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20일 금요일

 

여는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25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제 아들의 포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그래서 주님께서 그를 놓아 주셨는데,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할례 때문이다.

27 주님께서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하나님의 산에 가서 모세를 만나서 입을 맞추어 문안하였다.

28 모세는, 주님께서 자기를 보내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과, 자기에게 명하신 이적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아론에게 말하여 주었다.

29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았다.

30 아론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주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주석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24절) 이집트에는 모세를 죽이기 위해 찾는 이집트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피흘림의 죄를 지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훗날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정상 참작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도피성이 지어졌다. 하지만 모세는 미디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런데 이제 피난처를 떠나게 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더 나아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IVP 배경주석).

 

이집트로 가던 중에 모세는 뜻밖의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여정이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십보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24-26절). 그 후 모세는 아론을 만납니다(27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말씀은 모세에게서 아론에게로, 그리고 아론에게서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전해집니다. 말씀과 이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믿게 되었습니다(28-31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모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십보라의 도움과 아론과의 동역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모세의 부정적 예상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합니다(31절). 짐을 나누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십보라와 아론 같은 동역자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본문은 난해한 분문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 

기껏 조용히 숨어 지내던 모세를 찾아내서 위대한 부름에 응답하도록 설득하셨다.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그를 죽이려고 하신다. 

그래서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추정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언약 백성으로서의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즉 히브리 백성들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약 백성임을 증명한다. 

모세 자신은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아직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 민족을 탈출시키라는 엄청난 부르심을 갖고 바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모세 스스로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고대 가족은 가장의 연장이다. 

가족 구성원이 가장의 규정과 관례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가족 속에 계속 살 수 없다. 

혹은 가족 구성원의 탈주를 방치한다면 가장의 책임일 수 밖에 없다. 

가부장제의 특징이다. 

언약 백성은 할례가 그 징표다.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책임이다. 

아들을 언약 백성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하나님이 원치 않은 일이다. 

 

둘째, 배경주석에도 나왔듯이, 모세의 죄값을 치러야 했다. 

모세는 사람을 살인했던 사람이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일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도피성 규정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설명은 나에겐 설득력이 없다. 

미래에 있을 도피성 제도를 끌고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고, 죄 값을 아들의 할례로 속죄한다는 개념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배경 주석과는 별개로, 나는 첫째 이유가 좀더 타당하게 들린다. 

모세와 그의 가족은 이제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탈출시키는 민족의 리더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가족, 특히 자신의 아들도 할례를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례의 민족의 리더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민족의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 꼭 치러야 할 예식을 모세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이미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 

모세와 십보라는 과거에 이 문제로 부부 싸움을 했을 수도 있다. 

십보라 원가족의 문화는 아들에게 할례를 주는 것을 혐오했을 것이다. 

굳이 아들에 몸에 칼을 대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어느 부모인들 좋아하겠는가!

모세와 십보라의 의견이 대립되었을 것이다. 

처가 살이를 하며 이집트와 동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모세 입장에서는 강력하게 대립하는 아내의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자신의 민족 정체성,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로서의 자격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다른 히브리 사람들에게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하나님은 약속, 언약에 집요하신 분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신실하신 분이시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상대방도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를 요청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사에 들어오셨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치와 모멸을 겪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인류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내고 약속의 피, 할례의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피를 흘리더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난 하나님과의 약속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아니 과연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는가? 

하나님은 나와 무슨 약속을 하셨던가? 

성경을 통해 하신 최종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말고 개인적으로 나와 하셨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는가? 

과연 그런 것이 있었나? 

그분이 하셨던 약속과 내가 드렸던 약속을 계속 기억하고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며, 소홀히 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다.

 

모세의 말을 듣고 그의 형 아론과 동족의 장로들이 믿고 받아들인 것은 좋은 징조다. 

첫발은 잘 디뎠다. 끝까지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원래 일이란게 그렇다. 

좋다가도 나쁘게 흘러가고, 나쁘다가도 좋게 마무리 된다. 

앞으로의 모세과 히브리 사람들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대충은 알지만 다시 궁금해진다. 

자주 보는 영화처럼, 자주 보는 드라마처럼, 모세 드라마의 다음 장면이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오늘의 기도]

약속에 진심이신 하나님, 

저도 하나님과의 약속에 더욱 천착하게 하소서. 

신실하게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합리화, 정당화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동시에 사석화, 율법주의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않게 하소서. 

약속을 신신하게 지키시어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약속을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시고, 

그 싸움에서 혹 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가 그 자리에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그 순간에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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