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03일 금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의 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소서.

 

12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의 양심이 또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에, 특히 여러분을 상대로 처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13 우리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써서 보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14 여러분이 우리를 이미 부분적으로는 이해했습니다마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여러분이 우리의 자랑거리이듯이, 우리가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것을 자랑합니다(12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 증언을 완전히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13절). 그만큼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예수의 날에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14절).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바울의 양심은 깊은 인상을 줍니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특히 서로를 향해 처신할 때 자신의 동기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이 내 양심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습니다. 곧 바울의 양심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나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내 양심은 무엇을 증언하나요?

 

[오늘의 묵상]

바울과 그의 선교단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긍심이 높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특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순박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 

사실 순박함과 진실함은 현대 사회에서 잘 알아주는 덕목이 아니다. 

순박함은 순진함으로 들리고, 진실함은 센스없음으로 들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덕목들이다. 

요사이는 센스있게 세련되게 약삭빠르게 살아야 잘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 

순박하게 진실하게 살아서는 도리어 사기나 당하고 어리석다는 평을 듣기 마련이다. 

바울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선교팀 회의에서 순박함과 진실함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적이어야 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터. 

하지만, 그들은 순박하고 진실함을 선택했다. 

 

물론 그들이 세상에 대해서 무조건 순진하게 대했다는 기록은 없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때로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와 상황을 고려한 복음 전도 내용을 사용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방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대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최선을 다해 순박하게 진실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의 어려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던 첫번째 편지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순전함으로 진실함으로 그들에게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혹여 그들이 바울의 진실함을 역이용해서 바울을 공격할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들의 순박함과 진실함이 원래부터 자신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들에게 순박함으로 진실함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럽고 때로는 약점으로 잡히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공격적으로 방어적으로, 때로는 회피하고 때로는 우회적으로 살아간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이걸 역류해서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남을 대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께서 주신 용기요, 결단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그 공을 돌린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이리저리 재고 계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가가는 것… 

이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그렇게 계산적으로 대우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대해도, 사람들이 그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알고,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면, 이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를 바울은 느끼고 있었다. 

첫 번째 편지, 그리고 이어진 중간 편지, 그리고 오늘 세 번째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바울의 진심이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 과정을 통해 성도들의 삶이 더욱 하나님께 가까워졌다. 

교회 안에 있었던 갈등과 분열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각종 파벌로 나뉘었던 교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첫 번째 편지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 오래참는 사랑의 과정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있다. 

감사가 절로 나온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 선교단과 고린도교회 성도간에 넘친다.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에게 자랑이 되어가는 관계가 되었다. 

주님의 날에는 그 관계가 확정될 것이다. 

서로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기독공동체는 법과 규정, 경쟁과 논쟁이 아니라,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를 품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야 한다. 

법과 규정으로 서로를 묶어놓는 공동체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끼어들 자리가 점점 사라진다. 

규정이 생기는 이유는 대체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인데, 그 문제로 공동체가 아팠기 때문이고, 앞으로 있을 비슷한 문제로 공동체가 아파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순간 순박함과 진실함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규정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규정이 아니라 권면이 작동하는 공간은 이제 우리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서로에게 순박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는 관계의 태도는 점점 찾아보기 어렵다. 

그 순수함을 유지하려면 소수의 공동체만이 가능해 보인다. 

인원이 많아지고, 돈의 흐름이 많아지면 순박함과 진실함만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이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도 서로의 관계에서 순박함과 진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기독공동체는 사회운동 단체가 아니다. 

기독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하는 단체다. 

기독공동체는 법과 규정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애정과 연민, 그리고 서로에 대한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다가가는 모임이다. 

이 이상을 포기하지는 말자. 

현실에 어느 정도 타협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그 이상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이상적 현실주의자 혹은 현실적 이상주의자여야 한다. 

모순과 딜레마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다. 

높은 양심과 하나님 사랑은 모든 문제에 대해 모순과 딜레마를 느끼게 하기 마련이다.

 

임은정 검사를 응원한다. 

사회의 모순을 계속 드러내고 그 딜레마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있다. 

고통이 가중되더라도 정직함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진실을 숨기는 자가 범인이다. 

부장검사 적격심사를 통과했으니, 앞으로 7년 모순 투성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함으로 살아내시길 기원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을 향해 그 모순 속에 들어가는 것. 

오늘 나에게 던져진 삶의 과제다. 

 

[오늘의 기도]

모순 덩어리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모순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고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정의롭다고 하면서 용서를 베푸십니다. 

개인을 존중하시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이루십니다. 

모든 것을 품고 계시기에 모순적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저는 순박하게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현실적 이상주의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세요.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되, 현실에 발을 딛는 자 되게 해 주세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이상을 향해 오늘도 걸어가는 하루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01월 25일 수요일

 

여는 기도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는 강한 손에 밀려서, 그들을 내보내게 될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서야, 그들을 이 땅에서 내쫓다시피 할 것이다."

2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4 나는 또한, 그들이 한동안 나그네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을 세웠는데,

5 이제 나는 이집트 사람이 종으로 부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언약을 생각한다.

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7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나는 주다.'"

9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으나, 그들은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서,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10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나라에서 내보내라고 하여라."

12 이에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이스라엘 자손도 저의 말을 듣지 않는데, 어찌 바로가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13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명하셨는데, 이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알리고 이집트 왕 바로에게도 알리라고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셨다.

 

주석

‘여호와’로 알리지 않음(3절) ‘여호와’라는 이름이 모세 시대 이전에도 알려졌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엇갈린다. 일부 학자들은 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른 학자들은 창세기에서의 이 용어의 출현이 후대의 첨가라고 제안한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 특별히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3절)는 족장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이름었음이 분명하다(IVP 성경주석). 

 

주님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반대에 직면한 모세의 호소에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바로가 주님의 능력의 손 앞에서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절). 또한 모세에게는 확신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이전에 세우신 언약을 상기시키십니다(2-8절).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가 진정 자신들의 하나님이시며, 자신들은 여호와의 백성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7절).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괴리감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이때 주님은 상황을 당장 바꾸시기보다,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이제 모세는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찾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재확신을 가져야 할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을 의지하여 여전한 현실로 나아갑시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계셨다. 

파라오가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해 큰 피해를 입어야 억지로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낼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다. 

그들의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을 드디어 실행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이집트의 죄악에 대해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광야에서 새로운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신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모든 일은 희미한 미래의 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지 믿기가 너무 어렵다. 

이건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다. 

현실은 매일 매일 고된 노동 뿐이다. 

가중된 노동 강도에 이스라엘의 리더들 누구도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되었다. 

 

무거운 노동에 지치고 기가 죽어 버렸다. 현실이 아닌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모세, 아론, 그리고 하나님… 

이들과 변론하고 토론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빨리 한 시간이라도 더 자고 싶고, 십분이라도 더 쉬고 싶다. 

차라리 건설 현장 저 아래로 몸을 던져 이생의 고단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현실을 바꿔 줄 어떤 지도자, 장로도 없어 보인다. 

파라오를 죽이지 않는 한, 암살 조직을 만들지 않는 한… 

나야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곧 노동 현장으로 불리게 될 아이들, 자녀들을 생각하니, 목이 매인다. 

내 아이들도 이런 삶을 평생 살아야 한다니… 

그렇게 제 수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니… 

모세와 아론이 오기 전에는 현장에서 잠시 쉴 때, 다른 노동자들과 가끔씩 농담이라도 건네면서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어렵다. 

하루 이틀 상간에 죽어나가는 동료들이 몇 명이던가!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하다. 

인생이 이런 거라면, 인생을 만든 모든 신들을 증오한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분, 그분도 밉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우리들에게 기껏 말 몇마디로 희망을 불러 일으키려는 시도가 헛되다. 

군대를 숨겨 왔는가? 암살단을 데리고 왔는가? 쿠데타를 일으킬 내부 조직을 갖추었는가? 

도대체 어떻게 구출시켜서,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로 간단 말인가? 

모두 미친 것 아닌가? 

피곤하다. 자고 싶다. 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내 모든 존재가 태워졌으면 좋겠다. 

 

모세는 이런 사람들의 정서를 보고 있다. 

분노를 넘어 무기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삶의 희망, 그 한 줄기를 붙들다가 시들어 버리는 사람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들에겐 기력이 남지 않았다. 

죽음의 기운만이 그들 눈동자에 비친다. 

도대체 동족들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데, 파라오와 그의 측근들, 권력자들, 이집트 사람들은 어쩌겠는가?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하다. 

그분이 하시겠다고 하니, 그대로 전한다. 

동족에게도, 파라오에게도… 

처량하다. 

말뿐이라서… 

뭔가 능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지극히 비현실적이라서… 

 

자꾸 말만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야속하다. 

그분은 명령을 하시는데, 그 명령에 따른 후속 조치가 없어 보인다. 

여전히 말을 전하라고 하신다. 

시간은 흐른다. 새로운 날이 찾아온다. 말만 남는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가 이런 시간들일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고, 그분의 소명이 있음을 알겠다. 

그러나 그 약속의 성취는 더디고, 그 열매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말씀을 전하라 하시니 최선을 다해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전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말뿐이다.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소망에 대해 전달하지만, 여전히 흐릿하다. 

교인들도 점점 지쳐간다. 

믿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오래된 습관만이 남아 교회를 지킨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그렇게 소망했지만, 그건 요원해보인다. 

10-20년을 사역해도 거기서 거기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의 마음 속 한탄이 들리는 듯 하다. 

현상유지만 해도 감지덕지다. 

점점 매말라 간다. 처음엔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면, 시간이 흘러 무기력으로 빠져들어간다. 

꿈을 꾸지만 혼자만의 꿈으로 사그라든다. 

다른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 해결에만 몰두한다. 

문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 해결하다가 하나님의 꿈은 뒷전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속 명령하신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고. 

내가 너희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실행하겠다고. 

그러니 너는 가서 그 약속의 말씀을 전하고, 나의 계획을 알리라고. 

 

 

[오늘의 기도]

오 주님, 

참 어렵습니다.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 옵니다. 

오손도손 그저 인생의 작은 행복들을 누리면서 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당신의 계획을 알리고, 그 계획에 따라 실천할 것을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당장은 변화도 없어 보이는 그 말, 

그 말에 목숨 걸고, 그 말을 전하라 명령하시니,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 불러주셨으니, 그 일을 위해 구원해주셨으니, 

주님, 끝까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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