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8월 02일 수요일

 

여는 기도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십시오. 주님의 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귀신을 하나 내쫓으셨는데, [그것은] 벙어리 [귀신이었다]. 그 귀신이 나가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리가 놀랐다.15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가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16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그에게 요구하였다.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18 그러니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는데,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의 추종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20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21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22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23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24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면, 그 귀신은 쉴 곳을 찾느라고 물 없는 곳을 헤맨다. 그러나 그 귀신은 찾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겠다’ 한다.25 그런데 와서 보니, 집은 말끔히 치워져 있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26 그래서 그 귀신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딴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NRSV

But if it is by the finger of God that I cast out the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to you(20절).

 

주석

24-26절. 승리하여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여전히 귀신의 권능에 굴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악한 귀신이 다른 악한 영을 데리고 와서 그 사람을 다시 소유할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IVP 성경비평주석). 

 

[오늘의 묵상]

하나님 나라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을 갖게 된다.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사단을 이겨낼 수 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이 이제 다시 원래 하시던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것은 귀신에게 영항을 받아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로마 제국이 억압하니 사람들은 분노와 답답함이 가득하다.

사단과 귀신은 사람들의 상처난 마음을 파고 몸과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신다. 

제국의 압제로부터 영적, 정서적, 육체적 건강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신다. 

마음과 육체가 건강해져야 돈을 벌 수 있고, 경제 활동을 통해 자기와 가족들을 도울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의 비판, 비난이 이어진다.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얻어 다른 귀신들을 제압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받을 떄 들렸던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음성도 거부하는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도 부정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고 훼방하는 말인 것이다. 

예수님을 비판하는 것도 때로는 비웃는 것도 참으셨지만,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은 예수님도 참기 힘드셨던 것 같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막 3:28-29) 이렇게 써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모독하지 마라. 

성령님이 사단을 제압하고 사람들을 구출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삼으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결국 열매로 알게 된다. 

사단은 악한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이다.  

사람들을 급하게 몰아세우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드라마 D.P.를 시청했다. 

예전 군생활이 생각났다. 

때리고 맞고 하던 시절이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대대장이 교회 집사였다. 

그는 군종을 통해 GOP 부대원들의 정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밤마다 초소를 돌며 병사들을 위해 커피와 쵸코파이를 나누고 기도를 했다. 

군에서 더 이상 구타가 사라지길 바라면서… 

난 때린 적은 없지만, 맞은 적은 있다. 

그러나 그저 바라보기만 한 적도 많이 있다. 

선임병이 되어서 막아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마 군대에서 활동하는 사단과 귀신이 많을 것이다. 

군인들의 마음을 짖누르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이용해 그들의 마음을 휘젖는다. 

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고, 하나님 나라가 필요하다. 

최근 CCC가 군복음화와 선교를 위해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MEAK)와 협약식을 맺었다.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740

전략적으로나 정신으로나 매우 훌륭한 결정이다. 

군인들의 영적 궁핍함을 돌보는 사역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가 넘쳐 나면, 어쩔 수 없이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고통 속에 발악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사단의 졸개들은 살려달라 애원한다. 

주기도문의 끝은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에 대한 간구다. 

주기도문이 진심으로 드려지고 함께 기도할 때, 결국 사단의 졸개들은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드러낸다. 

주의 제자들은 그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처음보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악에 대한 거부는 악의 발악을 낳는다. 

개인의 악도 그렇고, 조직의 악도 그렇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때로 위험하다. 

 

사단의 졸개들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혹 틈이 보여 공격을 받더라도, 집을 내주지 않는 것이 좋다. 

혹 집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성령님을 모시는 것이 좋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를 때로 전사로 만든다. 

우리는 때로 악과 싸워야 한다. 

우리의 근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싸우는 것이다. 

그 나라를 거부하는 자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 

성령님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바깥에서 슬피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삼위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더욱 높아지길 원합니다. 

세상의 칭찬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과 정의라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추구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은 교회를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사람들에게 도움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성령님, 더욱 강력하게 임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소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는 관계로 만들어 주소서. 

 

오늘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인도해주세요. 

더욱 날씨에 짜증내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3월 07일 화요일

 

여는 기도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5 누가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면, 실은 나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어느 정도는 여러분 모두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6 여러분 대다수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7 그러니 여러분은 도리어 그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8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기를 권합니다.

9 내가 그 편지를 쓴 것은, 여러분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여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해 주면, 나도 용서해 줍니다. 내가 용서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용서한 것입니다.

11 그렇게 하여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셈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NASB

Therefore I urge you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8절).

 

주석

5-7절 학자들은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에 대해 논쟁한다.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다시 한 통의 서신을 써서 그 사람을 징계하라고 명했다(IVP 성경배경주석).

 

그 사람은 바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를 아프게 했습니다(5절). 바울은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7절). 고린도 교인들이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기 때문입니다(6절). 용서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입니다(8, 10절).

 

악은 용서와 사랑이 없는 틈을 타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악이 속삭이는 곳에는 지나친 분노와 짓눌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랑으로 분열을 잠재우고 악을 몰아냅니다. 한 사람을 돌이키기 위한 징계도 필요하지만, 목표는 화해입니다. 악이 나와 공동체에 틈타지 못하도록 용서와 화해의 삶을 실천합시다.

 

[오늘의 묵상]

세계를 다니며 숱한 어려움을 극복했던 대사도 바울,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신구약을 넘나들며,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신학자 바울, 

왠지 그는 마음이 아프다, 슬프다 등의 정서적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바울은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다룰 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마음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교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바울 한 사람의 마음만 힘들고 어렵게 한 게 아니다. 

모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공동체는 마음으로 이어져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아픔은 모두의 아픔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죄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한다. 

바울은 이런 마음의 연결됨을 인지하고 있다. 

 

용서는 이 시대의 단어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용서보다 정의가 앞선다. 

일면 온당한 측면이 있다. 

바른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서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잘못이 무엇인지 바르게 규정되고, 잘못한 사람이 분명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의 단어의 풍부한 의미와 용서 주변의 다양한 과정과 절차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용서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용서하면 지는 것이고, 용서하면 도리어 약해 보이고, 용서하면 경쟁에서 밀리고, 용서하면 결국 패자로 남게 된다는 인식이 점점 늘고 있다. 

용서보다는 비판이 매력적이다. 

날까로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칭찬받는다. 

용서하겠다는 사람은 대치 국면에서 뒤로 빠진다.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용서하겠다는 사람까지도 비판받는다. 

용서하는 사람도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는 피해자인데, 그 사람이 어느새 준가해자가 된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용서가 이 시대의 단어가 되기 힘든 이유다. 

 

점점 용서 주위에 창의적인 생각이 모여들지 않는다. 

비판 주위에는 온갖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모여든다. 

비판의 정도가 점점 다양해 진다. 

비판하는 방식도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그러나 용서 주위에는 온화한 기운, 종교적 기운 외에는 남지 않는다. 

치열한 생각과 열정적 아이디어가 비판과 정죄 주변에 가득하다. 

비판과 정죄의 색깔은 샛빨강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옅은 푸른색이다. 

뉴스와 댓글은 비판적인 단어와 생각으로 가득하다. 

용서는 과연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기 어렵다. 

법정으로 사건이 가는 한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기 불가능해 보인다. 

법원 판결에 기꺼운 마음으로 승복하는 경우도 별로 없거니와, 

가해자와 피해자가 끝까지 서로를 비난하고 비판하기 마련이다. 

점점 용서가 설 자리가 줄어든다. 

 

교회와 가정은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용서의 색깔을 더욱 진하게 칠할 수 있는 공간, 

용서 주변의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가 모일 수 있는 공간, 

용서의 진정성을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죽을만큼 힘들지만, 용서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용서의 전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데 있다. 

부흥은 죄의 고백이 빠지지 않는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진심을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그럴 때 형제 자매의 용서가 일어난다. 

죄의 고백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진정한 죄의 고백은 그 죄값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한다. 

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하는지를 진정한 회개자는 깨닫는다. 

성령님의 역사다. 

그 깨달음은 죄 값을 계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미안함과 송구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참회하고 보상하고 죄값을 치르려고 한다. 

그러니 사실 진정한 용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죄인의 죄를 드러내고, 진정한 참회로 이끌어야, 피해자들이 용서할 수 있는 전제가 완성된다. 

그래야 성령님이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이런 자연스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님은 자연스런 과정을 뛰어넘어 역사할 수도 있다. 

순서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피해자의 용서가 가해자의 참회로 이끈다. 

이런 순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부자연스런 과정을 인간이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안된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성령님은 때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그것을 막을 법은 없다. 

성령님만이 용서의 색깔을 더욱 밝고 굵고 화려하고 다양하게 채색하신다. 

인간은 지극히 제한된 색맹 수준일 뿐이다. 

 

사탄은 비판의 날을 더욱 날카롭게만 하라고 요구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심지어는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용서의 풍부한 의미와 방법들을 놓지 않는다. 

성령님은 가정과 교회에서 용서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사단에게 속지않고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비판과 함께 용서를 배워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끝까지 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아무말 없이 그 수치의 끝에 올라가셨다. 

그러니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다. 

 

아… 예수님, 

거기계시는군요. 

 

[오늘의 기도]

용서는 어렵습니다. 

분노는 자연스럽습니다.

용서는 본성을 거스릅니다. 

분노는 속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용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조금씩 생겨납니다. 

성령님, 저에게 분별의 능력을 더하소서. 

사탄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게 하소서. 

가정과 교회에서는 용서의 색깔이 더욱 풍부하고 더욱 진해지게 하소서.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생겨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