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6월 22일 목요일

 

여는 기도

주님, 힘을 떨치시면서 일어나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힘을 기리며, 노래하겠습니다.

 

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ESV

Fear seized them all, and they glorified God, saying, “A great prophet has arisen among us!”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16절)

 

주석

관에 손을 대시니(14절) 죽은 사람은 관 뚜껑이 열린 채로 운구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만지는 일이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장례 행렬을 멈추고 젊은이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IVP 성경주석).

 

[오늘의 묵상]

1. 큰 무리 vs 많은 사람 

 

예수님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더해졌다. 

가버나움 지역 치안담당관이었던 백부장도 예수님을 인정했다. 

여러 지역에서 가버나움으로 오는 사람들도 끊임이 없었다.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계속 찾아왔다. 

가버나움 중심의 갈릴리 지역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매일 매일 들렸다.

언제나 속보가 떴으며, 그 속보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러니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한 곳에 머물면 그 지역과 그 집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매일 집회를 열 수 있는 집이 어디 있겠는가!

계속 이동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이동하는 가운데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뒤쫓았다. 

 

하루는 나인 성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님과 동행하여 함께 나인 성에 들어간다. 

그런데 성 안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상여를 든 무리였다.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울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인 성의 사람들은 이 과부의 아들의 죽음을 모두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과부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과부였다. 

당시 일반적으로 과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 오느라 고생한 어머님의 눈물이 더욱 서럽다. 

마을 사람들은 이 어머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여인의 성품 때문인지, 아님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돈 때문이지, 아님 나인 성 사람들의 착한 마음씀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나인 성의 사람들 대부분이 이 여인에게 공감하고 위로를 전하고 있으며, 그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큰 무리와 나인 성 과부와 동행하던 많은 사람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 

한 쪽은 기쁨과 기대와 소망의 무리이며, 한 쪽은 실망과 슬픔과 절망의 무리이다. 

각각의 무리 앞에 놓여 있는 예수님과 상여꾼 및 어머니. 

예수님은 그들의 길을 막는다. 

어차피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쉽게 통과하기 어렵다. 

서로 길을 비켜주어야 하는 상황. 

예수님과 제자 무리가 길을 비켜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막고 상황을 살핀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울지 말아라” 

젊은 아들을 읽은 과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옆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이 불쌍했고, 그 마을 사람들의 공감어린 행동도 인상적으로 보셨던 것 같다. 

 

관에 손을 대고 죽은 젊은이에게 명령한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런데 진짜 예수님의 명령대로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나 앉는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 상여를 따르던 무리가 모두 화들짝 놀란다. 

곳곳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상여꾼들의 곡소리와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기쁨의 탄성과 환호로 바뀐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방금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니다. 

완전히 죽었기에 상여꾼들이 관을 메고 나온 것이다. 

확실한 죽음 가운데도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병자가 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자들은 더욱 의기양양이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생겼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도 이 사건을 접해 듣고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사기꾼인가? 진짜 예언자인가? 아님 소문대로 정말 메시야인가? 

삽시간에 이 사건의 소문이 전 유대지역으로 퍼진다. 

병자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린다. 

모든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니시다. 

길가다가 만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상황에서 살리셨다. 

 

오늘은 그 장면을 상상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사와 기대가 넘친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슬퍼하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는 상황에서 길을 막으실 수 있는 용기는 나에겐 그저 신기할 뿐이다. 

예수님을 뒤에서 쫓아가든, 앞에서 만나든, 그것은 복이다. 

오늘 그런 복을 경험하면 좋겠다. 

 

[오늘의 기도]

주님을 상상합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하셨던 일들을 다시 묵상합니다. 

예수님을 쫓아가는 무리와 슬픔에 젖어 성을 빠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 

주님께 오늘도 집중합니다. 

주님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기대가 됩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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