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10일 수요일

 

여는 기도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67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69 우리를 위하여 능력 있는 구원자를 자기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70 예로부터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71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셨다.72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자기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73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이니,74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두려움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75 우리가 평생 동안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셨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78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80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석

거룩한 언약(72절) 누가의 주장에 따르면, 아브라함 및 다윗과 맺은 언약은 조건 없는 약속으로,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에서 성취되었다(IVP 성경비평주석).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78-79절) 하나님은 요한의 정의 요구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어둠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이다(IVP 성경비평주석).

 

요한의 탄생 이후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언합니다(67절).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며 원수들로부터 건져내십니다(68-71절). 이는 아브라함과 맺은 ‘자기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며, 그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의롭게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72-75절).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이 언약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76-79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된 존재로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여러 염려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우리 정체성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비는 지금도 우리를 향합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오늘의 묵상]

사가랴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자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구원자에 대한 예언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당시에 이 예언을 듣던 사람들은 뜨아 했을 것이다. 

방금 태어난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인지, 아님 다른 아기에 대한 예언인지 처음에는 헷갈렸을 것 같다. 

물론 예언을 끝까지 들으면, 아기 요한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기 때문에 정리가 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사가랴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과연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저주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저주가 아니라 징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다. 

그 말씀을 계속 간직할 것을 강제하는 강력한 표시등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사가랴는 임신한 아내의 배를 보면서 복합적인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져갔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머리를 멤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되씹고, 동시에 성경에 비슷한 사례를 다시 찾아 읽어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러니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훈련이다. 

그 침묵의 기간이 끝나자, 그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다. 

말을 많이해서 받는 성령님이 아니라, 말이 없는 중에 받는 성령님의 충만이다. 

몇 개월을 말없이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뜻에 대해 기도한 뒤에 받는 성령 충만이다. 

오순절 성령 충만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같고 다른지는 논의하지 않겠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에게 침묵은 그래서 축복이다. 

 

말이 많은 시대를 산다.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낸다. 

지금 이렇게 묵상의 글을 쓰는 것도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메시지를 나의 말과 글로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과 글이 너무 많다. 

신문도 많고, 블로그, 유툽도 많다. 

공식, 비공식 문건도 너무 많다. 

모든 것을 다 읽고 들을 수 없다. 

인공 지능, 수퍼 컴퓨터도 아니고, 사람이 어찌 그 모든 것을 다 처리하겠는가? 

말과 글과 메세지가 넘치는 세상, 

그래서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흘러 넘쳐 속옷까지 다 적셨다.  

내가 나인지, 주변의 말들이 나인지 헷갈리는 시대다. 

그렇기에 침묵한다. 

그 침묵 속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경험하고 싶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해본다. 

 

성령님의 충만은 인류 역사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감지하게 한다. 

메시아의 탄생, 인류 구원의 시작, 원수에게서의 해방,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기, 거룩하고 의로운 삶. 

메시야의 탄생은 이 같은 새로운 삶과 역사를 낳는다. 

그리고 충만한 성령님의 임재는 이 역사를 감지하게 한다. 

 

예언 중에 눈의 띄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시면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사단의 기소가 끝난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문을 여신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고, 두려움 때문에 예배드리는 삶이 청산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 평생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너무 대단하고 멋지지만, 결국 우리의 삶도 바뀌게 된다는 점이 감사하다. 

말로만의 신분 변화는 참 받아들이기 싫다. 

신분이 바뀌었다면, 그에 걸맞는 인품과 삶이 따라와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일조차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의 인물들이 증명하고, 내 삶이 증명한다. 

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메시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간다. 

 

역시 여기서도 순서가 중요하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의로워져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니, 점점 거룩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로부터 해방되어 더이상 참소를 받지 않으니, 하나님께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고, 그러니 점점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적, 심리적 역동이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을 꿈꾼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상한 지점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는 표현이다. 

언제부터 광야에 갔다는 말인가? 

광야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가? 

누가는 왜 이런 내용을 이 책에 담았는가? 

세례 요한은 참 신비로운 인물이다. 

사가랴의 예언대로 그는 예수님의 도래를 준비했다.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 자신도 인기를 누렸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있다는 사실, 자신은 그저 그분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소명 의식이 그의 삶의 지배했다. 

아마도 이런 그의 의식과 삶의 스타일과 메시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광야가 아닌가 싶다. 

사가랴가 침묵을 통해 배웠던 것을 요한은 광야에서 배웠다. 

침묵을 통해 성령님의 충만함에 이른 것처럼, 광야를 통해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사역한다. 

침묵과 광야를 그렇게 서로 통한다. 

 

나에게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나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 인생에 침묵과 광야는 어디인가?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길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침묵과 광야!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인가!! 

 

 

[오늘의 기도]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기대합니다. 

당신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관계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지식이 과하여 당신을 분석하고 재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님의 충만함 속에서 꼭 필요한 말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