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0.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4-26]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몸을 따뜻하게 하고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나에게는 행함이 있다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잘하는 일입니다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어리석은 사람이여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것입니다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여러분이 아는 대로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지난 주에 우리는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의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죠. 권력, , 혈연 이런 것이 차별을 정당화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보호받지 못했던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소위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죠. 야고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봤습니다.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죠. 오히려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서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에베소의 감독이 되는 인생역전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넘쳐났습니다. 게다가 야고보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율법,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는 이제 조금은 논쟁적인 주제로 들어갑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내에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어이없는 생각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라는 생각이 무섭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로마서에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와 음식법과 예식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유대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죠.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왜곡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필요없다,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오해했고, 바울의 주장도 오해했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없었습니다.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아주 강한 어조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행함 없는 믿음

사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면 야고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있습니다. 야고보는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 행정가답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합니다. 14절에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과연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사람이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그런 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찾아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초췌해 보이십니까? 그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렸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몸도 따뜻하게 하시고, 밥도 맛있게 많이 드세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겁니다. 실제적인 도움이 없습니다. 옷도 나누지 않고, 밥도 나누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을 행함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섭게 다음 문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땅에 선포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주인이시며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것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지식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받는 방법에 항상 집중해 왔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는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왔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까지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습니다. 로마서 8장까지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믿음이라는 새로운 원리가 도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씀을 이어갑니다. 서로 잘난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낫다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통합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하나될 것을 의도하였습니다. 12장부터는 더욱더 믿음대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그렇습니다. 바울도 믿음으로 구원의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의 삶의 실천과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로마서라는 편지에 함께 놓았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편지가 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할례주의자들과 한판 크게 싸우면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갈라디아서 2:16). 그러나 5-6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에 따라 행동하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언급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라디아서 5:22-25 중 발췌) 

 

어떻습니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은 행함으로 이어지도록 배치했습니다. 복음이 윤리를 낳는 겁니다. 개인 윤리, 공동체 윤리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 위안입니다. 절반의 로마서, 절반의 갈라디아서가 되는 겁니다.

 

2. 어리석도다 

편지에 쓰지 말아야 단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것입니다. 글을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대화 속에서 나온 욕이나 비방은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있지만, 혹은 대화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쌍방의 잘못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공적인 문서, 이메일, SNS 등에 남겨진 욕과 비방은 영원히 남아 나의 꼬리표가 되어 잊을만하면 튀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조심해야 일입니다. 

 

그런데 최고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가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죠? 

 

20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써서는 안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는 걸까요? 18절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행함을 나누고 있음을 있습니다. 둘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군요. 저에게는 행함이 있답니다. 행함이 없는 당신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통해 나의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행동을 중시하는 바른 신앙의 사람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믿음과 행함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있음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잘못합니다. 믿음이 없는데, 행함만 있으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행함의 근원적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것입니다. 동기가 없이 행함으로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행함은 뗄레야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적극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행함이 뒤따라야 하는 겁니다. 

 

#아기 고양이 '새까미' 구조 이야기 

지난 주일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교회 근처에서 놀다가 심한 고양이 감기에 걸려 어미에게 버림받고 홀로 있던 2-3개월된 아기 고양이를 구조했습니다. 예배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동물병원에 가자고 해서 치료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내도 알러지가 있고 저도 먼지 알러지가 있어서 동물을 집에서 키우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고 있었죠. 아들이 아직 다섯살이라 그것도 조금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날씨를 확인해보니 계속 비가 내린다는 거예요. 허피스라는 고양이 감기에 걸리면, 면역이 약한 아기 고양이는 죽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어쩔 없이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가다가 다시 병원에 들러 구충제 주사를 맞히고 귀에 있는 진드기 제거를 했죠. 분변 검사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기 고양이 임시보호를 시작하게 되었죠. 병원비만해도 10만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병든 아기 고양이 돌보느라 잠도 번이나 설쳤죠. 밥도 못먹는 아이 고양이 입을 벌려서 미음 같이 만들어 먹였습니다. 정성을 들였더니 회복되어 어제 병원에 갔는데,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허피스 고양이 감기 때문에 결막염이 와서 눈도 못떴었거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말 데려가기 싫었지만, 작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했죠. 작은 실천이지만, 이런 실천들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밖의 본문#1

야고보는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라합이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구약이 익숙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이야기 구성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당시에 뉴욕, 런던, 서울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라고 하시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땅과 자손과 그리고 세계가 자신을 통해 복을 누리게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고 그것을 철썩같이 믿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바울은 부분을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였기에 그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에 등장하는 이신칭의의 중요한 근거입니다(로마서 4). 

 

하지만,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다른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바로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렵사리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말도 안되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직접 죽이려고 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말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은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 니가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진정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겠다.’(창세기 22:11-12, 의역)

 

아브라함의 여러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완전히 인정해주십니다. 야고보는 이런 실천과 행동이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하심을 받는 선포와 선포에 걸맞는 삶을 인정받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의롭다하심의 선포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포에 걸맞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합니다. 

 

4. 밖의 분몬#2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찌보면 수치스런 이야기를 꺼내들었습니다. 바로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이야기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면서 온갖 기적을 경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그녀가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리고를 정탐하러 이스라엘 병사 둘을 몰래 숨겨주고 돌아갈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며 결국 난공불낙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졌으며,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였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였으며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여인이 되었습니다(마태복음 1:5). 그리고 따지고 보면 편지를 쓰고 있는 야고보의 직계 조상이기도 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믿음과 행동으로 인류구원의 약속을 이어가는 엄청난 가계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죠. 

 

야고보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믿음의 지적인 측면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라합의 믿음도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마치 귀신도 구원에 이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이쯤 되니까 야고보가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말로만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 말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자칫하면 그들은 귀신들의 믿음과 동급이 수도 있습니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죽음은 사단과 귀신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5. 나가며_믿음의 실천이 살아있는 공동체 

여러분, 만약 야고보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공동체를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같습니까?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편지를 쓸까요? 환생은 기독교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냥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질문을 심도있게 곰곰이 살펴야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나요? 우리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송죽원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옆에 신기한 놀이터가 생겼습니다. 주말이면 정말 놀이 공원 처럼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좋은 일이죠. 그런데 송죽원의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왠지 비교될 같아 갑자기 마음이 쓰입니다. 우리 교회 유치부 아동부에는 송죽원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은 우리가 있는 아주 작은 실천이 것입니다. 송죽원을 졸업하는 분들, 보호가 종료되는 분들의 나이는 18세입니다. 정착지원금으로 국가로부터 500만원에서 80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돈만큼 중요한 것이 이들의 갑작스런 자립과 그로부터 오는 자유 그리고 외로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돈, 안정적인 직장, 학업 유무를 성공한 자립의 기준으로 많이 봐요. 이것들이 충족되면 겉으로 보기엔 잘한 자립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인 자립에 성공했더라도 아이가 혼자 지내며 외로움을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면,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성공적인 자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물리적인 자립을 잘했을 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있는 상처를 잘 헤쳐나갈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해요.”
-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센터’ 조한나 기획처장/
출처 :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348

 

그동안 우리 교회가 송죽원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치부 아이들을 많이 섬긴 것으로 압니다. 만약 우리 송청이 송죽원의 보호 종료된 청년들을 재정적이든 정서적이든 도울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좀더 많은 분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송죽원의 아이들을 섬기는 에너지를 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부, 아동부의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섬겨 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말로만 하는 위로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말하는 것과 배치되거나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로부터 빨리 풀려나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함께 기도하기]

1. 우리의 믿음이 지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2. 송죽원의 어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의 상처들이 회복되고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보호 종료 되는 18살의 청년들이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충분한 도움 속에서 건강하게 자립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둘이서 잠깐 짝을 지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바울의이신칭의 야고보의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사이의 부조화를 느껴 적이 있나요? 어떻게 해소할 있을까요? 

 

2. 나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뜻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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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3.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17]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당신은 거기 있든지, 발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6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7여러분이 받드는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라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하신 분이 또한살인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역시 야고보서는 난해합니다. 때로 성경 저자가 명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지 관점으로, 딜레마 혹은 트릴레마 없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글로 적혀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 말이죠. 

 

바울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야고보의 글은 너무 단도직입적입니다.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에서 보이는 신학적 진술, 그리고 토대 위에 설계된 생활 윤리, 공동체 윤리이렇게 집을 지어가야 이해가 그나마 쉬울 텐데,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시험에 인내하라, 분노하지 말고 조심하라, 그리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서 같기도 하고, 규정집 같기도 하고, 여튼 신학이 정확히 노출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고 어떤 토대에서 말하는지 흐릿해서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문맥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자유를 주는 율법같은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적용되는 상황에서도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언급이 빨리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초기 지도자 야고보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서 특별한 갈등과 긴장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둘을 통합해서 조화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 차별 노노

확실히 야고보서는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편지입니다. 공동체 내외부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초대 교회 지도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박해와 같은 외부의 핍박과 시련을 인내하라고 편지의 1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분노의 말을 삼가며 성경 말씀을 실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의 말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야고보는 그걸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가 눈여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동체내에 존재하는 차별입니다. 2-4절을 읽어봅시다. 

 

2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4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비슷한 경우가 발생했음을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에 편지를 쓴다는 것은 오늘날 이메일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입니다. 필요한 내용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예를 들었다는 것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모범 되신 예수 그리스도 

기독 공동체에 암암리에 녹아 있는 차별을 보았습니다. 야고보는 그냥 넘어갈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차별이 사라져야 했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놓인 차별의 간극을 메워야 했죠. 야고보가 사용한 논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차별해야 하지 않아야 하는 번째 이유는, 야고보의 형제 자매가 우리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영광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자/빈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경험한 예수님에 관한 충격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뽑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더니 갑자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원래 이런 소문은 삽시간에 번지잖아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먹을 시간조차 없습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리에 앉히고 순서를 정해서 병도 고쳐 주시고, 귀신도 내쫓으십니다. 그런데 너무 갑자기 인기를 얻으니 사람들의 시기 어린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것입니다. 혹은 악한 귀신이 들려서 귀신이 벌이는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런 소문이 누구의 귀에 들어갔냐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가족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형님을 찾으러 갑시다. 가서 더이상 외부활동을 하지 않도록 집에 가둬둡시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고, 결국 어머니와 동생들, 특히 야고보를 필두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냥 가까이 오기엔 불가능해보였죠.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난 30 동안 함께 보냈던 형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 33-35)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겐 혈통/혈육 조차도 특혜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이 많은 사람과 없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선대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가족이라고 해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그의 동생 야고보는 보았던 거죠.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에 당시에는 분개했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었죠. 그분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사람들의 외모, 외형, 권력과 돈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적을 있었던 겁니다. 

1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본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부자건 빈자건 간에 공평하게 대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최근 서울시장, 부사시장 보궐선거 이후에 남녀의 성갈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십대 남자들이 대거 국민의힘을 지지하게 되면서 이유에 대해 궁금함이 많이 커졌습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염려가 되는 부분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과 감정의 골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베, 메갈 등의 단어가 서로를 향한 혐오를 드러냅니다. 

 

3. 인생역전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도 적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5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세상을 다스리면서, 혹은 개입하시면서 사용했던 방식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빈자를 택해서 믿음의 부요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게 아이러니 한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있고 부유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기 보다는 볼일 없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입니다. 

 

여러분, 부자들은 쉽게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곤 합니다.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 빈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운영에 대해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왔고, 많은 일들을 왔습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애적입니다. 어쩔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그렇게 밖에 없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죠. 생각의 메커니즘, 행동의 방식이 고착화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추진하게 됩니다. 부자의 논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 나라는 빈자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권리가 생긴 것이죠. 부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권리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업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실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바울이 빌레몬서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합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에 손해를 입히고 도망자가 됩니다. 우연히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죠. 그리고 바울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그럼에도 노예 도망자의 신분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죠.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하라고 말이죠. 나중에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바울의 편지를 모아 정경화 하는 과정 속에서 빌레몬서를 신약 성경에 포함시키게 되죠. 

 

야고보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곳곳에 넘쳐납니다. 그러니 결코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참고)  서종현 선교사의 삶과 사역

https://www.youtube.com/watch?v=yv6mgVT0sLM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1

 

 

4. 율법 순종

번째 이유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생각보다 치밀합니다. 논거들을 가지나 드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차별하지 말아야 번째 이유는, 율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8-12절입니다. 

 

8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 9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12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의 주요 강령은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으뜸가는 율법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와 빈자를 구별해서 다르게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죠.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혼자 산다면 굳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하나님께 시기에 맞춰 예배하고 찬양하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공동체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법이 필요하고, 법과 규정은 개인과 공동체를 자유하게 합니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해하지 않을 있는 자유까지 포괄하죠. 죄를 짓지 않을 있는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대로 하면, 자유를 얻을 없습니다. 욕구대로 하면, 이웃 아니라, 가족과 자기 자신조차도 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니 법은 포괄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유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죄인을 용서한다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나요?  율법도 그렇습니다. 물론 억압과 부자유의 율법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율법이 바로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것이죠. 

 

저는 사실 순종하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순종은 비판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변명같은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드니까 율법에 순종하라는 말의 중요성을 점점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지성은 한계를 가집니다. 정보는 쌓이고 게다가 방대해집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최신의 지식으로 하려고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는 늙고 지력은 줄어듭니다. 이상 혁신적인 생각을 받아들이는 한계를 느낍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절대 불변의 말씀에 귀의하고 싶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 육체는 젊고 생각이 싱싱하기에 무엇이든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있다고 믿으시죠?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때로는 필요합니다. 젊은 자기만의 생각을 갖는 , 포스트모던 시대에 주체적인 신앙의 자아를 형성하는 , 너무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순종의 의미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우리 나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5. 나가며_차별하지 않는 공동체 

야고보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 공동체가 빈부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율법이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공동체를 꿈꿔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단순히 개인 윤리의 책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책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인 리플렉션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계속해서 돌아보고 잘못한 것은 뉘우치고, 잘하는 것은 더욱 잘하도록 격려하며,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도 일기를 쓰지만 공동체도 그렇게 일기를 내려가야 합니다. 

 

부자와 빈자가 차별받지 않는 공동체, 남녀가 차별대우 받지 않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있을까요? 

이건 혼자의 고민, 혼자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의 고민,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면 어떨까 논의 중에 있습니다.  급한 재정적 필요가 있는 분들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공동체 모두가 함께 기금을 마련해서 돕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주도 오늘의 말씀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나 차별의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제거할 있게 달라고 기도합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나요? 때의 마음은 어떠했나요?  

 

2.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2021. 5. 16.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9-27]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말하기는 더디 하고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25그러나 완전한 율법  자유를 주는 율법을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26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주부터 우리는 야고보의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참고 인내하라는 야고보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적실한 메시지였음을 확인했습니다. 기독교 문화, 내부의 부패와 리더십의 부재, 코로나로 인한 공동체의 약화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련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일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존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어진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분노를 더디하라

첫째, 분노에 조심하세요.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몰려오면 분노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세계 그리스도인들도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공동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힘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보니까 분노를 하다보면 누군가의 말을 듣기 보다 자기 말을 빨리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분노하면 심장이 나대기 시작합니다.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 톤도 올라갑니다. 생각해서 말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논리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감정이 섞인 논리적 비약이 있는 말도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감당이 안됩니다. 외부의 시련과 박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공동체 형제 자매의 분노의 폭언을 듣는 것은 더욱 상황을 힘들게 만듭니다. 

 

서점가에 보면, 분노하라는 메시지의 책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장하성 교수님은 그의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노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며 인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분노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의 불의한 문제앞에 분노해야 때가 있겠죠. 구약의 예언자도 분노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노했죠. 그러나 그런 분노와 오늘 본문의 분노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죠? 남의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가 다릅니다. 예언자의 분노나 예수님의 분노나 혹은 시대 인권 운동가의 분노는 남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자기 열망의 좌절 때문에 생기는 화와 짜증을 곳곳에 다니면서 터뜨리는 사람들의 분노입니다. 

 

19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야고보는 듣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 발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 경청하는 사람들은 공감의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분노의 감정도 함께 느끼게 되죠. 때로 같이 화도내고, 전화도 하고, 문제제기도 합니다. 그런 분노는 그래도 정당화될 있는 공분이 있죠. 그러나 자신의 꿈과 목표, 욕구가 좌절되어서 불만이 쌓이고 쌓인 불만이 외부를 향한 분노로 폭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연발 속사포같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붓습니다. 때부터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는 자신이 우주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런 것이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이런 분노는 연쇄적인 분노를 낳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에 조심하라가 오늘 분문의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2. 말씀을 듣고 행하라

둘째, 말씀을 듣고 행하십시오. 

 

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분노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행하는 힘을 쏟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얼핏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가 온유한 마음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맞죠. 그러나 메시지의 무게로 보면 분노에 대응하는 단어는 말씀을 듣고 행하라입니다. 분노하지 말고 구약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구약과 예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듣지만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일종의 폭력적 행동입니다. 이걸 치유하고 대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겁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고, 얼굴에 밥풀이 묻었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 봤으면서도 금방 잊어버려서 밥풀을 떼지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22-24).

 

23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24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운동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기적으로 보겠다는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심은 변화를 낳는데, 변화라는 것이 나의 습관과 관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새로운 습관과 관성이 생길 때까지는 본성적 저항과 거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렵죠. 그럼에도 우리는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재정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걸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것입니다. 

 

분노하지 말라가 번째,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럼 번째는 무엇일까요? 

 

3. 경건

셋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십시오. 

 

27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보았습니다. 바로 당시의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전쟁은 수시로 일어나고 밝혀지지 않은 범죄가 빈번했습니다. 남편,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과 과부들은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지금과 비교할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는 같습니다. 자기를 위해 분노하지 말고,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 죽음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위해 분노의 감정을 승화시켜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분출하십시오. 이것이 경건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좋은 경건입니다이렇게 말입니다. 경건은 말씀을 듣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데, 실천의 방향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어제 송청 운영위원회에서는 지난 겨울 수련회에서 전재윤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그리고 지난 설성호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재정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도울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펀드 혹은 기금을 조성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조금씩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4. 나가며 

야고보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전체가 통으로 엮여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뚝뚝 끊어져서 무슨 잠언집 같고 명언집 같은 인상을 주는데요, 야고보 시대의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야고보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읽으면 점점 통합된 의미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곱씹는 맛이 있는 편지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분노하지 마라, 말씀을 듣고 행하라, 그리고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라. 이렇게 가지 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로 다가가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1. 제대로 듣지도 않고 분노하고 짜증내는 우리의 성향과 죄성을 주님께 아뢰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2. 우리 주변에 고난 받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도울 있는 우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요사이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요?     

 

2. 참된 경건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와 우리 공동체에게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2021. 5. 2.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1:1-18] 

1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3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9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10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 골몰하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설교]
0.
들어가며
5
월이 찾아왔습니다. 1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5월이 주는 푸르름의 기운이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시킵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날과 부모님 날이 있는 달입니다. 감사의 달이기도 하죠. 스승의 날도 있어서 감사한 분들을 찾게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한국의 5월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고 초록의 물결이 산하를 덮습니다. 사실 코로나만 아니면 더없이 밝고 행복한 달이 될텐데 말입니다. 

 

안따깝게도 인도에서는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40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의 백신 생산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백신 접종도 느리고 의료시설도 부족합니다. 의료 대란이 일어나서 병상 확보가 안되고 산소 마스크가 없어서 제대로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음의 문을 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 지원이 필요하고, 부족한 백신도 빨리 공급되어야 것입니다. 

 

이런 비현실적 상황 앞에서 세계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묵상한 야고보서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야고보서는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공동체적, 실천적 메세지가 가득한 편지입니다. 5 , 야고보서를 통해 우리 개인과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세계 기독 공동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면서 중요한 회의의 의장 역할을 감당했었죠.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에도 관여했습니다.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리더십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세계 기독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1세기 편지

그럼 편지를 쓰게 되었을까요? 질문이 핵심 질문입니다. 도대체 야고보는 세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썼을까요? 야고보서 전체를 살펴보면서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오늘 본문에 국한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시험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장 먼저,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시험 혹은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비롯하여 로마의 통치권 아래 있는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2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12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부류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편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통 신앙을 버리고 예수를 메시야로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생각했으며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편은 다신론과 황제 숭배 사상에 젖어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일신론을 설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존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핍박을 받을 밖에 없었습니다. 유명한 네로 황제의 박해를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경험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런 결과인데, 빈곤이 찾아옵니다. 사회적 유대관계가 넉넉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경쟁에서 도태됩니다. 처음에는 부자였어도 점점 가난이 찾아옵니다.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있던 재산도 점점 줄어듭니다. 

핍박과 빈곤, 가지가 초대교회의 구체적인 시험거리였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의 상황

3. 인내하라  

이런 핍박과 빈곤의 시험과 시련 앞에선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야고보의 번째 당부는 바로, “인내하라였습니다. 

 

 4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조금 상투적입니다. 뻔합니다. 시험이 있으니 인내하고 견디라니요. 왠지 권면을 따르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게 우리의 자연스런 반응일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의 시기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가 인내라는 사실을 뒤집기란 쉽지 않습니다. 빨리 포기하라, 과도하게 리액션하라, 모른 회피하라…. 아마도 요즘 나오는 제목으로 수는 있겠지만, 진실에 가깝지는 않습니다. 빨리 포기하면, 신앙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과도하게 리액션하게 되면, 싸움이 커집니다. 모른척 회피하면 피해가 더욱 커집니다. 박해 앞에서, 빈곤이라는 시험 앞에서 그들은 너무 쉽게 포기해서도, 과도하게 대적해서도, 모른 뒤로 숨기도 부적절합니다. 일단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고통스런 상황을 인정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야고보는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 아프지만 참고 인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https://blog.daum.net/lifeword01/1314

4. 지혜를 구하라  

번째 당부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입니다. 5-7절을 읽어봅시다.

 

5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6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서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그런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8그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시험, 시련,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분은 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의 잠언은 지혜의 보물 창고 같은 글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지혜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말고도, 구약의 모세 오경을 비롯한 성경의 이야기들이 인생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지혜의 근본되신 그분 자신이 스스로 내려오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진정한 지혜이십니다. 세상을 살아갈 지혜 자체요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혜의 원천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지혜를 주십니다. 

 

고난의 , 시련의 , 시험을 때를 만났을 ,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의 원천되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5. 나가며_시험 속에서 

지금 기독 청년들은 다양한 압박 속에서 살아갑니다. 코로나 때문에 신앙 공동체의 와해를 경험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에 청년들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덤태기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웃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는 이미지가 쌓이고 말았습니다. 지난 달에 장신대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개신교인들이 바라보는 교회의 이미지는이기적이다입니다. 비개신교인 응답자의 76% 이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주간 리포트  제 92호 (2021.4.23. 자), 7페이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정립하기에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디폴트가 되었습니다. 과학와 신앙이 헷갈립니다. , , 동성애, 인권, 페미니즘, , 외교, 정치 등등 이루 말할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슈들이 있는데, 신앙인으로서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어떤 것이 성경적인가에 대해 수많은 답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유명 유투버들의 생각이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것이 바른 길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이 시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식과 비트코인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성경적 대응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청년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N 세대라며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해 왔던 청년세대들이 코로나 때문에 더욱 빈곤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독 청년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재정적 압박은 청년들은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데, 교회 생활, 신앙 생활에 돈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고 견디고 인내하라, 그리고 지혜를 아낌없이 주시는 나에게 지혜를 구하라. 

존버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버틴다는 말이죠.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는 존버해야 합니다. 끝까지 버텨내야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가능할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면서 존버하는 겁니다. 지혜롭게 존버하는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지혜를 구하는 겁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수련회를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가 만나서 집회를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이 주신 지혜로 그동안 우리 청년 공동체는 여러 위기들을 그럭저럭 넘어 왔습니다. 줌에서 수련회도 했고, 온라인 도서관도 했고, 책나눔, 성경 개론도 진행했고, 매주 예배도 드려왔습니다. 돌아보면 변화하는 시기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인내해왔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버텨왔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앞으로도 위기의 시기를 여러분과 함께 지혜를 구하며 끝까지 인내하고 싶습니다. 함께 버티자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축복합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현재 내가 겪는 시험은 무엇인가요? 어떤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나요?    

 

2. 한국교회가 혹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시험과 시련은 무엇인가요?  

 

3. 야고보는 인내하며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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