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01일 월요일

 

여는 기도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NIV

just as they were handed down to us by those who from the first were eyewitnesses and servants of the word(2절).

 

주석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1절)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이루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전 모세나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당시 저자를 비롯한 다른 신자들의 시대에 일어난 구원의 역사다(IVP 성경비평주석).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하나님이 ‘우리 중에 이루신 일들’을 정확하게 조사하여 써 보냅니다(1, 3절). 그 일들은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을 통해 소개된 ‘구원의 역사’입니다(2절). 이것은 데오빌로로 하여금 그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확실한 사실’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4절).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그 소식을 듣고 믿은 이들을 통해 전파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또 다른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 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누구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기록은 안했지만, 말로 전달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일화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해도 전체적으로는 일관성을 지녔다. 

예수님에 대한 헛소문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반대하는 그룹에서도 악의적으로 거짓을 퍼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의 삶, 말씀, 십자가, 부활 그 모든 것에 대해 사실의 왜곡이 일어나기도 했다. 

말로 전달할 때 어쩔 수 없이 가감이 일어난다. 

과장과 감소가 일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만 전달될 것이다. 

기록이 회람될 때,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문제제기를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함께 했던 수 많은 제자들과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정, 수정되며 가장 많은 증인들의 동의를 얻은 글만 후대에 전달될 것이었다. 

 

말에 대해 언제나 약간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점점 말을 더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잘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한 말을 가능하면 가감없이 솔직하게 잘 전달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즉 말의 양이 어쩔 수 없이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려면 연습이 필요하고, 때로는 정확하게 외우는 것도 필요하다. 

그 정확한 어휘를 사용해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시공간이 떨어져 있다면 그 필요성은 극대화된다. 

개인적인 대화야 눈빛과 몸동작으로도 소통이 가능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고대의 경우 편지가 거의 유일한 소통의 방식이었다. 

말이 발화되고, 그것이 글이 되어 전달되어야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가능하다. 

 

지금은 그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화상통화가 가능한 시대에서는 글 만큼이나 말 자체의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과묵함보다는 말 잘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말하고 말을 듣는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 

그 속에서 듣고 읽을 만한 내용의 말과 글을 생산해 내는 것이 실력이다. 

챗GPT와 견주어 이길 수 있는 힘은, 말하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포함된 글과 말이다. 

기계는 인생을 대체할 수 없다. 

인생의 경험은 각자마다 고유하여 기계가 반복하기 불가능하다. 

인생 경험의 이야기가 담겨 정직한 말하기와 글쓰기가 이뤄진다면 인공지능과 겨뤄볼 만하다. 

픽션은 GPT가 훨씬 뛰어난다. 

그러난 논픽션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희노애락이 말과 글로 담길 때, 그것은 현실이며 실제이기에 힘이 실린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교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로 살아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를 끈다. 

논리적 글 자체는 챗GPT가 뛰어나겠지만, 사실과 현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개인의 삶이 더욱더 드러나야 인공지능과 붙어볼만하다.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많을수록 영향력 있는 글과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얄팍함…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나의 존재적 고민이다.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에서만큼은 얄팍함을 넘어서고 싶었다. 

두터움, 깊이, 풍성함, 견고함, 흘러넘침을 내 안에 채우고 싶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존재감으로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과 지혜와 통찰을 주고 싶었다. 

허나, 지금은 그 일에 실패한 듯 보인다. 

가볍다. 얄팍하다. 표피적이다. 

언제 그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까? 

과연 들어갈 수나 있는 걸까? 

 

누가처럼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깊이 있게 전달하고 싶다. 

말하고 글을 쓰고 싶다.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예수님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의 기도]

무한한 깊이와 신비의 하나님, 

저는 주님의 깊이를 닮고 싶었습니다. 

거룩함의 깊이, 사랑의 깊이, 사랑의 깊이가 더욱 두터워지길 바랬습니다. 

지식의 넓이, 지혜의 풍성함, 기술의 고도화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전문가로서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말씀의 전문가, 기도의 전문가, 상담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어쩌면 행사와 이벤트의 전문가가 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도 다시 평가해보니, 어설픈 전문가지요. 

주님, 저의 얄팍함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더 늦기 전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사람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회피하지 않게 하소서. 

계획하기를 미루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 12. 19. 김혁수

 

[본문_누가복음 1:1-5; 76-80_새번역]

1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2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대로 엮어냈습니다. 3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드리는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5 유대왕 헤롯 때에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76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것이다. 78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80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0. 들어가며 

- 전쟁의 소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접경에 러시아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기사가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려고하자 나토의 세력 확장을 반대하는 러시아가 군사적 충돌을 계획하는 초강수를 두고 있는 것이죠. 내년 1-2월에 전쟁 발발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국가 내전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국가간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세계는 언제든지 전쟁 발발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소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보면, 물론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가능성도 높다고 볼지도 모릅니다. 착착합니다. 두렵습니다. 생명이 사그라드는 현실이 슬픕니다. 문명이 고도화된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감, 절망감이 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세계평화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사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잖아요. 인류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잖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평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의문이고 고통입니다. 이런 안따까운 마음을 잠깐 옆에 두고 말씀을 읽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이 이런 안따까운 상황과 마음에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하며 말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1. 의사 누가 

1) 역사적 배경(3, 5)

오늘 본문을 살짝만 보아도 누가가 상당히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관련된 일들을 차례대로 순서대로 서술하겠다고 합니다. 전에도 그런 일을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누가는 더욱 정밀하게 예수님 사건을 차례대로 기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때를 다른 성경 저자보다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1 5절을 시작할 때도, “유대왕 헤롯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죠. 2장의 시작도 이렇습니다. “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뿐만이 아닙니다. 3장을 시작할 때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1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열다섯째 해에,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3:1-2)

 

역사적 배경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기록해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리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더불어 예수 사건을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 제국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 사건은 신화나 설화나 동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국의 역사와 같이 가고 있었고,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의 환타지 소설이 아니라는 겁니다. 과거의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리메이크해서 체제전복을 시도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누가는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2) 서신의 목표(4)

게다가 누가는 편지의 목표를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수신자인 데오빌로 각하가 그전에 배웠던 내용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지의 목적은 믿는 성도들이 더욱 확신을 얻도록 돕기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편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처음 시작은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죄용서에 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 집니다. 여러 의심들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은 실존인물인가? 그분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가? 그것이 실제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등등의 질문들이 생기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해야 비로소 걸음 나아갈 있습니다. 누가의 복음서는 이런 질문을 가진 분들에게 아주 좋은 자료가 겁니다. 

 

2. 누가의 포석

이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 볼까요? 누가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어떤 특징에 주목하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재밌는 것은 누가는 포석을 많이 깔아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곧바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천천히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1장부터 핵심 메시지를 던지지 않습니다. 마가는 초장에 승부를 걸었죠. 마태는 유대인들을 위해 족보부터 시작했죠. 그러나 누가는 이방인들도 쉽게 따라올 있도록 전맥락을 충분히 작성합니다. 당시 지중해, 로마세계는 예언자, 점성가, 술사들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도 많았고, 예언자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익숙한 예언자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요. 바로 세례 요한을 등장시킵니다.

 

1) 요한의 가족들(5-56)

-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그리고 요한의 출생

누가는 1 전제를 요한의 가족들에게 할애합니다. 여러분들이 읽으면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아들을 얻게 것이라 예언합니다. 예언을 믿지 못한 사가랴는 10달간 말을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임신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촌 마리아도 임신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 엄마 배속에 있던 아기 요한이 격하게 뛰어 놀았습니다. 걱정하던 마리아는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노래를 지어 불렀죠. 그리고 얼마 후에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그제서야 사가랴의 입이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요한의 이야기를 아주 장황하게 적어놨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흡입력 있습니다. 아마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아주 흥미롭게 이야기를 읽고 들었을 겁니다. 

 

2) 사가랴의 예언(67-80)

특히 입이 풀리고 10개월만에 말을 하게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는 장면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1 67-79절에 이어서 상당히 길게 적고 있는데, 이렇게 누가만 유일하게 사가랴의 예언을 적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가랴의 예언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누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죠. 

 

3. 누가에게 예수님의 성육신 

1) , 어둠, 그리고 평화(78-79)

78-79절을 읽어볼까요. 

 

78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는 사가랴의 예언의 내용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죠. 하나님은 천하가 있는 해를 높이 뜨게 하실 것입니다. 해는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겁니다.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빛입니다. 누가의 강조점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해가 뜨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탄생 시점에 그의 아버지 사가랴는 메시야의 성육신을 예언하고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아들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2) 천사들의 찬양(2:13-14)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만인을 위한 평화의 왕으로 그리고 있다고 했는데요, 2장에 가서도 근거가 등장합니다. 

 

"갑자기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2:13-14) 

 

예수님의 탄생 시점에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들의 노래도 누가만 기록했습니다. 신기하죠. 엄청나게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누가만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3) 시므온의 예언(2:31-32) 

이런 예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지 40일만에 유대인의 법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정결예식을 드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성령에 충만하던 시므온이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기도하며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2:31-32) 

 

내용도 누가만 기록해놨습니다. 누가가 보기에 이방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4) 나사렛 선언(4:18-21) 

마지막으로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회당에서 있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어떤 식으로 가르치셨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선언했는데요, 누가는 친절하게 예수님이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4:18-2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포로를 해방하고, 눈먼 사람들을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 희년을 선포하는 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1 1-2절을 읽으시더니 말씀이 오늘 예수님에게서부터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유명한 나사렛 선언입니다. 선언도 누가만 기록했습니다. 선언은 유대인들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민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가난하고 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 만인을 위한 평화의

누가는 이런 만민을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을 어떻게 확인한 아십니까? 그것은 바울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사도행전도 집필한 것이죠. 바울의 선교 여행에 대해 누구보다 알았기에,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에서부터 만민을 위한 평화의 왕이라는 컨셉을 계속 유지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 구원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을 위한 평화의 왕이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하늘의 천군 천사도, 예루살렘의 경건한 의인이었던 시므온도,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모든 내용을 누가복음 1-4장에 집중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4. 나겨며

- 평화의 , JESUS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누가가 이토록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지 몰랐었습니다. 그저 성탄절 성극을 만들 , 대본으로 삼기 위해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던 누가복음의 1-3장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님의 성육신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평화의 왕인 것이죠. 

 

세상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저는 혼자 호수 주변을 도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일산 호수, 마장 호수, 산정 호수를 혼자 걷다 보면 그리 평화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혼자 걸을 때가 그렇죠. 관계가 꼬이고 작은 마디에 상처를 받고 그게 하루를 망치고 생활의 흐름을 깨뜨리면 일상이 전쟁이 되곤 합니다. 

 

일상의 전쟁은 어찌보면 혼자만의 문제이니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야망과 집단의 욕망이 시너지를 내서 결국 집단간 국가간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말 세상은 평화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분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독인들이 더욱 처절하게 느끼고 깨우쳐야 같습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곳에 기쁨을 가져오는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여전히 기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누가의 강조점에 집중하면서 누가복음을 정독할 있는 주가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단순히 유대인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에 평화를 전하고 화해를 도모하고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키는 일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각인시켜 달라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전쟁의 소문이 다시 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하게 되면 유럽 전역으로 파장이 미칠 것입니다. 미국도 남의 불구경 하듯이 있을 수는 없게 됩니다. 무력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해결할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1. 누가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어떤 측면을 강조했나요? 오늘 예로 들었던 말씀들(사가랴의 예언, 천사들의 노래, 시므온의 기도,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 가운데 어떤 말씀이 가장 뒷받침한다고 생각하나요? 

 

2. 세상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있는 일은 매우 작을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있는 작은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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