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2. 25. 

 

0. 들어가며 

1) 가장 친한 친구? 

-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절친의 이름을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그 친구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별설교에서는 예수 중심의 바른 신학, 함께 머무는 교제, 뜻에 맞는 기도,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 이렇게 4가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늘은 두번째인데요. 함께 머무는 교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말씀을 읽어봅시다. 

 

1. 비유로 말씀하시다

1) 참포도나무(1절), 포도나무(5절), 가지(2절), 열매(2절)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합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동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이사야5:7).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실패했습니다. 왕정국가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강력한 제국에게 망했구요. 남유다는 그보다 더 강력한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지금 로마에 속국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포도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분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과거 전통에 묶여 있는 성전중심의 유대교, 회당중심의 유대교, 율법주의 유대교를 따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진정한 성전이요. 안식일의 주인되신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가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2) 비유의 기능_유진 피터슨의 비유로 말하라

- 비유의 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있으라. 거하라. 라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는 확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는 사물과 개념을 이어줍니다. 비유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힘이 있습니다. 비유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유진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IVP, p. 38). 

 

- 고정관념을 깨는 비유 

이렇듯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의 딱딱히 굳은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개념과 생각들을 마음속에 심어두십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포도나무로 여겼던 유대 사람들은 참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국가를 대체하는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랍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정도 수준의 사람이 되어야 가능한 발언입니다. 

 

- 비유의 현대화 

이 비유의 이미지가 우리 내면에 남아야 제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최상의 효과를 냈을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현대 사회에 오셔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신다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까요? 

나는 와이파이요 너희는 핸드폰이니 너희가 내게 연결되어 있으면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단다. 

나는 스킵이요 너희는 스윕퍼니 내 말에 머물러라 그러면 하우스안에 들어올 것이니... 

나는 버스 운전자요 너희는 승객이니 내 안에 머물러라 도착지점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니...

다양한 비유가 가능하겠지요. 여러분이 만들어보세요. 

 

2. 함께 머무는 교제 

1) 붙어 있으라(4절), 내 안에 머물러라(4-5절),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10절)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크게 보면 하나지만, 자세히 띁어보면 세 가지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붙어 있으라’입니다. 이 표현은 비유 때문에 나온 표현입니다. 나무와 가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드러나는 표현이죠. 두번째는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거니와 결국 버림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머무는 것의 좀더 구체적 표현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의 무엇이 흘러갑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양분이 가지를 타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제자에게 전달되는 물과 양분은 바로 사랑이었던 겁니다. 

 

2) 계명을 지키는 삶(10절) 

여기서 요한은 한걸음 더 들어갑니다. 그게 10절입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바로 머무는 것은 사랑하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상상으로만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내가 가지니까 그래 꼭 붙어 있어야지’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1차원적입니다. 

그분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만나는 것, 즉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물게 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나무에 가지가 붙는 과정이죠. 그 다음에 그분의 사랑안에 머무는 것이 두번째 단계이며 그 농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안에 머물게 되는 두번째 단계의 핵심 동력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면 주님의 사랑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홀로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분께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이쯤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열매가 어떤 건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맞습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흘러 가지 끝에 열매로 맺힙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3. 교제의 시작_인격적 만남 

저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의 첫번째 단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대학생 사역을 하다보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많고, 인격적인 만남이 뭔지도 모릅니다.

 

1) 비인격적 만남

우선 인격적인 만남의 반대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비인격적인 만남이겠죠. 

- 기계적 만남_알고리즘적 만남

기계적 만남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비인격적일 겁니다. 정해지는 대로, 프로그래밍 대로 반응하는 '쉬리'하고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이겠죠.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바둑을 두는 그래서 결국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의 만남이 기계적 만남일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만남, 기대되는 만남이지만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건 프로그래밍된 결과물과의 만남이니까요. 이 만남에서는 우연을 오류라고 부릅니다. 이 만남에서의 반응은 수많은 데이타와 알고리즘의 산출물일 뿐입니다. 기계적 만남의 대표격이 바로 무속신앙, 기복신앙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공을 들인만큼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 동물적 만남_본능에 충실한 만남

동물은 매우 본능적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교미하고 싶을 때 교미합니다. 본능에 충실합니다. 본능과 본능이 만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충돌을 피하려고 평행선을 달립니다. 나는 나의 과업이 있고 상대는 상대의 과업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꿈과 열정이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굳이 조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긴 만났지만, 나에게 개입하는 걸 거부하는 만남을 동물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을 내 욕구를 채우는 데 이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계획으로 나를 조정할 의사는 없습니다. 내 본능, 내 욕구가 더 중요하니까요. 현대의 극단적 개인주의 신앙이 바로 동물적 만남입니다. 

 

- 위계적 만남_권위주의적 환경에서의 만남 

권위에 눌린 만남입니다. 북한 김정은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고대 왕정시대의 왕과의 만남입니다. 질문도 못합니다. 불평도 못합니다. 거절도 못합니다. 앞의 상대는 무서운 분입니다. 이분에게 찍히면 내 앞날이 깜깜합니다. 각 분야의 대부격인 사람들입니다. 연극계는 이윤택이라는 분이 오랫동안 성추행을 해 왔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너무 위대하시고 초월적인 분이라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지 못합니다.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대면해서 거부의사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슬금슬금 피할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오순절계통의 영적 카리스마 운동을 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아니면 극단적 보수적인 교회,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느끼는 만남입니다.  

 

2) 인격적 만남

- 지적, 감정적, 의지적 교류 

인격은 서로를 알아가고 정보를 나눕니다. 그 뿐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교류합니다. 교감이라고 하죠.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제자들을 알아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과 감정을 교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을 알리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정도 우리가 느끼길 원하십니다. 더불어 그분은 어떤 뜻과 계획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뜻과 계획과 의지에 대해서도 존중하십니다. 이것이 서로 교류가 될때, 우리는 인격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질문, 불평,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인격적 만남에는 세 가지 권리가 함께 따라갑니다.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을 막고 질문을 못하는 만남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궁금하면 물어볼 수 있는 관계가 인격적 관계입니다. 비권위주의적 관계입니다. 좀더 세게 나가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도 인격적 관계에서는 가능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좀더 세게 나가볼까요. 때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은 거부 자체를 못하게 막는 분이 아닙니다. 정 하기 싫으면 안하겠다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강제하거나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잘 짜여진 기계에 불과합니다.

 

 

4. 나가며

1)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라. 

핵심은 이겁니다. 인격적 만남을 시작하십시오. 참포도나무에 제대로 붙으십시오. 그동안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다면 이제 인격적인 만남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성경을 다독했다고 인격적 만남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제 3월이 시작됩니다. 청소년기를 마치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는 여러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건 한 번 설교를 듣는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참포도나무되신 그분께 붙어봅시다. 그래서 그분안에 머물러 있어봅시다. 인격적인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종교행위가 아닌 살아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