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0. 김혁수 

 

[본문_야고보서 2:14-26] 

14나의 형제자매 여러분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있겠습니까?

15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몸을 따뜻하게 하고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나에게는 행함이 있다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잘하는 일입니다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어리석은 사람이여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것입니다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여러분이 아는 대로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행함으로 의롭게  것이 아닙니까?

26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설교]
0.
들어가며
지난 주에 우리는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의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죠. 권력, , 혈연 이런 것이 차별을 정당화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보호받지 못했던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소위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죠. 야고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봤습니다.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들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죠. 오히려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서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에베소의 감독이 되는 인생역전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는 넘쳐났습니다. 게다가 야고보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율법,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차별 없는 공동체를 꿈꾸는 야고보는 이제 조금은 논쟁적인 주제로 들어갑니다. 야고보는 공동체 내에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어이없는 생각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라는 생각이 무섭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로마서에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할례와 음식법과 예식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유대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죠.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왜곡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필요없다,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오해했고, 바울의 주장도 오해했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없었습니다.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아주 강한 어조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1. 행함 없는 믿음

사실 내용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읽어보면 야고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있습니다. 야고보는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 행정가답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합니다. 14절에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과연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사람이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그런 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에 찾아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초췌해 보이십니까? 그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렸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몸도 따뜻하게 하시고, 밥도 맛있게 많이 드세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겁니다. 실제적인 도움이 없습니다. 옷도 나누지 않고, 밥도 나누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것을 행함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섭게 다음 문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17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땅에 선포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주인이시며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것이 지식에 머무는 죽은 지식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받는 방법에 항상 집중해 왔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는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왔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까지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16장까지 있습니다. 로마서 8장까지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믿음이라는 새로운 원리가 도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씀을 이어갑니다. 서로 잘난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낫다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통합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고 하나될 것을 의도하였습니다. 12장부터는 더욱더 믿음대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그렇습니다. 바울도 믿음으로 구원의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의 삶의 실천과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로마서라는 편지에 함께 놓았던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편지가 바울의 갈라디아서입니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할례주의자들과 한판 크게 싸우면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갈라디아서 2:16). 그러나 5-6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에 따라 행동하라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언급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라디아서 5:22-25 중 발췌) 

 

어떻습니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은 행함으로 이어지도록 배치했습니다. 복음이 윤리를 낳는 겁니다. 개인 윤리, 공동체 윤리가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 위안입니다. 절반의 로마서, 절반의 갈라디아서가 되는 겁니다.

 

2. 어리석도다 

편지에 쓰지 말아야 단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것입니다. 글을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대화 속에서 나온 욕이나 비방은 실수였다고 변명이라도 있지만, 혹은 대화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쌍방의 잘못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공적인 문서, 이메일, SNS 등에 남겨진 욕과 비방은 영원히 남아 나의 꼬리표가 되어 잊을만하면 튀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조심해야 일입니다. 

 

그런데 최고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가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죠? 

 

20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써서는 안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리석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험한 말을 쓰고 있는 걸까요? 18절입니다. 

 

18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과 행함을 나누고 있음을 있습니다. 둘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군요. 저에게는 행함이 있답니다. 행함이 없는 당신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통해 나의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행동을 중시하는 바른 신앙의 사람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믿음과 행함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있음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습니다.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잘못합니다. 믿음이 없는데, 행함만 있으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행함의 근원적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어야 것입니다. 동기가 없이 행함으로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행함은 뗄레야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적극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행함이 뒤따라야 하는 겁니다. 

 

#아기 고양이 '새까미' 구조 이야기 

지난 주일 저에게는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교회 근처에서 놀다가 심한 고양이 감기에 걸려 어미에게 버림받고 홀로 있던 2-3개월된 아기 고양이를 구조했습니다. 예배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동물병원에 가자고 해서 치료만 하고 다시 원래 자리에 놓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내도 알러지가 있고 저도 먼지 알러지가 있어서 동물을 집에서 키우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하고 있었죠. 아들이 아직 다섯살이라 그것도 조금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날씨를 확인해보니 계속 비가 내린다는 거예요. 허피스라는 고양이 감기에 걸리면, 면역이 약한 아기 고양이는 죽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어쩔 없이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가다가 다시 병원에 들러 구충제 주사를 맞히고 귀에 있는 진드기 제거를 했죠. 분변 검사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기 고양이 임시보호를 시작하게 되었죠. 병원비만해도 10만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병든 아기 고양이 돌보느라 잠도 번이나 설쳤죠. 밥도 못먹는 아이 고양이 입을 벌려서 미음 같이 만들어 먹였습니다. 정성을 들였더니 회복되어 어제 병원에 갔는데,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는 허피스 고양이 감기 때문에 결막염이 와서 눈도 못떴었거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말 데려가기 싫었지만, 작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했죠. 작은 실천이지만, 이런 실천들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밖의 본문#1

야고보는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철저하게 성경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라합이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구약이 익숙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이야기 구성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당시에 뉴욕, 런던, 서울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라고 하시죠.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땅과 자손과 그리고 세계가 자신을 통해 복을 누리게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고 그것을 철썩같이 믿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바울은 부분을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였기에 그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례를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에 등장하는 이신칭의의 중요한 근거입니다(로마서 4). 

 

하지만,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다른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바로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렵사리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저히 말도 안되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직접 죽이려고 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말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은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아라. 니가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니 진정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겠다.’(창세기 22:11-12, 의역)

 

아브라함의 여러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완전히 인정해주십니다. 야고보는 이런 실천과 행동이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하심을 받는 선포와 선포에 걸맞는 삶을 인정받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의롭다하심의 선포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포에 걸맞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합니다. 

 

4. 밖의 분몬#2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찌보면 수치스런 이야기를 꺼내들었습니다. 바로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이야기였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면서 온갖 기적을 경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그녀가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리고를 정탐하러 이스라엘 병사 둘을 몰래 숨겨주고 돌아갈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며 결국 난공불낙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졌으며,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였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였으며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여인이 되었습니다(마태복음 1:5). 그리고 따지고 보면 편지를 쓰고 있는 야고보의 직계 조상이기도 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믿음과 행동으로 인류구원의 약속을 이어가는 엄청난 가계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죠. 

 

야고보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믿음의 지적인 측면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라합의 믿음도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적인 동의나 지식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마치 귀신도 구원에 이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19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이쯤 되니까 야고보가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말로만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 말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자칫하면 그들은 귀신들의 믿음과 동급이 수도 있습니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죽음은 사단과 귀신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5. 나가며_믿음의 실천이 살아있는 공동체 

여러분, 만약 야고보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공동체를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같습니까? 야고보가 환생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편지를 쓸까요? 환생은 기독교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냥 상상해 보자는 겁니다. 질문을 심도있게 곰곰이 살펴야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나요? 우리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송죽원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옆에 신기한 놀이터가 생겼습니다. 주말이면 정말 놀이 공원 처럼 많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좋은 일이죠. 그런데 송죽원의 아이들은 충분한 사랑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왠지 비교될 같아 갑자기 마음이 쓰입니다. 우리 교회 유치부 아동부에는 송죽원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은 우리가 있는 아주 작은 실천이 것입니다. 송죽원을 졸업하는 분들, 보호가 종료되는 분들의 나이는 18세입니다. 정착지원금으로 국가로부터 500만원에서 80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돈만큼 중요한 것이 이들의 갑작스런 자립과 그로부터 오는 자유 그리고 외로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돈, 안정적인 직장, 학업 유무를 성공한 자립의 기준으로 많이 봐요. 이것들이 충족되면 겉으로 보기엔 잘한 자립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인 자립에 성공했더라도 아이가 혼자 지내며 외로움을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면,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성공적인 자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물리적인 자립을 잘했을 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에게 있는 상처를 잘 헤쳐나갈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해요.”
-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센터’ 조한나 기획처장/
출처 :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348

 

그동안 우리 교회가 송죽원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치부 아이들을 많이 섬긴 것으로 압니다. 만약 우리 송청이 송죽원의 보호 종료된 청년들을 재정적이든 정서적이든 도울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좀더 많은 분들이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송죽원의 아이들을 섬기는 에너지를 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치부, 아동부의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섬겨 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말로만 하는 위로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이 말하는 것과 배치되거나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해로부터 빨리 풀려나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함께 기도하기]

1. 우리의 믿음이 지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2. 송죽원의 어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음의 상처들이 회복되고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누리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보호 종료 되는 18살의 청년들이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충분한 도움 속에서 건강하게 자립할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둘이서 잠깐 짝을 지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문제 & 기도] 

1. 바울의이신칭의 야고보의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사이의 부조화를 느껴 적이 있나요? 어떻게 해소할 있을까요? 

 

2. 나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뜻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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