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3 26 금요일

예수님이 잡히시다 

18:1-11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예수와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셨다.

2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거기서 여러 모이셨으므로,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곳을 알고 있었다.

3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5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람이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6예수께서 그들에게내가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7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요.”

8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사람이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9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전에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나는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0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11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겟세마네)으로 가십니다. 유다는 횃불과 무기를 군사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기위해 그곳으로 옵니다(1-3). 잡히시는 상황이지만 주님은누구를 찾느냐?” 묻고내가 사람이다”(I am he) 답하십니다. 놀란 병사들은 뒤로 물러나 엎드립니다(4-6). “나는 ~이다”(I am), “사람들의 엎드림 요한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도록 내어주시며 자신의 제자들이 물러갈 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잃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17:12)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시며,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십니다.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며 묵상합시다.

 

——

 

1. 일부러

예수님은 일부러 찾아들어가신다. 죽음의 골짜기, 십자가로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은 여러번 찾았던 , 제자들이 알던 , 으레 예루살렘으로 오면 가는 곳이었던 모양이다(2). 

이날이 유다가 자신을 날이라는 알았다면,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면, 다른 곳에 가셨을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그저 있어도 되는 일이다. 굳이일부러 

예수님은 아셨다.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알고 계셨다(4). 

예수님은 자신이 마셔야 잔을 마시기로 결정하셨다. 게세마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자기부인의 전형을 보인 기도였다. 

 

이렇게 예수님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십자가로 향하신다.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기기 위해, 죄와 죽음의 법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돌진하신다. 

거침없는 행보가 부담스럽지만, 또한 필요한 일이었다. 

 

2. 놀라 자빠짐

오늘 본문의 특이점은 6절이다. 

예수를 잡으러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께서내가 사람이다라고 말씀 하시는 순간,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물리적, 정신적 충격을 받아 뒤로 흠짓 물러나더니 이내 땅에 쓰러지고 만다. 

장면은 그동안 기억 속에 각인되지 않았었다. 

이런 장면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내겐 충격이다. 

 

예수님의 신적 자기 표현에 물리적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런 물리적 충격을 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예수님을 잡으러 사람도 아니라, 굳이 따진다면 제자들의 무리 속에 사람 하나이겠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노출되고 싶다. 

그분의 말씀에 몸과 마음이 붕떴다고 떨어져서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면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순간이 아니다. 

일생에 있을까 말까 순간을 그린다. 

그분의 영광과 위엄과 사랑과 자비에 정신적, 물리적 충격을 받고 싶다.

 

이런 마음이 어찌보면, 종교적 심성에 속한 것이리라. 

위대하고 절재적인 존재에게 완전히 굴복해 보고 싶은 마음, 무조건적인 의존의 마음. 

 

이런 마음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런 종교성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상식을 파괴하고, 성경의 진리를 오히려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신적 대리인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이유를 댄다. 

맞는 말이다. 무분별한 종교성이 원래의 기독교를 타락시킨다. 

 

그러나, 신적인 위엄 앞에 노출되었던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왜곡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이, 나약한 존재로서 고통받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그분의 위엄과 광대함에 머리와 가슴에 충격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은 그대로 아름다운 위치에 두자. 경험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러하기에, 종교적인 경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지만, 오늘도 충격의 장면이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인간의 굳은 마음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변화산에서 보았던 예수님, 게세마네에서 보았던 예수님을 또한 생생히 경험하고 싶다. 

 

과학, 기술발전, 투명성, 민주화된 개인이런 단어들이 주는 비신비화, 비신화화 

속에서 줄기 신비로운 빛을 보는 경험을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은혜의 삶이다. 

 

 

 

 

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0“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아버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6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분을 믿게 사람들(교회)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20). 그들이 하나 주님 안에 거하며 세상에 주님을 나타내게 것입니다(2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것입니다(22-23).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것입니다(25-26).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가장 강력히 증거 하게 됩니다. 나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 4:3) 힘써 지켜가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도록 기도합시다.

 

——

Crazy Prayer

 

본문에 대한 반응, 감탄사였다. 미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기도가 얼마나 미친 기도였는지 실감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원대하며, 초월적이기까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기도의 이상에 반했었다. 

기도처럼만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살아가자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동시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것이라는 진리에 흥분했었다. 그러나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일단 우리가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의 개념이 너무 다양하며 또한 만의 관념 속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셋은 세상 사람들이 알게 것에 흥분한 이유가 바로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라는 나의 야망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지 때문에 점점 말씀이 멀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상을 붙들고 살고 있다. 사역도 하고 있다. 하나됨의 정도와 수준도 수정되었고, 속도와 범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됨을 붙들고 살고 있다. 다양성을 말살하는 하나됨을 포기했다. 더욱 다양해도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26)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시에 감지된다면,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되었다고 말하고자 한다. 정치적 지향이 어찌 똑같을 있단 말인가? 사역의 방법론과 방식이 어떻게 같을 있을까?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 소명이 다른데 방향을 어찌 맞추는가? 하지만, 한가지 빼지 말아야 공통 분모가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은 성육신의 사랑이요, 십자가로의 사랑이다. 또한 부활로의 사랑이며 영광으로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사랑의 결과와 행동은 희생과 섬김 그리고 영광과 통치, 이렇게 분화되고 통합된다. 

 

사랑이 나와 우리에게 있는가? 사랑을 믿고, 인식하고, 따르고 있는가? 공통분모를 놓치기가 싫다. 누군가 이것도 너의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서 하나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요. 하나됨을 이루는 아교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심도있게 고려한다면, 이런 결론은 자연스럽다(26). 

 

너무 보편적으로 추출했다고 보는가? 맞다. 보편과 상황은 주고 받는 것이다. 왔다갔다한다. 보편 없는 상황은 허무주의를 낳는다. 상황없는 보편은 전체주의 절대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됨의 보편이다. 보편을 나의 상황, 우리 공동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그것 나름의 깊이 있는 묵상과 사색의 결과여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랑이라는 보편을 추구한다. 사랑이 결여된 구체적인 행동을 그저 멀끔히 수용하고 싶지 않다.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사회개혁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하나님의 사랑없이 환경운동도 있고, 사회개혁운동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불의에 대한 분노,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보편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기본이요. 보편이요. 하나됨의 아교다. 그래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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