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2월 20일 월요일

 

여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1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신 일을 누가 다 알릴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누가 다 찬양할 수 있으랴?

3 공의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

4 주님, 주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들을 구원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5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번영을 보게 해주시며, 주님 나라에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해주시며, 주님의 기업을 자랑하게 해주십시오.

6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었으며,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8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의 명성을 위하여, 주님의 권능을 알리시려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9 주님께서 홍해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시고 그들로 깊은 바다를 광야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10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11 물이 대적을 덮으므로, 그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습니다.

12 그제서야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석

우리도 우리 조상처럼 죄를 지음(6절)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였다’ 이것은 그들과 동일한 죄가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죄성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까지 의미한다(IVP 성경주석).

 

시인은 주님의 이름과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1-2절). 그 찬양은 은혜와 구원을 바라고 번영과 기쁨을 구하는 간구로 바뀝니다(4-5절). 시인의 세대 역시 조상처럼 죄를 짓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6절). 조상의 불신앙과 거역에도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셨고(7-11절), 그들은 다시 믿음과 찬양을 회복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조상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시고 건지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기도합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시인의 역사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7절이다. 

7 우리의 조상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그 많은 사랑을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바다 곧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스라엘은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홍해 앞에서 주님을 거역하게 되었다. 

원망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절망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 그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10개의 재앙으로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충분히 되돌리지 못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 시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해석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기적으로도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사람들을 기적을 원한다. 

신비로운 것들을 원한다.

영적인 것들을 보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10가지의 위대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 10가지 기적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몇 가지 기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여정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린 속도로 배운다.

빠르게 배우는 것은 휘발성이 강하다. 

기적과 이적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충격 요법 같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근육을 키워야 한다. 신경세포만 키워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다. 

근육을 키워서 실제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며,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어야 한다. 

기적을 넘어 일상을 버티고 유지하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한다. 

화려한 기적 만으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기란 이래서 어렵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예수님은 줄곧 기적과 이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더 요구한다. 

기존의 기적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기적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신비의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일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수님도 알았다. 

사람들의 요구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지 말이다. 

 

내가 내세울 기적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놀라운 기적을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도 더 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이다. 

그저 다시 한 번 성육신을 떠올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한다. 

그 사건들 속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불순종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의 삶을 추구한다. 

그분 뜻에 따르고자하는 열망이 나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의 맏음을 더욱 자라게 해 주세요. 

눈 앞에 이적이 아니라 온 주에 영향을 주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그려 내는 것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오늘도 여러 회의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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