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8. 김혁수 

 

[본문_디모데후서 3:10-17] 

10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행동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따르며, 11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견디어냈고, 주님께서는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입니다. 13그런데,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것입니다. 14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는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그대는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15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 있습니다.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17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

개취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 취향 존중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나가싫존주의라는 말도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도 존중한다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취향 아니라 개인이 싫어하는 것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화 현상은 진리에 대해서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정도의 뉘앙스가 사회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조금 풀어보면, “너의 진리가 있고, 나의 진리가 있으니 나는 너의 진리를 존중한다. 그러니 너도 나의 진리를 존중하라.”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취향에 가까움을 있습니다. 시각, 관점, 오피니언, 생각에 가깝습니다. 더이상 사람들은 진리를 진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우주적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우리는 진리를 계속 이야기할 있을까요? 

 

- 바울의 마지막 옥중 서신 

7 한달 동안 우리는 신약의 저자들의 마지막 당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동안에는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를 다루었습니다. 오늘부터 다음 주에 이어서 바울의 마지막 당부를 공부할까 합니다. 바울은 너무 유명해서 아마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바울의 말년은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바울은 자신이 정말 사랑한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바로 디모데후서인데요. 인생 마지막의 바울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볼까요? 

 

1. 진리의 경험(10-12)

1)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 선교여행 루스드라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에 깊이 감명을 받고 회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2 선교 여행 때부터 함께 동역합니다. 시기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언제 강도들을 만날지 모릅니다. 게다가 바울을 지극히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추적하면서 그가 가는 도시마다 살해위협을 가했습니다. 디모데는 모든 광경을 직접 보았습니다. 함께 경험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정말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이슈가 생기는 교회마다 디모데를 파송했습니다. 디모데를 맞이하는 여러 도시의 교회들은 마치 바울을 맞이하듯 그를 대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서 6개의 편지의 공동 저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와 후서라는 이름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를만 했습니다. 

 

그들은 동거동락했습니다. 함께 세계를 걸어다니며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속에서 좋았던 경험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함께 겪었던 고난의 시간들을 다시 회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박해받았던 지역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게 기억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2) 박해 속에서의 구원 

기억에는 박해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도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바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순간들이 여럿됩니다.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은 충격적입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무리들을 충동질합니다. 길거리 연설이 이어집니다. 바울을 신성모독죄 같은 것으로 프레임을 씌웁니다. 결국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죽입니다. 그리고 성밖으로 시신을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바울이 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나는 아닙니까(14:19-20).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거기로 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쳤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 섰을 때에, 그는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틑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사도행전 14:19-20)

 

디모데는 이런 상황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숱한 박해 속에서도 바울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디모데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3) 진리를 따르는 것의 결과_박해

진리를 따르는 것의 결과는 박해입니다. 바울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2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로마 감옥 안에 갇힌 바울은 지난 선교 사역의 마무리가 감옥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불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정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의 경험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위협이 찾아옵니다. 게다가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시작하면 박해를 받게 됩니다. 

 

바울 당시만해도 예수라는 진리를 따르는 무리는 소수였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매주 모여서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예식 합니다. 그리고 서로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이런 예식 행위와 서로에 대한 호칭 때문에 식인 풍습과 근친상간 행한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여러분 소수의 무리가 다수가 따르는 로마황제 숭배 다신교의 사회 문화 거부하고, 매주 밤마다 몰래 모여 한다는 것이 식인예식과 근친상간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혐오하게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따르려는 사람들 모두는 박해를 받을 밖에 없었습니다. 

 

2. 진리 안에 머물라(13-14) 

1) 진리에 반대하는 사람들

다른 민족, 로마 사람,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받는 박해는 그나마 그러려니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바울과 디모데를 아프게 사람들 자신들의 뿌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동족,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박해보다 뼈를 때리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디모데 평생을 따라 다니면서 사역을 방해하고 음해하고 모함하고 박해했습니다. 심지어는 1세기 말의 기록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이들 유대인들을 사단의 무리라고 부르며 주의하라 당부했습니다.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요한계시록 2:9). 

 

2) 간절한 호소

이렇게 전세계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불신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동족으로부터도 미움과 비방과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왜요? 진리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살아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간절히 호소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 로마의 감옥에서 동족의 비방과 모함과 고소 앞에서 그의 마지막 외침을 들어봅시다. 

진리 안에 머무세요.”

호소가 들리시나요? 간절한 외침이 들리시나요? 바울 인생 전체가 압축된 외침입니다. 진리를 위한 그의 오랜 투쟁의 음성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보다 지금의 우리가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당시는 소수에서 다수로 나아가는 성장기의 환경이었습니다. 복음의 확장기였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 때문에 그래도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믿을 있었고, 박해를 참을 있었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세계가 다수에서 소수로 전락하는 수축기이기 때문에 사실 진리를 주장하고 살아내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일리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살다가 급기야는 동족의 고소로 지금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몇몇 지인들은 바울을 버리고 진리에서 떠났습니다. 

 

그대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디모데후서 4:9-10)

 

이런 외로운 상황 속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기독교의 확장기라는 사회학적 통계만으로는 바울의 인내를 설명할 없습니다. 개인이 겪는 이런 고난과 심리적 좌절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끝내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 

 

3. 진리의 보고_성경(15-17) 

 

바울은 진리 안에 머무는 가장 좋은 도구,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우리가 익히 듣고 알고 때로는 외우는 구절이 등장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16). 그런데 구절이 어느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몰랐을 겁니다. 바울의 마지막 권면, 당부의 맥락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감옥에서 나온 말이라는 겁니다. 요사이 말씀을 가르치는 글들을 보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말은 책의 맨처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을 마지막에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목이 신기하면서도 감동을 줍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바울은 성경의 가치를 후대에 알려야 필요를 느꼈습니다. 구약과 복음서 얼마나 소중한 문서인지 후세대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가치가 있나요? 

 

1) 하나님의 영감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진 책입니다. 수많은 인간 저자가 있지만, 성경의 제일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적 감동이 없이 성경이 씌여지지도 않았고, 이렇게 편집되지도 않았으며, 이렇게 전달 전수 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이 글이 되고, 편집이 되어 책이 되고, 책이 후세대에 전달되는 과정 모두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감동받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2) 구원에 이르는 지혜 

둘쨰, 성경은 특히 구약과 함께 당시 거룩한 문서로 통용되던 복음서 일부 바울 서신서의 경우,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도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밀스런 지혜를 구약이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누가복음 24:44)

 

이게 복음주의 성경해석학의 근본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말이죠. 성경 66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3) 의의 교과서 

셋째, 성경은 의로운 삶을 위한 교과서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합니다. 의로운 삶이 어떤지에 대해 말합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속의 인물을 통해 배웁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배웁니다. 1600년의 역사를 관통하여 기록된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삶을 있는 역설적 통합적 진리 담겨 있습니다. 극단적, 당파적 주장으로 사람들을 갈라치기 하지 않습니다. 지정의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몸과 영혼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나와 세상, 무리와 우주 통합되어 있습니다. 사실과 윤리가 조화 이룹니다. 성경이 모든 과학과 수학지식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인생을 의롭게 살아가는 데는 가장 탁월한 가르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겁니다. 

 

4) 선한 일과 탁월함의 원천

넷째, 성경은 탁월함과 선한 일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유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성공하는 유능하게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함에 있어 유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입니다. 성경은 돈을 많이 버는 탁월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교보문고에 있는 자기 계발서 코너의 베스트셀러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탁월하고 유능하게 만들어 주는 책입니다. 목표가 다릅니다. 

 

4. 나가며

- 진리를 배우자/ 진리 안에 머물자

진리가 무시되고 배격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팩트첵크는 중요하지만 진리체크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늘고 있습니다. 진리 체크는 현대사회의 적이며, 관용과 포용의 반대라고 합니다. 

 

점점 진리를 따르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소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구비율로 따지자면 점점 바울의 시대와 비슷해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점점 사회적 압박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는 시대가 왔으며 강도는 점점 세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저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주를 관통하는,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진리는 다름 아니라, 성경이 오랫동안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 안에 머뭅시다. 진리 안에 거합시다. 진리를 항상 품고 삽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전체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눈과 해석 전략 배워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파악하는 통독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과 내용을 이어주는 해석전략입니다. 그래서 66 전체를 통일성 있게 바라보도록 돕는 프레임을 배워야 합니다. 

 

여름에 놀러가는 것도 좋고 쉬는 것도 좋지만, 성경을 배우기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의 여름을 응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진리를 주장하기 점점 어려워집니다. 도리어 조롱당하고 무시당하고 강퇴당할 있는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진리 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진리로 믿고 따를 있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2. 성경은 우주적 진리를 배우는 최적의 교과서입니다. 여름 성경을 깊이 있게 읽고 배우겠다는 결심의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바울이 진리 안에 머무십시오라고 말할 , 그의 음성은 어떠했을까요? 상상력을 발휘해서 묘사하거나 연기해볼까요?     

 

2. 여름 성경을 배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계획인가요? 만약 아직 계획이 없다면 함께 계획을 세워보시면 어떨까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