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4. 김혁수 

 

[본문_베드로전서 5:1-11] 

1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2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떼를 먹이십시오억지로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3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5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6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1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아멘.

 

[설교]

0. 들어가며 

- 마지막 편지 

언제나 진실한 편지의 마지막은 마음의 울림이 있습니다. 편지는 만날 없음의 메타포입니다. 멀리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거나, 아님 죽음으로 이별했을 ,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편지의 글자 글자에는 마음과 감정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의 편지를 읽어봤습니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초등학생을 아들 태호님이 이미 떠나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편지를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쓰여있더라구요. 

 

“아버지, 어머니 꿈에 얼굴 한 번 보여주세요. 
슬퍼하느라 애썼다 해주시고 이제는 조금 편안해지시라 말씀해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가족이 시간이 흘러 모두 다시 만날 있는 그날까지 저는 저의 해야 일을 하며 언제나 아버지를 기억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들 태호 드림

 

가족의 슬픔이 여전히 묻어 납니다. 여전히 슬퍼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태호님이 그려집니다. 

 

하나의 편지는 유투버 새벽님의 남자친구의 편지였습니다. 최근 67 구독자 유투브 채널을 운영했던 뷰티크리에이터 새벽님이 혈액암으로 투병하다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여자친구를하늘로 보내면서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너를 만나서 많이 달라졌어. 사람은 고쳐쓰는거 아니라는 말, 틀렸다는 걸 내 스스로를 보면서 깨닫게 됐어. 그렇게 만들어 준 너에게 너무나도 감사하고 고마워. 너에게 배운 마음 주변에도 널리 퍼뜨릴게.

사실 아직까지도 너의 빈자리가 믿겨지지가 않아. 지금도 손만 뻗으면 닿을 있고 고개만 돌려도 너가 웃고 있을 것만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더라. 너라는 사람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비대했기에 그걸 비워내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거 같아.

혹시 내가 그리움에 지쳐 힘들어 하는 밤에는 한번씩 속에 들러서 안부라도 전해줘. 그래야만 내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견뎌낼 있을거 같아.

이렇게 너를 다급하게 데려간걸 보면 하늘나라에서 급하게 천사자리가 하나 필요했나 보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너를 온전히 드러내며 밝게 지냈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지에는 그리움과 애절함이 묻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편지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자주 편지를 주고 받지 못하기에 통의 편지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 기록합니다. 방금 소개했던 그런 편지들처럼 돌아가신 분에게 전하는 편지는 아니지만, 초대교회 현실을 놓고 ,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지도들을 위해서 붓에 힘을 주어 내려갔습니다. 그런 편지들의 마지막 부분들을 우리가 깊이 살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7월에는 마지막 편지라는 시리즈를 준비해봤습니다. 

 

- 초대교회 지도자

5-6월에는 초대교회 지도자 야고보 사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야고보서를 통해 전세계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인내하라고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지도자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죠. 오늘은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마지막에 무엇을 강조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떼를 먹이십시오(1-4)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의 번째는 바로 떼를 먹이라는 권면입니다. 일단 베드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장로들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떼를 최선을 다해 먹이고 살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편지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들은 지금의 터키북부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지역의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졌으며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를 운영함과 동시에 성도들을 양육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떼를 먹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떼를 먹이라는 명령은 누가 누구에게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 부인하고 욕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서 번이나 사랑 고백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때마다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죠. 베드로는 명령을 오랫동안 아니 평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편지의 마지막 권면을 떼를 먹이라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정말 성공적인 교육을 했습니다. 베드로를 완전히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사람을 돌보는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부였던 그를 이제는 양을 돌보는 목자의 소명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가지를 추출해 있는데요. 자발성, 사적 이해 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 이렇게 가지입니다. 

 

1) 자발성

먼저, 자발성입니다.

2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억지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진해서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목자의 삶을 사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억지로 하라고 해서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깨닫고 은혜를 알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다가 기쁜 맘으로 목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쁠까요? 복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나라에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신다는 사실이 기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같은 죄인조차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교제할 있게 겁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를 추구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교제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목자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죠. 이런 과정에서 목자에 대한 부르심을 확인하게 되니 억지로 필요가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있습니다. 목자는 억지로 필요가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 청년부를 섬기는 운영위원분들도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 공동체의 섬김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 받은 대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일에 감동 받는 대로, 기쁘게 섬기시면 좋겠습니다. 

 

예배를 위해 많은 섬김이 필요합니다. 영감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2) 사적 이해 개입 불가

목자의 태도 번째, 사적 이해 개입 불가입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경우가 있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관련해서 아주 강력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아시죠? 예루살렘 교회 초창기에 리더십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재산의 반만 헌금했으면서도 마치 모든 재산을 바친 것인양 거짓말로 자신들의 공적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속이려고 했는데, 이유는 아마도 교회내 영향력을 키워보려는 의도였던 같습니다. 여튼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됩니다. 베드로 앞에서 말이죠.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할 밖에 없었습니다( 5:11). 

 

목자로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서는 안됩니다. 과정도 깨끗하고 결과도 깨끗해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람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인적 네트워크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목에서 많은 목자들이 실수하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목자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요 죄입니다. 

 

3) 섬김의 리더십

목자의 번째 태도는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다시 반복합니다. 섬김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합니다.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양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지 않으면 양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섬기지 않으면 양은 우리를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을 잃곤 합니다. 격려의 말로, 선물로, 안부 전화로, 식사로 섬겨야 합니다. 

 

4) 목자장 임재 의식

목자의 번째 태도는 목자장 임재 의식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데요. 인간 목자는 예수님을 목자로 두는 양입니다. 목자장이 누구시라구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본문에서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는 재림의 때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림의 때만을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목자는 매일, 매주 목자장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양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과 마음과 생각과 정서를 나눠야 합니다. 그분께 목양받지 않는 목자는 양을 먹이기 어렵습니다. 

 

=> 공동체의 장로는 누구? 

양을 먹이는 목자의 가지 태도가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자발성, 사적 이해 개입 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습니다. 우리 청년 공동체의 장로는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 전체의 장로님은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장로님과 부교역자분들이 계시죠. 교회 전체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송청만으로 놓고 때는 누구일까요? 물론 제가 목자가 겁니다. 그런데 저만 목자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목자로 부르심을 받는 분이 있습니다. 

 

2.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5-7)

이제 베드로의 당부 번째를 보겠습니다. 번째는 공동체의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번째는 젊은이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라입니다. 옷을 입으라 하니까 겉과 속이 달라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지 옷을 계속 입게 되면 점점 내면도 변화됩니다. 군복을 계속 입으면 군인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신부님들이 입는 로만 카라의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그렇게 행동해야 같은 느낌을 받고 실제로도 행동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라는 겸손을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하라, 겸손의 이미지로 자신을 덮으라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조금씩 변화되는 자신을 있습니다. 

 

- 상호 순종

처음에 젊은이들게 순종하라는 때문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핵심 요지는 그게 아닙니다. 서로 순종하라가 본질입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함부로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자는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태도이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장로님께 순종할 있습니다. 섬김의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은 행운이요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이 젊은이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 상호 겸손

서로 겸손함으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다이나믹을 고려할 ,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공동체는 언제나 힘과 정보와 돈을 가진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돈고 없고, 힘과 정보도 부족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힘있는 사람은 언제나 가르치고 명령하는 입장에 서게 되고, 힘없는 사람은 반대의 입장에 있게 됩니다. 그러니 서로 겸손하게 순종하라는 말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직적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상호 겸손, 상호 순종이 작동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 주는 불안함 

효율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상호 순종은 세계관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로마 지배 체제 속에서 주인과 노예의 계급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상호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가치관과 부딪힙니다. 과연 교회가 살아남을 있을까 불안과 걱정이 몰려 옵니다. 로마의 군대 조직 같이 일사분란하게 명령의 체계 속에서 움직여야 교회가 살아남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이런 불안과 염려에 대해 베드로는 어떻게 말합니까? 

 

7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목자장되시는 예수님,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서로 순종하면서 결정해도 됩니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겁니다.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너무 빨리 달려가면 교회는 기본적 성품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모두의 속도를 배려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3. 견고한 성에 거하십시오(8-11) 

이제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의 번째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견고한 성에 거하십시오. 사람들은 8-9절에 무게 중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10절에 무게 중심이 있는 같습니다. 그래서 견고한 성에 거하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실까요. 

 

- 사단의 공격

베드로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할 사람들을 찾아 다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악마를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단의 존재를 가장 강력하게 경험했던 사람이 누군줄 아십니까? 맞습니다. 베드로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야 한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강하게 꾸짖었던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8:33) 이건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설교 때마다 때의 일을 말하곤 했을 겁니다. 베드로는 사단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어떻게 물고 늘어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단이 어떻게 도망갔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대적하는 겁니다. 물러가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 고난

고난과 박해가 찾아오면 개개인의 약점이 더욱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약점은 사단이 공격하기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사단은 사람의 약점을 파고 듭니다. 두려움, 분노, 원망, 과도한 자신감, 외로움, 교만, 자신만 특별하다는 의식, 우월감, 열등감, 중독적 증상이런 심리적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고난과 박해는 각자의 약점을 10 100배로 증폭시킵니다. 여기까지가 8-9절의 내용입니다. 

 

8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악마와 맞서 싸우라는 것이 가장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매우 독특한 표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다가올 겁니다. 

 

- In Christ 

그런데 이제 10절을 읽어봅시다. 

10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0절은 너무 평범한 내용이라 주목도가 낮습니다. 차라리 악마와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긴장도를 높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10절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악마와 싸우러 나갈 생각입니까! 매일 매일 악마와 사단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없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악마를 대적하는 영적 전투를 해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전장터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디로 부르셨나요?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통치가 가득한 그분의 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안에서 우리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여러 고난 속에서 온전케 되고 강건해 지고 튼튼해 지는 겁니다. 혼자 악마와 싸울 없습니다. 혼자 악마를 대적할 없습니다. 그건 상당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안에서 더욱 튼튼해 지십시오. 그리고 어느 순간 찾아오는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순서가 올바릅니다. 

 

=> Jesus castle

예수님 성에 거하십시오. 내가 그분 안에 있는지 아님 나홀로 넓은 들판에서 악마를 찾아 헤메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베드로는 혼자 싸워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밤에 자신이 차고 있는 칼을 꺼내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싸우려고 했던 그는 그날 새벽에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그의 외로운 싸움은 성공했나요? 악마를 제대로 대적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가 회복되고 다시 튼튼한 기초를 놓은 곳은 어디였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이 차려 주시는 아침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께서 아십니다.’

그래 그럼 양을 먹이라 

 

그곳이 바로 예수님 성이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아침을 먹는 곳이 예수님 성안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튼튼하게 나가는 겁니다. 그래야 때로 악마를 대적할 있습니다. 

 

4. 나가며 

- 의식주 in Christ

어떻게 하다보니, 오늘은 먹고, 입고, 사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떼를 먹이라, 겸손을 입어라, 예수님 성에서 살아라. 이렇게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베드로 전서도 리더 교재로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 지도자가 보내는 마지막 권면매우 감동적고 유용합니다. 야고보와 더불어 베드로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리더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목자의 가지 태도를 듣습니다. 자발성, 사적이해개입불가, 섬김의 리더십, 목자장 임재 의식, 정말 보물같은 요소들입니다. 게다가  겸손과 상호 순종도 교회 안에서 이뤄져야 태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 살면서 더욱 튼튼해지고 강건해져서 악마를 대적할 있게 됩니다. 그렇게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이겨냅니다. 베드로의 인생 전체가 마지막 권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갑자기 편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은 여러가지 권면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한꺼번에 지킬 수는 없겠죠.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리더의 부르심을 듣는 겁니다. 목자로의 부르심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들이 목자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송청 공동체를 위한, 크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부르심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저를 찾아 주세요. 그리고 목자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야고보를 통해서도 훈련을 받으시고, 베드로를 통해서도 받으시고,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훈련을 받으세요. 그렇게 성장하는 겁니다. 

 

리더로의 부르심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를 키우는 일에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신앙의 여정이 다르고, 출발점도 속도도 여행지도 다릅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분들이 한날 한시에 리더가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로의 부르심은 언젠가는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세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고 리더로의 부르심, 목자로의 부르심을 소중히 받으십시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소원을 말씀해 주세요. 제게 말씀해 주세요. 피트니스 센터에 가면 개인 pt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PT 하면 되죠. 

 

목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를 목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각자의 신앙 여정 속에서 언젠가는 목자가 되길 바라십니다. 혹여 지금 그런 부르심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말씀드려 봅시다. 저를 사용해 달라고, 좋은 목자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2. 이미 목자로 섬기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으로 섬기시는 , 청년부의 소그룹 리더로 섬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오늘 말씀처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베드로는 목자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중에 가장 중요해 보이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2. 목자로의 부르심(리더로의 부르심) 느껴본 적이 있나요? 언제 우리는 리더로의 부르심을 느끼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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