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7월 06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26 그들은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27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28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29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30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31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32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34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도망가서 읍내와 촌에 알렸다.35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36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37 그러자 거라사 주위의 고을 주민들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가시는데,38 귀신이 나간 그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39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 그 사람이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

 

주석

26절. 마태복음에 나오는, 호수에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가다라’(마 8:28)와 호수에서 약 4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거라사는 전반적으로 같은 지역인 데가볼리에 있었다. 이 지역은 눈에 띄게 비유대적인 지역이었다(IVP 성경배경주석).

 

30절. 예수님이 이름을 물으시자 귀신이 “군대”(Le-gion)라고 답한다. 이 라틴 차용어는 헬라어로 군부대, 즉 4천 명에서 6천 명의 군인으로 이루어진 ‘레기오’(Legio)를 가리킨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 쇠사슬과 쇠고랑 

이방인의 땅 거라사에 예수님이 찾아가신다. 

그 곳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귀신들은 그 사람을 붙잡아 광야로 끌고 나가 죽이려고 했다. 

아니 광야로 끌고 나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게 하려고 했다. 

그의 존재만으로 광야는 두려움의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돼지를 치며, 놀이를 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지 괴성과 으르렁 소리와 꺅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곳, 발가벗은 때가 잔뜩 묻은 남자가 갑자기 튀어 나와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광야는 귀신이 지배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귀신에 의해 마을에 갇히고 말았다. 

귀신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자신의 한계에 갇히게 하고, 자유를 박탈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힘을 모아 귀신들린 자기 마을 사람에게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웠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울 때, 어마어마한 몸싸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신이 온전한 순간에 동의하에 진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가 맞을 것이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우는 것을 자발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귀신은 그 순간에 발악을 했을 수도 있다. 

귀신들린 그 마을 사람은 나머지 마을 사람들의 완력으로 겨우겨우 묶어서 결국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웠다. 

귀신은 자기가 들어간 그 사람만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 아니었다. 

온 동네 사람들, 노약자와 여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마을 사람들은 쇠사글과 쇠고랑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언제 끊을지 모를 지경이다. 

 

사단은 사람들을 가둔다. 

억압한다. 

지금도 각종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세상과 격리시키고, 공동체로터 격리시킨다.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혐오감과 적대감을 키운다. 

작은 말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속삭이는 듯한 말로도 충분히 사람들을 속이고 두려움을 가져다 주고 서로를 분리 격리 시킨다. 

죽음의 카르텔. 

이 죽음의 쇠사슬과 쇠고랑을 깨뜨리시러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 

 

2. 애원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내쫓으셨다. 

이 귀신이 제법이다. 

나가라고 했는데, 버틴다. 

예수님께 애원한다. 

 

31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도리어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의 간청을 들어 주신다. 

그리고 돼지들은 몰살당한다. 

 

참 희안한 본문이다. 

예수님의 허락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돼지에게로 들어간 귀신들의 행동도 이해가 안된다. 

돼지에게 들어가 거기서 자신들의 거처를 삼고 지내면 되는데, 돼지를 모두 물속에 빠뜨려 죽게 한다. 

이 행위가 귀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각종 추측을 낳는다. 

귀신들 입장에서는 어떡해서든 예수님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예수님께 간청했을 수도 있다. 

돼지를 몰살시킴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을 극대화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만의 간계(계략)였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살해 충동을 그렇게라고 해소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귀신들의 행동을 미루어 짐작컨대, 귀신들렸던 그 거라사 사람도 자살 충동과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는 살해 충동과 싸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셨겠지만, 귀신의 간청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욱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다 고쳐지고 회복된 그 사람의 애원은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었다. 

더 이상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낼 자신도 없었고,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꼈다. 

벌거벗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위협했었던 자신을 마을 사람들이 다시 받아주기도 어렵고, 자신도 그들 앞에 서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예수님은 그의 애원을 거절하셨다. 

도리어 그에게 사명을 주신다. 

거라사 지역의 온 마을을 다니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리라는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그는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귀신의 간청은 들어주시지만, 그의 애원은 거절하신다. 

이 지점이 정말 이해가 안된다. 

귀신의 간청을 물리치시고, 도리어 그의 애원을 적극 수용해 주시는 것이 상식적이다. 

역시 예수님은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허락과 거절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두 요소다

그분은 허락하시기도 하시도 거절하시기도 하신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반대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예수님은 독자적인 판단을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그걸 나는 믿는다. 

돼지의 떼죽음도, 그에게 주신 사명도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오늘은 그 이상의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납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그리고 당연히 자유롭게 결정하실 수 있는 분이다. 

인간의 관점만으로는 그분을 판단할 수 없다. 

오늘은 그분의 판단을 믿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나로서는 이해안되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겠다. 

오늘은 주님이 일하시도록 맡기겠다. 

논리적 분석과 이유를 찾는 과정에 중독되지 않겠다. 

 

혹 나의 애원과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오늘의 기도]

주님, 

귀신으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시켜주시고 회복시켜주소서. 

스스로 위해를 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충동으로부터 자유케 하소서. 

모든 것이 귀신의 장난은 아니겠으나, 그런 귀신들이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면 주님께서 내쫓아 주소서. 

 

수련회에 와 있는 모든 참가자들이 변화되게 하소서. 

오직 자유로운 주님의 결정에,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순복하고 따르게 하소서.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결국 주님의 판단과 결정을 신뢰하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소서. 

캠퍼스의 복음전도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4. 25. 김혁수 

 

[본문_요한복음 21:15-25]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어린 떼를 먹여라.” 16예수께서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쳐라.” 17예수께서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떼를 먹여라. 18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것이다.” 19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베드로에게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베드로가 제자를 보고서예수께 물었다.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3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모든 일을 증언하고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들을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0. 들어가며
4
월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의 변화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은 마지막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제 제자들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마음의 죄책감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죄책감을 다뤄주십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1. 호숫가 산책

지난 주에 우리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생선을 구워주시고 빵을 주시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아침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찢어질 잡힌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퍼득대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심장도 물고기들처럼 퍼득댑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차오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분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서 제자들을 음식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분이 이제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섬겨주십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다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런데 쪽에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100여미터 되는 호수를 헤엄쳐 왔습니다(21:7). 하지만 음식이 주어지는 내내 베드로는 불편했습니다. 자기가 섬겨야 하는데,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데, 그는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예전 같았다면, “예수님, 음식 제가 만들겠습니다. 서빙도 제가 하겠습니다.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몸을 이끌고 직접 일하시다뇨? 제가 하겠습니다. 앉아 계십시오!” 이렇게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쪽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습니다. 더이상 선생님으로 주님으로 부를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말로 배신하고 저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으며, 심지어는 욕을 했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 다시 수제자 노릇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습니다. 

 

아침을 먹은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산책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천천히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손을 잡고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걷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니가 나를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보다 사랑하느냐?” 비록 조용히 묻긴 했지만, 베드로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 들을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살짝 고민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상 고민을 이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떼를 먹여라. 방금 내가 먹였던 떼를 이제는 니가 먹이면 좋겠구나 

 

2. 기억의 치유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후계자로 베드로를 다시 지목하십니다. 그에게 떼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자격지심도 있습니다. 말만 많고 실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던 자신이 과연 예수님의 후계자가 있을까요? 번도 아니라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과오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질문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대답하고 나니까 현타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받자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자신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라 예언하셨던 예수님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과 말을 아는 주님이 다시 이렇게 물으니, 갑자기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물어 보실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등등. 고민 끝에 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올라옵니다. 2 , 새벽 동터오는 시간에 어쩔 없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참혹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질문에 답하면 답할수록 답답합니다. 그런데 번째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번의 질문을 던지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안들려서 크게 듣고 싶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대답에 신중에 신중을 더합니다. 정말 사랑하는지,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가 모든 일과 모든 말을 알고 계십니다. 숨길 없습니다. 비록 실수가 있었지만,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까지도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진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랑만큼은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부끄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에게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번이나 말이죠. 대화는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었습니다. 

 

3. 나를 따라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감정과 마음만 치유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입니다.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번이나 그의 떼를 먹이고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무너진 마음의 회복은 기억의 망각이나 무시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고백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실수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의 회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시 수제자로서, 후계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베드로에게 용서는그래 괜찮아. 이해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용서는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였습니다. 이게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그동안도 계속 따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4. 나가며_따르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정말 그런가요? 교회에 나온다고, 일주일에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과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있을까요? 다르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가요? 아님 교회의 교인인가요? 예수님을 따라 여행을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 고난도 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비록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시고, 원래의 소명을 부여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따라 오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충분히 그러실 분이십니다. 허기진 우리의 몸과 영혼에 음식을 주실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죄책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책감 때문에 그분에 대한 사랑고백을 못하시는 분이 있나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음식을 주시며 호숫가에 산책을 청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자신의 임무를 부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다시 그분을 따를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 돌아봅시다. 그리고 혹시 실패했다면 다시 그분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번이나 물어보십니다. 번째 물어보실 베드로의 생각과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2.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과거 실패에 대한 자책감, 미래 소명에 대한 두려움 등등 여러분의 마음 정서를 나눠주세요. 

 

3. 예수님은 우리에게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그분을 따르는 삶은 무엇인가요? 

2021 04 02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28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목마르다하고 말씀하셨다.

29거기에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31유대 사람들은 날이 유월절 준비일이므로,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시체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안식일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32그래서 병사들이 가서, 먼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다리와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나서,

33예수께 와서는, 그가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서, 다리를 꺾지 않았다.

34그러나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이것은 목격자가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는 자기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여러분들도 믿게 하려고 증언한 것이다.)

36일이 이렇게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37 성경에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 말씀도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며( 69:21 참조) 신포도주를 받으십니다(28-30). 또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으셨다는 (유월절 양을 잡을 양의 뼈를 꺾지 않음, 12:46 참조)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시는 유월절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31-33).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물과 나온 것을 기록함으로, 그가 육체적으로 완전히 죽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고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12:10 참조). 십자가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묵상해봅시다.

 

——

 

 

날이 왔다. 예수님의 지난 3년간, 아니 인생 전체를 결산하는 날이 왔다. 

가열차게, 쉴새없이, 종횡무진 지난 3년을 살아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무수한 이적/기적들을 행하셨다. 

귀신도 많이 내쫓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설교와 강의도 이어졌다.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논쟁하셔야 했다. 

죽이려는 자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것이다.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과연 말씀만 하셨을까. 아니 말씀은 그것만 했다고 치더라도, 수많은 생각들과 장면들이 떠오르셨을 것이다. 세례요한과의 만남, 제자들을 삼으심, 병자/귀신들린 자들 고치심,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오천명을 먹이심, 성전정화사건, 나사로를 살리심, 마지막 만찬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지난 3 아니 자신의 인생 전체가 지나갔다. 뚜벅뚜벅 날을 준비하며 살아왔다.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날이 오자, 결코 피하지 않으셨다. 당당히 날을 맞이했다. 

 

십자가 위의 6시간 동안,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오늘의 묵상은 예수님의 생각에 닿아 있다. 

육체적 고통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자신을 찌르고 조롱하고 죽인다. 

배신감, 사랑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

울분, 억울한 죽음 보다 피할 없는 삼위 하나님과의 단절, 그로 인한 울분. 

육체적, 정서적, 영적 고통 모두 예수님의 머리를 채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은, 최소한 요한이 보기에, 성취였다. 

자신의 인생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지고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줄곧 추구했던 . 

오랜 기다림의 . 

가상칠언이 아닌 가상만상(십자가 위에서의 가지 생각) 영원을 품은 성취였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만들어진 드라마의 모든 떡밥이 거두어졌다.

그간의 암시, 복선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언약이 성취되었고, 약속이 지켜졌다.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다(28, 36, 37).  

성취를 확인한 그분은 외마디 탄성을 내뱉는다. 

이루었다.”(30) 

인생을 넘어 영원의 시간이 단어에 압축되었다. 

이루었다. 오랜 소망과 염원이 이루어졌다. 

 

숨을 거두는 장면엔 그의 미소가 보인다. 

사명을 완수한 , 소명을 성취한 자에게 보이는 가녀린 미소.

 

영원부터 이어온 이야기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이는 압축된 이루었다 안식일에 몰두하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31). 현실의 몰두가 가져 비참함이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행태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거룩함을 잃어버린 자들의 최후다. 영원의 이야기를 망각한 자들의 비애다. 오랜 소망으로 영원의 비전을 마음 속에 품은 사람들만이 그래도 어렴풋이 압축된 이루었다 알아차릴 있다. 요한은 비밀을 알아차렸다. 예수님의 가녀린 미소도 간파했다. 

 

누구에게나 날이 있다. 

인생의 소명을 다하는 , 사명을 마치는 . 

나에게 날은 언제인가? 

숨이 다하는 , 나도 예수님처럼 이루었다 있을까. 

나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있을까. 

날을 위해 오늘 달려 있을까. 

새삼 다시 묻는다. 

 

우리 공동체에게 날은 언제인가? 

사명과 소명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변화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공동체의 사명을 다하면 이루었다하고 해체하면 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우주와 역사에 거대하게 존재한다. 

우리 공동체도 작은 역사와 공간에 점으로 남으면 그만이다. 

이루었다 두려워하지 말자. 

기독 공동체의 폐쇄는 소멸이 아니라 회생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이 되어 아름다운 은하수가 된다. 

얼마나 밝게 빛날지는 공동체가 최선을 다해 사명을 다했는지에 달렸다. 

 

오늘, 고난주간의 성금요일. 

예수님의 가상만상에 빠져있기를, 영원의 이야기에 이어져 있기를 바래본다. 

또한 나의 사명, 공동체의 사명을 다시 복기해 보길 소망한다. 

고통과 수치 속에서 왕이 되신 그분을 되새긴다. 

 

덧붙임, 예수님은 숨이 넘어가시기 전에 이미 승리를 확인하신 하다. 오랜 전투의 끝은 육체의 숨이 끊어지는 바로 찰나의 순간이기 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의 숨을 내쉬며 무수한 시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탄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부터 거다. 

 

——

예수님, 

십자가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각과 정서와 마음을 묵상합니다. 

영원부터 이어져 당신의 이야기에 저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의 사명과 소명을 다시 각인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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