 배운다. 

하나님 나라를 내가 속한 곳에서 살아내는 것을 배운다. 

그러기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함께 “성령님”이시다. 

이 두 가지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이다. 

 

내가 가진 능력과 시간과 에너지와 소유를 활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 

기도한다. 

갈망한다. 

허망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내린 하나님 나라다. 

가정, 교회, 직장, 일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길… 

다시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랫동안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 왔습니다. 

가정, 교회, 직장,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연히, 명확히 드러나게 해 주세요. 

사랑하되, 더 사랑스러운 공간이 되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감당하게 해 주세요. 

일을 꼼꼼하게 해서 약자들에게 더 자원과 돌봄이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결국 사랑입니다. 

일과 사랑은 이렇게 만납니다. 

주님, 

제가 일을 더 잘 해서, 하나님 나라에 잘 어울리는 사랑에 더 가까워지도록 도와주세요. 

지혜를 주세요. 

솔로몬이 간구했던 지혜는 하나님 나라를 잘 이루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저에게도 그 지혜를 주소서. 

더불어 겸손도 허락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28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22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십시오.

 

 

바울은 일상의 자리에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것을 권면합니다(16-18절). 그리고 성령과 예언을 굳게 붙들며, 분별력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을 이야기합니다(19-22절).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결국 기쁨과 감사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구절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암송했었다. 

그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참 지키기 어려운 권면이며,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도리어 항상 기뻐하는 것,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주 비판하고 자주 문제 제기하는 것이 기독 지성인의 일이며, 책무며, 삶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 생각에 100%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반기를 들고 싶다. 

기독 지성인의 책무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지, 어떻게 쉬지말고 기도할 수 있을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지를 연구해야 한다. 

비판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문제제기 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장 어려운 고도의 지적, 심적 작업 아닌가!! 

 

기쁨이 사라진 문제제기, 감사가 빠진 비판이 얼마나 오래갈까. 

그것은 관계를 망가뜨리고, 스스로도 망가뜨린다. 

마음 속에 기쁨을 유지하고, 감사의 마음을 강화하고, 하나님께 기도의 제목을 언제나 올린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고,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사랑과 정의가 더욱 확산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욕하거나 무시하거나 힐난하지 않고 이슈와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협력할 바를 찾고, 거부할 것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좀 더 나은 건설적인 대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 비판적 생각을 연습하기 위한 비판, 인격을 모독하는 비판은 삼간다. 

비판적 생각을 연습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공개하지 않을 글로 정리해서 논리성을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남을 깎아 내리고, 비판의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지 않고, 인격을 모독하는 등의 관계 파괴형 비판은 금물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살면서, 문제제기가 삶의 디폴트 값이 되어 버렸다. 

문제 제기 하는 사람이 결국 영향력을 갖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문제 발견형 감각과 논리 구조가 몸에 박혀 있다. 

기계처럼 반응한다. 

기쁨, 감사, 기도가 작용하지 못한다. 

사역자들 가운데도 많은 경우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설교를 하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문제 찾기 일환이다. 

 

그러니 “비판/문제제기”와 “기쁨, 감사, 기도” 사이의 모순 관계가 놓이게 되며, 둘 다를 지혜롭게 잘 하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바울은 이 난제에 해답을 성령님으로 보는 것 같다. 

성령과 예언을 대뜸 들이댄다. 

성령님이 없이는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성령님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이끌어 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다.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기쁨을 유지하라. 

피곤함이 주관하지 않도록, 기쁨과 감사가 내면에 흐르도록, 성령님께 기쁨 호수의 댐 수문을 주장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성령님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아름답고 멋진 모습들을 계속 묵상해야 한다. 

지식만이 아니라 더 크게 풍성한 감정의 물꼬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언 관련해서는 분별이 핵심이다. 

과연 이 예언, 즉 대언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사탄의 속임수인지, 아님 나의 욕망과 내면의 소리인지 구분해야 한다. 

그 구분이 핵심이다. 

그걸 구분할 수 있으면 성령님의 역사를 더욱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

그러면 기쁨과 감사가 찾아온다. 

더불어 기도가 끊어지지 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즐거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 기쁨이 찾아오길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님, 

도우시고 이끄시고 실마리를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 

오늘도 기쁨과 감사가 사그라드는 이 세상에서 오직 주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다시 살아나게 하소서.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미지에 주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자주 생각나게 하소서.

예언의 말씀을 분별, 분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식, 알아차림, 이해하게 하소서. 

그것이 마음의 내적 기쁨을 낳고, 감사를 흐를게 하고, 기도의 끊을 더욱 붙잡게 합니다. 

부담스런 모든 시간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4월 12일 수요일

 

여는 기도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소서.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2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3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NASB

knowing, brothers and sisters,beloved by God, His choice of you;(4절)

 

주석

4절 ‘택하심’(4절)은 유대인들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적용하는 용어였다. 여기서 바울은 그 말을 많은 이방인 회심자들을 포함하는 교회에 사용한다(IVP 성경배경주석).

 

바울은 감사의 고백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2절).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며 보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입니다(3절).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택하셨습니다(4절). 또한 바울 일행은 복음을 말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5절).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전한 복음은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열매 뒤에는 하나님과 복음전도자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뿌린 대로 거두는 농부의 일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

1. 감사의 이유

새로운 편지다. 

고린도교회와는 다른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상황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다. 

기대가 된다.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어떤 주제와 강도와 뉘앙스로 말씀을 하실지 기대가 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바울의 기도 가운데는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그 교회 성도들은 믿음, 사랑, 소망이 조화를 이룬다. 

믿음에는 행위가 따랐고, 사랑에는 수고가 더해졌다. 

소망은 인내를 낳았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바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이 데살로니가교회에 넘친다. 

 

믿음과 행위가 같이 붙어 있다는 것은 신약의 핵심 주제가 통합되었다는 뜻이다.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자연히 그분의 뜻에 따르는 행위가 이어진다. 

단순히 인식, 지식으로서의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그토록 강조했던 부분이다. 

바울도 믿음과 행위를 언제나 통합해서 강조했다. 

 

사랑은 어떠한가? 

사랑은 수고로 이어진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수고하지 않으면, 그건 말로만 하는 사랑이요, 단순한 감정적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랑은 상대에 대한 민감한 상황 파악과 섬세한 돌봄으로 이어진다. 

수고가 없이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요 속임수다. 

 

소망은 어떠한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당연히 인내를 낳는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원하는 시간에 완성된다. 

따라서 그 때를 기다리는 행위가 뒤따른다. 

 

믿음, 사랑, 소망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라면, 행위, 수고, 인내는 몸을 통해 외부로 표출되는 행동이다. 

내면의 작용과 외부로의 행동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것인 신앙인의 자세다. 

이 신앙인의 자세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감사를 드리게 한 것이다. 

 

나와 주변의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기를 소망하게 된다. 

내면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어떻게 그것이 이뤄질까? 

 

2. 능력, 성령, 큰 확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강연을 통한 복음 설명이 아니었다. 

바울이 가르친 복음에는 능력이 함께 했다. 

그 능력은 성령님으로부터 나온 능력이며, 따라서 다른 철학이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수준의 확신을 넘어선다. 

성령님은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신다.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신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능력이다. 

사람의 마음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을 닫아 놓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말을 거는 것 자체다 곤욕이다. 

하지만,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연다. 

그 능력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변화된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큰 확신으로 다가간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며, 사람들은 그 나라로 몰려 들고 있다. 

 

바울과 그의 선교팀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다. 

전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새로운 율법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이집트에서 당연히 생각하던 것이 바뀌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도 그와 같다. 

새롭게 바뀐 규정과 질서 속으로 몰려간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통치과 다스림을 기대하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니 바울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으니, 더욱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부활절을 지나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숨, 곧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다. 

그분이 사람을 바꾸시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분이 사람들을 이끄시고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만드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야 한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면, 주되심의 경험이 부족하면 능력, 성령, 큰 확신은 사실 거리가 멀다. 

말로 하는 것 말고, 지식으로 전달하는 것 말고, 성령님의 변화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사역자의 필수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과연 나는 이런 능력, 성령,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숱한 이론들의 경쟁에서 실제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군가의 이론이나 누군가의 욕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는 가고 있는가? 

많은 논의와 결정의 끝에는 과연 예수님이 있는가? 

 

[오늘의 기도]

몸소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여주신 주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그 일을 보여주신 주님, 

제가 지금 이곳에서 이렇게 주님을 향하고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많은 선배들의 믿음의 행위요 사랑의 수고요 소망의 인내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저는 그분들의 뒤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주님, 저에게 주어진 분량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믿음에 행위를 더하소서. 

말만이 아니라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하게 하소서. 

사랑에 수고를 더하소서. 

사랑한다 말만 아니라 그 사랑이 실증이 되도록 수고하게 하소서. 

소망에 인내를 더하소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고 고백이 끝까지 이어지게 인내하게 하소서. 

 

오늘은 말과 신경과 마음을 참 많이 썼습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주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세요. 

누구도 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완전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1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7 돌판에다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비록 곧 사라질 것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8 하물며 영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9 유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면, 의를 베푸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참으로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이제 훨씬 더 빛나는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11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 생길 때에 영광을 입었으니, 길이 남을 것은 더욱 영광 속에 있을 것입니다.

 

주석

7-8절 바울은 옛 언약에 영광이 동반된 것을 인정하지만 새 언약에는 더욱 큰 영광이 동반된다고 주장한다(IVP 성경주석).

 

돌판에 새긴 옛 언약은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새 언약은 사람을 살립니다(6-8절). 옛 언약은 유죄를 선고하지만, 새 언약은 의를 베풉니다(9절). 새 언약의 영광이 훨씬 더 빛나기 때문에, 옛 언약은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10절). 옛 언약은 사라질 것이지만, 새 언약은 빛나는 영광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11절).

 

옛 언약을 강조한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정죄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은 의를 베풀며 성령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과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옛 언약은 무엇인가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다가 갑자기 신학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추천장 사건이 신학적 사고로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문서로 작성된 추천장이 아니라, 바울이 전도하고 가르친 사람들 마음 속에 새겨진 새로운 언약이 바울의 추천장이었다. 

그러기에 그 추천장에 대한 설명을 더욱 신학적으로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영이 대조를 이룬다. 

돌판에 새긴 율법의 역할은 대체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록해 두었고, 그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어겼을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가 주를 이룬다. 

물론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언약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율법의 메인은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고, 십계명에서 파생된 여러 규정들이며, 이는 해야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처벌하고 구제한다. 

율법에 은혜가 없는가? 

아니다. 율법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기보다 법률로 해석하고 처벌의 기준으로 삼으며, 때로는 이 법률로 사람을 처형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길거리 집단 사형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 성령의 법은 다르다. 

사람을 죽이는대신 살리는 일에 집중한다. 

회복시키고, 원형을 보존하고, 다시 시작할 힘과 용기를 공급하신다. 

죄인의 죄인됨을 율법의 규정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양심의 법으로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돕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돕는다. 

따라서 영은 생명이며, 그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의 직분을 갖고 사는 것이다. 

율법도 영광 속에서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더욱 큰 영광으로부터 왔으며,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 우주적 영광을 통해 성령님이 폭발적으로 운행하시게 되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사람들 마음 속에 그야말로 각인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차리고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게 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직접 성령님을 통해 일하신다.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이제는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셨다. 

영원한 진리이며, 이로써 모든 영광보다 뛰어난 영광이 되셨다. 

 

사람들은 이제 성령님을 통해 새 언약으로 들어간다. 

새 언약은 마음 속에 새겨지고, 언제든지 확인이 가능하다. 

성령님의 마음 속 역사를 감지하게 된다. 

사람들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그 사람들을 통해 세상의 역사를 이끄신다. 

따라서 세상에 개입하시는 성령님을 감지하는 능력도 조금씩 길러진다. 

악한 영의 개입도 많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알아간다. 

하나님 나라를 추동하시는 성령님의 개입을 알아차린다. 

새 언약 백성들은 그렇게 성령님의 일하심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거짓을 폭로하시는 성령님을 본다. 

JMS를 비롯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거짓을 세상에 알린다. 

이만희, 정명석같은 자들의 거짓을 폭로하신다. 

병을 고친다고 하고 미래를 알아 맞춘다고 해서 모두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무당이 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 열매로 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셨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신도를 강간하고 가스라이팅하고 죽인다고 협박하는 교주가 어떻게 예수님이요 메시아라고 할 수 있는가? 

왜 성경을 비유로 풀려고 하는가?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서사가 있으니, 모든 것을 비유로 풀려는 시도는 사이비의 전유물이다. 

 

성령님은 거짓을 폭로하고 진리를 보존하신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자들은 성령님과 거리가 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함부로 왜곡한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진다. 

진실을 기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중심으로 결정한다. 

거짓 속에 탐욕이 있고, 그 탐욕을 이용해 사단이 활동한다. 

성령님은 진실을 좋아하시고,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신다. 

감추지 않으시고 빛으로 드러내셔서 만천하가 알게 하신다. 

사람의 약함도 진실이고 사람들의 악함도 진실이다. 

약함과 악함을 드러내고 인간이 그 자체로 신이 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신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다시 알려주신다. 

 

영광스러운 영의 직분을 맡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영광이 더욱 영화롭게 드러나길 고대한다. 

사이비, 조폭, 권력에 의한 폭력, 학폭 등등 

숨겨지고 조작되고 그래서 피해자는 더욱 고통스럽고, 가해자는 도리어 땅땅거리며 살아가는 거짓의 세상에 영화로운 성령님의 빛이 임하길 기도하고 고대한다. 

거짓은 물러가고 모든 것은 밝은 빛 앞에 드러나라. 

 

 

[오늘의 기도]

영광의 하나님, 

새로운 언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생명의 법이 작동하도록 도와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성령님이 역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을 더 빠르고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더 분명히 드러나길 기도합니다. 

 

사이비 교주의 거짓말에 속아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세요. 

전쟁도 극악하지만, 사이비들의 거짓과 가스라이팅도 그에 못지 않게 극악하고 더럽습니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젊은이들을 보호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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