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1월 05일 목요일

여는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5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16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17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18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19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20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21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22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NIV

And because the midwives feared God, he gave them families of their own(21절).

 

강제노동 정책이 실패하자, 이집트 왕은 은밀히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립니다(15-16).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들은 이집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17절).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강해집니다(20-21절). 마침내 바로는 이집트 백성에게 히브리 남자 아기를 강물에 던지도록 명령합니다(22절).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브아는, 바로의 명령이 절대적인 이집트 땅에서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17절). 하나님은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좋게 보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18-21절). 내 삶에 큰 영향력을 가진 권위자로부터 옳지 못한 요구를 받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반응하겠습니까? 

 

[오늘의 묵상]

십브라와 부아로 대표되는 히브리 산파들은 당시 절대 권력인 바로 왕에게 끌려간다. 

바로 왕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본문에서는 두 명으로 보이긴 하나, 히브리 산파들이 두 명 뿐이지는 않았을 것. 

그들은 많은 히브리 산파들의 대표격이었을 것이다. 

산파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생명의 고귀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구분해서 죽이라는 명령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다. 

십브라와 부아는 경험많고 나이도 많고 그래서 대표격으로 거명된 분들일 것이다. 

그들의 인생 전체는 생명의 탄생에 기여하고 민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생명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에 대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첫째 딸이 태어나던 그 산부인과 분만실에 들어갔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최선을 다해 아이를 배에서 꺼냈다. 

제왕절개 수술이라 그 자체로도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았다. 

아기가 나오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유난히 다리가 길었던 작은 생명체를 내 품에 꼭 안고 몇 시간 동안 있었다. 

아내가 회복실에서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3-4시간 정도 였나? 

생명의 신비가 그 시간 안에 집약적으로 다 담긴 듯 했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아기의 얼굴, 꼭 감은 눈, 꽉 다문 입, 붉은 볼… 작고 작은 소중한 생명체를 보면서…

 

생명을 실제 품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생명을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다. 

십브라와 부아는 바로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죽음 또한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니…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때로는 친구가 되시지만, 그렇다고 그분이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분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부족한 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생명의 실제를 많이 보지 않아서인 것은 아닐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못 만나봐서 그런 것은 아닌가?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실제로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그저 나의 욕망에 충실하고 욕구 충족에 온통 관심이 쏠려서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의 경험이 부족하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제한된다. 

 

하나님과 친밀하되 그분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 정치 지도자들이 많아지길 고대한다. 

그런 그리스도인 관리자들이 많아지길 고대한다. 

그런 그리스도인 목사, 선교사, 사역자가 많아지길 고대한다. 

 

그럼 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오늘의 질문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생명을 품고 생명의 탄생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전도는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입니다. 

영적 탄생을 경험하게 하소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두려워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의 탄생은 주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되, 당신의 영광과 위엄과 신비 앞에 두려워하게 하소서. 

그렇게 무릎 꿇고 당신을 부르며, 당신의 영광에 압도되길 소망합니다. 

현실에 굴하지 않고, 당신을 바라보며, 미래로 투사하게 하소서. 

주님의 명령을 듣고, 주님의 명령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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