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16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11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12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NASB

For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having concluded this, that one died for all, therfore all died;(14절)

 

주석

두려움(11절), 사랑(14절) 성경에서 ‘두려움’은 잔뜩 움츠린 공포가 아니라 거룩한 경외이며,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희생적인 보살핌이다. 이 두 단어는 양립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BST 고린도후서).

 

바울은 책임을 깨닫고 있고 그래서 바른 두려움이 있다. 또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알고 있고 그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IVP 성경주석).

 

바울은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해왔습니다(11절).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12절). 만약 그가 미쳤다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고, 온전했다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13절).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잡혔습니다(14절).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었습니다(15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은 미친 것,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중심은 나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휘어잡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합시다. 내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를 힘씁시다.

 

[오늘의 묵상]

말에는 힘이 있다. 

스스로 규정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말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을 이어가고 감정을 나누고 행동을 촉진한다. 

 

설득하는 말, 자랑하는 말, 오늘 본문에는 이 두 가지 말이 나온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성도들의 마음을 바꾸어야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확립되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다. 

바울파, 아볼로파, 바나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에 대해 험담하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정당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부당한 험담은 조심해야 한다. 

죄와 싸워야 하건만 죄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울은 그 일을 해 온 것이다. 

 

자랑하는 말도 바울이 안 한 것은 아니다. 

그 자랑은 실체에 대한 자랑이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러한 고백이 아니고서야 자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고백의 중심에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자랑이다.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인 자신은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을 자랑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고백으로 자랑한다. 

 

허나, 어떤 사람들은 삶의 고백이 아닌 허풍으로 자랑하기도 한다. 

속과 겉이 다르다. 

포장이다. 

속은 비어 있거나 썩어 있는데, 겉만 번지르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마치 고귀한 것이 있는 둥, 자랑을 한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하는 일이 그렇다. 

죄악에 둘러 쌓여 그 속은 곪아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도리어 생명을 위협하는데, 겉만 치장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문제는 그게 먹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간다. 

사이비의 달콤한 위장 전술에 속아서 정신세계를 갖다 바친다. 

허풍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당한다. 

 

바울은 이런 거짓의 사람들,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망, 진정한 자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말하라고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랑이다. 

자랑의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삶으로 경험한 것들이다. 

성령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바꾸셨으며, 지금도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의 변화가 없이 성령님의 역사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님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설득을 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주고 살도록 추동하신다. 

그렇게 열매로 안다. 

성령님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는 삶의 변화, 삶의 열매로 안다. 

종교적 열정만으로는 진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 

감정적 고백만으로는 참된 자랑을 할 수 없다. 

삶의 실제적 변화가 따라와야 한다. 

 

애즈베리 대학교의 24시간 기도와 예배의 열정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참된 부흥은 24시간 예배당에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고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회개로 이어진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궤도 수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자신과 주변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된다. 

이것이 참된 부흥이며, 이것이 속이는 자들에게 보여줄 자랑의 근거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 변화된다. 

 

이런 것이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미쳤다고 하기도 했다. 

바울의 대답은 수사적이다. 

미쳤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미친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정신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미쳐있다.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배와 어망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모양 그는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걸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삶 그 자체가 미친 것으로 비췰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미쳤는가? 

이유는 단호하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생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며, 이 사실을 널리널리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즉 바울의 미침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바울을 미치게 했다. 

정신이 혼미하거나 정신 질환을 앓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추동시킨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미쳐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랑은 집착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귀한 사랑에 의해, 희생적 사랑에 의해 삶의 변화를 겪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 미친 것이다. 

고귀한 사랑을 받으니 사람이 미친다. 

그 사랑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호를 만들어야 했다.

미술 시간에 지우개 도장 파기가 있었는데, 두 글자로 내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주광” 주님께 미치다. 

그렇게 지었다. 

정말 예수님께 미쳐 있었다. 

그분이 나의 점심시간을 빼아갔으며, 하교길 친구들과의 노는 시간도 빼앗아 갔다. 

그 시간에 나는 종종 기도회에 참석했고, 

그 시간에 나는 종종 길거리 전도에 나갔다. 

어린 마음에 여물지 않는 신앙의 집착과도 같은 행동들이었다. 

부족했지만 부끄럽지 않고, 여물지 않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주광, 주님께 미친 자,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예수님을 온전히 미치고 싶다. 

온전한 정신으로 그분께 미친 자가 되고 싶다. 

 

 

[오늘의 기도]

주님,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열정만으로 이뤄진 부흥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회심 뿐 아니라 회개가 일어나게 하소서. 

24시간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동시에 습관이 바뀌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서 점점 예수님처럼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베스트입니다. 

주님, 한국에 진정한 부흥을 주소서. 

주님을 향한 열망이 터져나오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 나오게 하소서. 

제가 섬기는 공동체가 부흥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기에 변화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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