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기도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하소서.

 

20“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아버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2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26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분을 믿게 사람들(교회)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20). 그들이 하나 주님 안에 거하며 세상에 주님을 나타내게 것입니다(2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것입니다(22-23).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함께 것입니다(25-26).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가장 강력히 증거 하게 됩니다. 나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 4:3) 힘써 지켜가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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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Prayer

 

본문에 대한 반응, 감탄사였다. 미친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 갈수록 기도가 얼마나 미친 기도였는지 실감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원대하며, 초월적이기까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는 기도의 이상에 반했었다. 

기도처럼만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하고 바라고 소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가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살아가자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동시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것이라는 진리에 흥분했었다. 그러나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일단 우리가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의 개념이 너무 다양하며 또한 만의 관념 속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셋은 세상 사람들이 알게 것에 흥분한 이유가 바로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라는 나의 야망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지 때문에 점점 말씀이 멀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상을 붙들고 살고 있다. 사역도 하고 있다. 하나됨의 정도와 수준도 수정되었고, 속도와 범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이 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됨을 붙들고 살고 있다. 다양성을 말살하는 하나됨을 포기했다. 더욱 다양해도 된다. 그럼에도 포기할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26)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시에 감지된다면,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감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되었다고 말하고자 한다. 정치적 지향이 어찌 똑같을 있단 말인가? 사역의 방법론과 방식이 어떻게 같을 있을까?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 소명이 다른데 방향을 어찌 맞추는가? 하지만, 한가지 빼지 말아야 공통 분모가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은 성육신의 사랑이요, 십자가로의 사랑이다. 또한 부활로의 사랑이며 영광으로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사랑의 결과와 행동은 희생과 섬김 그리고 영광과 통치, 이렇게 분화되고 통합된다. 

 

사랑이 나와 우리에게 있는가? 사랑을 믿고, 인식하고, 따르고 있는가? 공통분모를 놓치기가 싫다. 누군가 이것도 너의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서 하나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요. 하나됨을 이루는 아교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심도있게 고려한다면, 이런 결론은 자연스럽다(26). 

 

너무 보편적으로 추출했다고 보는가? 맞다. 보편과 상황은 주고 받는 것이다. 왔다갔다한다. 보편 없는 상황은 허무주의를 낳는다. 상황없는 보편은 전체주의 절대악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됨의 보편이다. 보편을 나의 상황, 우리 공동체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그것 나름의 깊이 있는 묵상과 사색의 결과여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사랑이라는 보편을 추구한다. 사랑이 결여된 구체적인 행동을 그저 멀끔히 수용하고 싶지 않다.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사회개혁운동을 하고 싶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물어라. 하나님의 사랑없이 환경운동도 있고, 사회개혁운동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불의에 대한 분노,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보편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기본이요. 보편이요. 하나됨의 아교다. 그래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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