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17일 목요일

 

여는 기도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주십시오.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11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12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15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NRSV

And just then there appeared a woman with a spirit that had crippled her for eighteen years. She was bent over and was quite unable to stand up straight(11절).

 

주석

15-16절. 예수님은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그날의 의미에 대해 논하신다. 예수님은 몸이 불편한 여자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신다.’ 이 여자는 “약함의 영(spirit of weakness)”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악한 영을 가리킬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18년된 병자가 등장한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는 중에 병자를 발견하셨다. 

가르치시다가 병자를 보시고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신다.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렇게 말씀하시고서 손을 얹으셨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계셨다. 

18년된 병자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모르시지는 않았겠지만, 곧바로 그녀를 고쳐주신 것은 아니다. 

재구성하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모세 율법의 십계명을 강론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인지, 그 그본적인 뜻이 무엇이고, 그 안식일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며,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한다. 

쉼은 6일간의 창조를 관조하며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쉼은 6일간의 창조를 통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주일은 새창조의 강력한 증표인 부활을 기념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기념한다. 

기념일로서 주일은 단순히 안식일의 쉼의 의미를 넘어선다. 

안식일로서의 쉼이 아니라 기념일로서의 쉼이 더 크다. 

주일은 단순히 쉼이 아니라 크게 기뻐해야 할 기념일이다.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쉼에는 회복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셨을 수도 있다. 

안식일은 그냥 아무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아니라, 쉼을 통해 몸과 마음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임을 강조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 가르침 중에 병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를 회복케 하는 것이 자신의 가르침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믿으셨다. 

그리고 그녀를 부르신 것 아닌가? 

 

이 모든 과정을 탐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회당장이었다. 

회당장 야이로는 지난 번 딸 아이 치료 사건으로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회당장은 예수님이 별로라고 생각한다. 

가르침은 그렇다고해도, 안식일에 여인을 고친 행위에 대해서 회당장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회당장으로서 반드시 지켜왔던 일에 대해 도전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정체성은 율법을 준수하고 가르치는 데 있다. 

회당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왔고, 훈계했고, 때로는 화를 내며 잘못을 지적해야 했다. 

그것이 그의 임무다. 

어떤 누구도 율법을 어길 수 없으며, 어떤 누구도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 없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가지 범주를 어겨서는 안된다. 

그나마 이 회당장은 정직한 사람이다.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할 생각으로 음모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 직접 화를 내고 논리적으로 따진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상당히 권위있는 말투로 예수님을 나무란다. 

 

예수님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단박에 그를 위선자로 몰고 가신다. 

안식일에 동물들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왜 사람의 회복에 대해서는 나몰나라하는지 질타하신다. 

18년이나 사단에게 고통받는 한 여인을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에 꼭 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제 안식일 규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재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틀로 안식일을 재규정해야 한다. 

이런 변화들에 사람들을 기뻐하기 시작한다. 

어찌보면 예수님을 현실 파괴자이다. 

전통과 관습에 매여 있지 않으시다. 

 

전통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을 때로 매우 불편하다. 

그러나 혁신주의자들에게도 예수님을 때로 매우 불편하다.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지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나 저러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신다.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신다. 

 

하나님 나라 사역자들이 하는 일이 그런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원칙들을 설파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도 일어난다. 

 

윤석열 정부를 보면 점입가경이다. 

광복절 기념사는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또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북한과는 대화를 끊고 한미일 공조만 강조한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고, 독도를 자기 땅으로 주장한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일본과는 가치를 공유하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광복절 기념사에서 말이다. 

 

참 답답한 일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안식일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십니다. 

이제 안식일은 주님을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안식일은 이제 주님의 날로 바뀝니다. 

변화를 만드신 주님, 

혁신을 이끄시는 주님, 

필요한 변화와 혁신이라면 그 일이 일어나도록 이끌어 주소서. 

 

저 개인에게, 공동체에게 필요한 변화를 만들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17일 화요일

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1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

2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하였다. "지팡이입니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 보아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모세가 그 앞에서 피하니,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을 내밀어서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서 꼬리를 잡으니, 그것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렇게 해서 이적을 보여 주면,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

 

6 주님께서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니, 그 손에 악성 피부병이 들어서, 마치 흰 눈이 덮인 것 같았다.

7 주님께서 "너의 손을 품에 다시 넣어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보니, 손의 살이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8 "그들이 네가 하는 말도 믿지 않고, 첫 번째 이적의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적의 표징은 믿을 것이다.

9 그들이 이 두 이적도 믿지 않고, 너의 말도 믿지 않으면, 너는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 강에서 퍼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

 

주석

뱀(3절), 악성 피부병(6절) 바로를 나타내는 상징은 뱀 형상의 휘장으로 그것은 왕관에 툭 튀어나오게 달려 있었다. 첫 번째 표적은 바로의 권위가 완전히 하나님의 권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피부병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오만에 대한 처벌-어떤 사람이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사람에게 주제넘게 굴 때-로 여겨지며, 따라서 여기서 바로를 벌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 준다(IVP 배경주석). 

 

모세는 동족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걱정합니다(1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능력과 악성 피부병이 생겼다가 다시 회복되는 능력을 주십니다(2-7절). 첫 번째 이적이 부족하면 두 번째 이적으로, 이것으로도 부족하면 나일 강물이 피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도우실 것입니다(8-9절).

 

이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양치기의 일상을 살았던 모세에게, 다시 이집트와 맞서서 동족들을 구원할 임무는 너무나 커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손으로 바로의 수호자인 뱀을 움켜잡아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다른 능력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주시고 도우실 것을 신뢰합시다.

 

[오늘의 묵상]

모세의 질문은 정당하다. 

4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모세의 의분에 찬 행동에 동족들은 의심했다. 

그 실패의 경험도 크거니와 사실은 40년의 세월이 더욱 큰 문제였다. 

이제는 젊은 날의 패기도 체력도 아니다. 

그저 양 떼를 모는 목자였을 뿐. 

과연 몇십만명에 이르는 히브리 민족을 이끌 수 있을까? 

과연 큰 왕국 이집트의 바로에게 맞서서 민족의 탈출을 설득할 수 있을까? 

모세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라기보다는 ‘동족’이었다. 

동족의 불신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봤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당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대체로 정당하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는 그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많고, 지인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것을 상상하고 추측하면 고난의 길이 그려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여호수아가 그랬다. 예레미야, 에스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물을 수 밖에 없다. 왜 나냐고, 과연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묻지 않고 따르는 것이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 없다. 

오히려 묻는 것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럽다. 

 

사역자로의 부르심, 간사로의 부르심에 크게 묻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난다. 

사실 사역자로의 삶이 엄청나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종의 특권의식과 교만함이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순수함 속에 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못하겠다는 생각보다, 나를 이렇게 부르시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좀더 크게 작동했던 것 같다. 

그러니 모세처럼 매우 진지하게, 여러 차례 묻지는 않았다. 

앞으로의 삶이 두렵다거나 못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과연 이 부르심이 정확한 것인가, 내가 이 부르심을 제대로 인지한 것이 맞나에 초점을 두고 기도하고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왜 나여야만 하는가?’, ‘과연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도 더욱 심도있게 드렸어야 했다. 

그게 인간적이다. 

질문은 불순종이 아니라 진지함의 산물이다. 

질문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질문은 인간 내면 중심의 두려움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응대하신다. 이미 알았다는듯이….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셔서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하필 뱀이다. 

주석에서는 뱀이 바로를 상징한다고 한다. 

창세기에서 뱀은 사람을 유혹하여 인류 전체를 죄악으로 이끌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뱀의 머리를 밟게 하겠다고 말이다 (창 3:15). 

그 후손 중에 하나인 모세는 뱀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더 미래의 후손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셨다. 

바로의 상징이 뱀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속 사회의 절대 권력이 뱀으로 표현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뱀을 숭앙하고 숭배한다는 점이 신기하고 놀랍다.

하나님은 뱀을 사단의 상징으로 인류 타락의 주범으로 여기시며, 그 뱀(사단)을 무찌르는데 성경 전체 이야기를 할애 하신다. 

요한계시록에도 뱀이 등장하고, 뱀 중에 큰 뱀인 용을 잡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세 혼자서는 뱀을 제어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도우셔야 뱀을 제어할 수 있다. 

뱀은 언제든지 자신의 요상한 언어와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케하고 현혹시키고 죄로 이끈다. 

정당화의 천재가 뱀이다. 

간교한 말로 하나님께 반역케 하는 존재다. 

겨우 몇십년을 살아가는 인간은 뱀의 말에 속기 십상이다. 

마음 속에 뱀의 생각과 논리가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파와 와이파이를 타고 그의 말들이 언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과연 우리 인간이 잘 거를 수 있는가? 

과연 내가 잘 스크린 할 수 있는가?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체력과 지력은 달리고, 욕망과 욕구는 지나치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매일 매일 그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변화가 많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변화가 많으면 말이 많다. 변화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그 소리 속에 뱀의 소리도 들어있다. 

양떼를 치는 것은 모세 혼자서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뱀을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절실한 이유다. 

 

문명의 기원은 물이며 강이다. 

나일강이 이집트 문명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이 많아야 사람들이 모인다. 강이 넘쳐야 땅이 비옥하다. 

많은 사람들, 비옥한 땅, 넘쳐나는 생산물, 교환하려는 욕구… 

이래야 문명이 탄생한다. 

 

그러나 언제든 그 문명은 피로 물든다. 

문명의 중심에는 그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언제든 물고 뜯고 찢는다.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죽음이 멈추지 않는다. 

뱀이 그 문명에 중심에 있다. 

요상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서로 싸우게 하고 결국엔 자신의 왕국을 유지한다. 

그 문명은 사람들의 피로 건설되었다. 

 

하나님은 나일 강이 더이상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의 강이 아니라, 

죽음의 강이 되게 하실 수 있음을 이적을 통해 드러내신다. 

뱀의 실체, 문명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셔서, 문명의 사람들과 그를 대표하는 바로가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해왔는지 보여주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는 것이다.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봐야 사람들이 모세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최소한 동족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의 욕망을 꺾는데는 그걸로는 안되었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대 문명이 가져다주는 폭력과 죽음을 폭로하신다. 

전쟁은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물이 있는 곳에, 원유가 있는 곳에, 핵이 있는 곳에, 사람들의 욕망이 쌓이는 곳에 폭력과 죽음이 피로 물든채 퍼진다. 

CNN, BBC를 통해 유툽과 각종 SNS를 통해 피로 물든 나일강, 피로 물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라이브로 보여준다. 

여전히 권력가들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권력의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들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는 뱀의 간교한 거짓말이다. 

 

세계에는 모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모세의 등장이 절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한 모세는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작은 예수, 작은 모세라는 사실을 말이다. 

피조물들의 신음은 더욱 커저가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의 등장은 왜 작아 보이는가? 

오늘의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사단을 결박하시는 하나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성령님, 

삼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합니다. 

저를 부르셨으니, 모세에게 주셨던 능력과 권세를 허락하소서. 

뱀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간교한 말과 거짓의 언어를 분별할 수 있는 귀를 주소서. 

피로 더럽혀진 인간사에 무조건적 애정이 아닌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부담스런 회의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우리 모두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 눈과 귀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도우시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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